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102화 (102/127)

# 102

생긴 대로 노는 놈이네.

“모지리. 네가 네 명을 재촉하는구나.”

“헛소리!”

사람을 죽이는 건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니 하얀색 구슬의 능력을 흡수해서 내력이 정화된 이후로 은근히 살인이 거슬린다.

악인을 죽이는 것도 거슬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천외천으로 넘어오면서 블루 시조드래곤의 기운을 흡수한 이후로 선악의 구분이 더욱 확실해졌다.

악인에게 꽂는 철퇴는 여러모로 부담이 없다.

“우리가 숫자도 많아. 무려 스무 명이라고!”

성격 급해 보이는 모지리가 동료들을 보며 소리쳤다. 동료들이 그의 말에 침을 삼켰다. 그리고 저들끼리 소곤거리는데 오래지 않아 조용해졌다. 얘기가 끝난 모양이다. 모지리가 가운데로 나서며 내게 삿대질을 했다.

“네가 누군지 몰라도 공관 소속이 아닌 건 확실해.”

내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복장도 이상하고 인식표도 없어. 미등록자라는 말인데 그럼 노예로 들어온 놈이거나 주인에게서 도망친 부랑자라는 소리지.”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힘을 얻고서 말을 이었다.

“오만 잡놈들이 이곳 천외지에 흘러오고 있어. 제약마법을 뚫고 하늘을 나는 건 신기하지만 너는 절대 공관 소속이 아니야. 내 말 맞지?”

대답할 가치가 없어서 나는 웃었다. 내 웃음을 보고 모지리가 눈을 빛냈다.

“입을 닫고 있는 걸 보니 역시 부랑자 쪽이군.”

“글쎄···.”

“수작 부리지 마라. 나는 안 속아.”

그는 이제 흉악한 심성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놈들도 따라서 표독스럽게 무기를 뽑아 들었다. 모지리가 말했다.

“무의미한 살인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네 운을 탓해라.”

기가 찬다.

“누가 할 소릴.”

모지리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다른 놈들도 뒤따라서 나를 향해서 달려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지리와 달리 그의 동료들은 여전히 주저하는 듯했다. 행동을 일부러 굼뜨게 움직여서 상황을 살피는 것 같았다.

수준이 얼마나 될까.

절반 이상이 무기에 새하얀 오러를 싣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가 열, 나머지가 어중간한 놈들인가. 스무 명 중 무려 열 명이 소드 마스터다. 천외지에선 보기 드문 소드 마스터가 여기선 흔해 빠진 듯했다.

“죽어라!”

모지리가 서슬퍼런 대검을 휘둘렀다. 나는 피하지도 않고 왼팔을 올려서 그대로 막았다. 검기는 내 갑옷을 자르지 못하고 바위에 부딪힌 것처럼 부서졌다. 모지리가 두 눈을 치켜뜨고 놀랐다.

“어어! 뭐야! 내 오러가!”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일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선 실력을 숨길 필요가 없다. 있는 힘을 다해서 힘껏 내리치자 폭발 소리가 났다.

펑!

모지리의 머리가 풍선 터지듯 터졌다. 산산조각난 육편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자 놈들이 소리쳤다.

“으악!”

“괴, 괴물이다!”

“두목의 머리가 터졌어!”

그제야 실력의 우위를 몸소 깨달은 모양이다. 무기를 들고 있던 녀석들이 쏜살같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상황판단이 빠르네.”

그들은 정규교육을 받은 군인들처럼 일사불란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지?

“거미 새끼들 같군.”

나는 가장 먼저 몸을 내뺀 겁쟁이에게 다가갔다.

“헉! 어느새!”

천마비행술로 단숨에 이동하니 겁쟁이가 헛바람을 들이켜며 놀랐다.

퍽.

나는 호들갑을 떠는 녀석에게 주먹을 선사해주고 바로 다음 상대에게로 날아갔다. 그리고 다음 상대에게 도착하자마자 곧장 발을 내질렀다.

퍽.

내 발이 녀석의 허리를 뚫고 지나갔다.

“커헉!”

단순히 발길질을 했을 뿐인데 녀석의 몸이 두 동강 났다. 도망치던 놈들이 겁에 질려서 소리쳤다.

“괴, 괴물!”

“살려줘! 나는 아무 짓도 안 하려고 했어!”

“나는 잘못 없어. 모두 저 새끼가 시켜서 한 거라고!”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를 한다.

“남의 목숨 귀한 줄 모르는 놈들은 똑같이 당해봐야 해.”

나는 귀신처럼 움직이며 놈들을 처리했다. 그렇게 도망치는 놈들을 쫓아서 계속 공격하는데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뭐지?

뒤를 돌아보니 로브를 입은 사내가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법사인가.

“괴물. 내가 상대해주마.”

“같잖은 짓을 하네.”

수준 낮은 마법으로 짝꿍을 맞춰줘도 되지만 굳이 눈높이를 맞춰줄 필요는 없다. 나는 즉시 내력을 실은 탄지공을 사내에게 날렸다.

쩌저적.

탄지공이 사내의 실드를 뚫고 들어가자 사내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사내의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고용한 용병도 죽었어.”

“맙소사.”

그 뒤로 대항하는 놈들이 없다. 모두 도망치는데 사력을 다하는 모양이다.

“별것도 아닌 놈들이···.”

그때 도망치는 놈들 중 품에서 웬 종이를 꺼내 찢는 이들이 보였다.

마법 스크롤?

고위급 마법은 스크롤 형태로 저장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만드는데 노력이 많이 드는 만큼 스크롤은 가격이 비싸서 웬만해선 사용하지 않는 마법용품이다.

물론 천외천의 얘기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의 지식이다.

이쪽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마법을 저장해서 사용하나?

나는 그들을 유심히 쳐다봤다. 호기심을 품고 관찰을 하는데 놈들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 적개심을 품고 공격을 하는 놈들이 아니라 겁을 먹고 도망치려는 놈들 같다.

설마 포탈 같은 이동마법이 저장된 스크롤은 아니겠지?

예상이 맞았다. 푸른 빛이 일렁거리자 놈들이 그곳에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지들 목숨 귀한 줄은 아는 놈들이네.”

살려고 바둥대는 꼴이 안타깝지만 살려둘 생각은 없다. 나는 탄지공을 산발적으로 만들어서 놈들의 등에 대고 날렸다.

“으악!”

“허억!”

빛의 줄기가 날아가 놈들의 몸과 머리를 관통했다. 눈에 보이는 놈들이 모두 쓰러지자 나는 주변을 살펴보고 말했다.

“한 명 놓쳤군.”

전투가 끝나자 습격을 받았던 사람들이 상황을 정리하고 뒷수습을 했다. 모든 수습이 끝나고 급한 불이 꺼지자 내게 처음 말을 걸었던 여자가 찾아와서 고개를 숙였다.

“도와줘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요.”

그녀는 여전히 공손한 자세였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귀가 엘프처럼 뾰족하다.

“페리스 정보 길드 소속 아르헨 팀장이에요. 실례지만 은인께선···?”

그녀가 내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눈초리가 매서운걸 보니 습격자들이 말했던 공관의 인식표 따위를 찾는 모양이다.

“공관 소속은 아니신 것 같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천외천 소속도 아니신 것 같은데···.”

그녀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이윽고 내가 천외천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했는지 반말로 물었다.

“너는 누구지?”

“궁금해?”

내가 되묻자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궁금하진 않아.”

“현명하군.”

“내가 원래 눈치가 좋아.”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천외천 소속도 아닌데 누군가에게 끌려온 것도 아니구나.”

“무슨 소리지?”

“노예가 아니라는 소리야. 그렇다면 차원의 틈으로 이곳에 들어온 건가?”

그녀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군. 확실해. 인식표가 없는 게 그런 이유였어.”

“차원의 틈?”

“가끔 열리는 천외천 끝의 균열이지. 아주 드물게. 그렇지만 너무 드문 건 아니야. 일 년에 한두 명은 꼭 너 같은 경우가 생기니까.”

천외천으로 오는 다른 방법이 있었나.

“정체가 무척 궁금하지만 물어보진 않겠어. 곤란한 것 같으니까.”

“잘 생각했어.”

“일단 생명의 은인이니까.”

딱히 모난 구석은 없는 사람인 듯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뭣 좀 물어봐도 되나?”

그녀가 두 손을 활짝 펴며 긍정적인 의사를 나타냈다.

“뭐든지. 생명의 은인이잖아. 대답해줄 수 있는 건 다 말해줄게. 아니면 다른 거라도···.”

그녀가 몸을 베베 꼬며 말했다. 문득 내 머릿속에서 서리 엘프족이 스쳐 지나갔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혹시 이 근처에 특이한 장소는 없나?”

“특이한 장소?”

“예를 들자면 비석이 새겨져 있는 무덤 혹은, 음침해 보이는 동굴. 마력의 기운이 조금 이상하거나 다른 지역과 유난히 다른 기운이 느껴지는 곳.”

나는 레드의 시조가 봉인돼 있을 법한 장소를 추측해서 물었다. 아르헨은 골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뭘 찾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근처에 그런 장소는 없어.”

“확실해?”

“응. 수풀만 빽빽해서 아까처럼 좀도둑들만 많지. 몬스터들도 많고.”

“그렇다면 역시 헛다리 짚은 게 맞는 모양인데···. 다른 장소인가?”

블루의 말이 틀린 걸까. 녀석은 분명 마력의 파장을 읽으라고 했는데.

“혹시 찾는 게 있다면 우리 길드에 정식으로 의뢰하는 게 어때? 목숨을 구해준 만큼 싼값에 일을 맡아줄 테니까.”

그녀가 싹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보 길드라고 했으니 건수를 물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됐어.”

“뭐, 좋아. 생각이 바뀌면 말해.”

그리고는 우물쭈물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 목숨을 구해준 값은 갚아야 할 것 같은데···.”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내 시선도 그녀를 따라서 움직였다. 습격자들은 모두 물리쳤지만 후유증이 심각했다. 사태는 수습했지만 누더기를 겨우 기워서 입은 것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수습한 게 눈에 보였다.

“혹시 원하는 게 있니?”

그래도 염치는 있네. 이런 상태인데 목숨값을 갚겠다니. 판단을 내린 나는 코뿔소처럼 생긴 괴물을 쳐다보고 말했다.

“그럼 저걸 빌려줄 수 있나?”

지금까지의 정보를 통해 하늘을 날아다니는 행동이 이목을 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목을 끌어서 좋을 건 없다. 블루의 말대로 들키지 않게,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건 좀···.”

그녀가 뒷말을 또 다시 흐렸다.

“짐 마차를 끄는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죽었어.”

“두 마리가 남았군.”

“하지만 네게 한 마리를 주고 나면 한 마리 밖에 안 남아. 남은 한 마리로도 짐 마차를 끌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휴식을 취해줘야 해. 그럼 시간이 많이 걸려서 제때 도착하지 못 할 거야.”

“곤란하단 소리군.”

“다른 건 부탁할 게 없니?”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 그럼 수고하라고.”

몸을 돌리는데 그녀가 나를 붙잡았다.

“혹시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까?”

염치가 있는 줄 알았는데 없네. 내 표정을 보고 그녀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충분한 대가를 지불 하겠어. 이 근처에 있는 도시까지만 무사히 안내해준다면. 물론 우리 목숨 값도 포함해서.”

“얼마나?”

내가 묻자 그녀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품에서 자루를 꺼내 보였다.

“초록색 구슬이야.”

내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거절하지.”

“액수가 마음에 안 드니?”

다시 몸을 돌리는데 또 다시 붙잡는다.

“초록색 구슬을 열 개 줄게.”

선심 쓰는 듯한 말투가 거슬린다.

“필요 없어. 그깟 구슬.”

구슬은 지겹도록 많다.

다시 몸을 돌리는데 그녀가 다급히 소리쳤다.

“네가 찾는 것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어.”

“아까는 모르는 것처럼 말했잖아.”

“이 근처에는 없다는 얘기였어. 하지만 네가 말한 지역을 길드의 정보지에서 분명 본 기억이 있어.”

그 순간 내 뒷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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