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103화 (103/127)

# 103

“뭐지?”

난생처음 느껴보는 섬뜩한 기운이다.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두개골 안쪽에서부터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전신을 찔렀다. 눈이 마주치자 아르헨이 반색하며 웃었다.

“생각이 바뀌었구나?”

“아니.”

그녀가 내세우는 정보가 정확하다는 확신이 없다. 당장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짧게 대답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과연 아르헨의 뒤편에서부터 기묘한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 섬뜩한 마력이 시조 드래곤이 말했던 마력인가.

거미줄처럼 가늘어서 느끼지 못했던 기운은 한 번 의식하자 갑자기 훅 커졌다. 급기야 굵은 실타래보다 커져서 정신을 집중하지 않아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쪽에 뭐가 있는 거지?”

내가 뒤를 가리키자 아르헨이 말했다.

“쭉 가면 마을이 있고 도시가 있어. 왜?”

“······.”

심상치 않다.

“단순히 사람들이 사는 곳뿐인가?”

“그래. 그것뿐인데······.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정말로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내가 찾던 마력이 이것 같은데···.”

이런 불길한 기운을 따라가야 하는 건가. 이 불길한 마력의 끝에 내가 찾는 숨겨진 지역이 있는 건가. 의문을 곱씹고 있는데 아르헨이 말했다.

“너 도시 쪽으로 갈 생각이구나. 네가 가리키는 방향대로라면 그쪽에는 상업도시 센토가 있어.”

그녀가 문제의 답을 찾은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 꼴로 가면 곤란할 거야.”

“무슨 소리지?”

“넌 차원의 틈새를 통해 천외천으로 왔어. 거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표가 있을 턱이 없지.”

“그래서?”

“당장 성문의 통과를 위해서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신분을 증명할 수단이 없어. 그 꼴로 가면 도시로 들어가기 전 경비병에게 잡힐 거야.”

그러고 보니 이들은 인식표를 통해서 내 정체를 파악했었다. 도시를 통과해야 할 수도 있고 도시의 지하에 숨겨진 장소가 있을 수도 있는 만큼 알고 있어야 할 문제다.

“인식표가 정확히 뭘 말하는 거지?”

“이거야.”

아르헨이 장갑을 벗어서 오른쪽 손등을 내보였다. 과자봉지 뒤편에 새겨진 바코드처럼 검은 막대기들이 새겨져 있었다.

“1, 2, 3, 4······. 뭐야, 네 개니까 4학년이냐?”

“무슨 소리야?”

“농담이야.”

내 싱거운 말에 그녀가 표정을 굳혔다.

“인식표가 없으면 도시를 통과할 수 없어.”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인식표가 없어도 도시를 통과 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힘을 이용해서 정체를 은폐하거나 숨기면 된다. 만약 들킨다면 때에 따라서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

“우리도 마침 센토로 향하고 있어. 목적지가 같은데 우리를 도와주면 도시의 통과를 도와주지.”

“싫어.”

“어째서?”

“다른 사람 돌볼 여력이 없어. 피곤해.”

아르헨이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네 힘을 믿고 있는 거군. 그렇지?”

“그래.”

“인식표가 없는 사람이 천외천에서 발견되면 단순한 노예 취급으로 끝나지 않아.”

그녀는 협박하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천외천에서 인식표가 없는 존재는 권리가 없어. 주인 없는 물건처럼 소유물 취급을 당하게 될 거야.”

“그건 별문제가 안 되는데···.”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적당한 고목을 향해 발치의 돌멩이를 찼다. 돌멩이가 총알처럼 날아가 고목에 부딪혔다.

콰직.

움푹 파이다 못해 나무결에 구멍이 생겼다.

“마나를 실어서 물건을 멋대로 던질 수 있군. 그래, 너 정도 실력이라면 웬만한 존재들도 건들지 못할 거야. 인정하지.”

몸을 돌리는데 그녀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

“센토에는 너보다 강한 사람이 많아.”

그녀는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상업도시에는 자본이 모여. 자본이 모인 곳에는 냄새를 맡고 사나운 놈들이 많이 모이지. 한 두 명이 아닐 거야. 열 명이 넘을 수도 있어.”

“그래서?”

“인식표가 없으면 그런 놈들의 공격을 받을 거야. 공격엔 큰 이유가 없어. 인식표가 없는 존재는 공관의 보호를 못 받으니까.”

겁이 나진 않았다. 문제는 황제로부터 정체를 숨기라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라던 시조 드래곤의 말이 뒤통수를 따끔따끔 찔렀다.

소란을 피우면 안 돼.

아르헨이 말을 이었다.

“우리를 도와주면 도시의 통과는 물론, 인식표도 만들어주지.”

“인식표를 만들어주겠다고?”

구미가 당긴다.

“그래.”

“그게 가능해?”

아르헨이 가슴을 추켜세웠다. 커다란 가슴이 내 시각을 자극했다.

“문제없어. 공관에 연줄이 있거든.”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요구 조건이 더 있어.”

“뭐지? 뭐든 말해봐.”

그녀는 인자한 할머니처럼 손을 벌렸다.

“혹시 말이야···.”

나는 그녀에게 요구사항을 말했고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 * *

하드버는 정보 길드를 찾았다. 마렐퀴에게 들었던 정보를 토대로 문제의 인원을 조사해야 한다. 연합 내부의 힘을 이용해서 자체적인 조사를 해도 되지만 보는 눈이 걸렸다. 그는 오랜 기간 끈끈하게 지내온 친구의 길드, 정보 길드 해리온을 찾아갔다.

“하드버!”

평소라면 두 손 두 발 들고 반겨 줘야 하는데 목소리가 날카롭다.

“뭐지?”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무슨 소리야?”

“뭐지? 왜 잘못된 정보를 줬지?”

해리온 길드의 마스터 해리온의 말에 하드버가 얼굴을 구겼다.

“무슨 소리야? 잘못된 정보를 줬다고?”

“우리 애들이 공관에게 습격을 당했어. 순찰은 없을 거라며?”

“그럴 리가··· 정확한 정보를 줬을 텐데?”

경쟁 길드인 페리스 길드를 공격하기 위해 해리온은 계획을 세웠었다. 하드버는 그 계획의 정보를 제공한 정보 제공자였다.

“이 꼴을 봐.”

해리온이 손짓을 했다. 그의 손짓에 부하 하나가 하드버 앞으로 걸어왔다. 부하는 붕대로 한쪽 팔을 감고 있었는데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한쪽 어깨의 살이 스푼으로 떠낸 푸딩처럼 한눈에 봐도 움푹 파여 있었다.

“이게 뭐지?”

“페리스 길드를 치려다가 공관의 습격을 당했어.”

“공관의 습격을 당했다고?”

“그래.”

“그럴 리가 없어. 그날은 순찰이 없었을 텐데···.”

하드버는 자신의 기억을 의심했다. 하지만 몇 번을 곱씹어봐도 기억에 이상은 없다.

“어떻게 보상할 거지?”

“잠깐. 그날은 정말로 순찰이 없었어.”

“지금 나랑 말 장난을 하자는 건가? 내가 자네에게 준 구슬이 몇 개인데···!”

해리온이 화를 내자 하드버가 그를 제지하고 그의 부하를 불렀다.

“이봐. 쫄다구.”

“예?”

“습격한 놈의 얼굴을 기억하나?”

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인간이었고 이상한 복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날아서 왔었죠. 그래서 공관 소속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시달린 게 많았는지 목소리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혼자서 다녔나?”

“아닙니다. 여자 한 명과 남자 하나였습니다.”

“이상하군. 공관 소속이 이성과 같이 다닐 리는 없는데.”

공관 소속은 혼자서 다니지 않는다. 다른 점은 동성끼리만 순찰을 나간다는 점이다.

“여자에 대해서 말해봐.”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게 그 여자,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평범하지 않았다고?”

“기운이 요상 했습니다. 마치··· 드래곤이 폴리모프를 한 것처럼 마력의 기운이···.”

순간 하드버는 기억을 떠올렸다. 마렐퀴가 넘겼던 보고서에서 문제의 인원에 대한 정보를 읽었었다. 동료 중 하나가 여자라는 것이다.

“습격받은 장소는 어디지?”

“여기서 반나절쯤 걸리는 숲속입니다.”

“좋아, 당장 그곳으로 가지.”

* * * * * *

도시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방 도착했다. 아르헨의 말대로 그녀가 언질하자 인식표 없이도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도시의 입구를 이상 없이 통과했다.

“별 것 없네.”

도시에 입성하니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놀라지 않는군.”

“놀라야 하나?”

“너무 느긋해 보여서. 네가 살던 곳에도 이 정도 수준의 문명이 있었나?”

“물론이지.”

건축물의 외관은 지구가 더 낫다. 천외천은 너무 단순하고 심플하다.

“심플 이즈 베스트인가? 사람은 많이 돌아다녀서 시장판 같은 분위기인데···.”

“이래 봬도 상업지구니까.”

우리는 아르헨의 안내를 받아서 정보 길드 페리스로 향했다. 정보 길드답게 입구가 특이했는데 외진 골목길 구석에 낡은 천막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입구 참 대충 만들었네.”

나는 오래돼서 낡은 천막을 보고 투덜거렸다. 볼품없는 입구가 길드의 능력을 말하는 것 같아서였다.

내 요구사항을 들어줄 능력은 되려나.

괜스레 불안해진다. 아르헨이 내 눈치를 살피고 말했다.

“이건 임시 문이야.”

“임시 문이라고?”

“우리는 마법으로 원하는 때에 입구를 바꿀 수 있어.”

그녀의 표정을 살펴보니 거짓말은 아니다.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나?”

“안전은 본래 평범할 땐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거야. 위험할 때 비로소 그 진가가 나타나지.”

우리는 코뿔소처럼 생긴 동물을 천막 옆에 세우고 아르헨을 뒤따라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로 보이는 천막 안을 누비다가 잡동사니가 모여 있는 상자 뒤편을 확인하고 아르헨이 발로 바닥을 두어번 내려치자 땅바닥이 사라지고 그곳에서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를 따라서 내려가다 보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고 계단을 따라서 한참 내려가자 4평 남짓한 작은 방이 나왔다.

방은 어두웠고 벽에 있는 촛불 하나로만 위태로이 형체를 보여주고 있었다.

“왠지 음습하다, 주인.”

휴지가 두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방의 분위기가 꽤 으스스했다.

“좀 답답한 느낌인데.”

본래 어둠 속에 있으면 공간이 넓어지는 기분인데 여긴 반대로 좁아지는 기분이 들어서 숨이 턱 막힌다. 내가 물었다.

“도착했나?”

“그래.”

아르헨은 나와 휴지를 방의 구석에 위치한 소파에 앉혔다. 손님맞이용 소파인가? 푹신한 감각에 기대어 몸에 힘을 빼고 있는데 아르헨이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시간이 좀 걸려.”

“얼마나?”

“한 30분쯤. 어쩌면 더 걸릴 지도 몰라.”

“좋아. 기다리지.”

그녀는 우리에게 일러두고 방의 안쪽에 위치한 문을 열고 사라졌다. 문도 마법으로 되어있는지 그녀가 벽을 만지자 나왔다가 그녀가 문 안으로 들어가자 사라졌다. 우리는 멍하니 앉아서 그녀가 오길 한참 기다렸다.

“주인. 조용하다.”

“그러게. 뭘 하는 거지?”

5분, 10분······, 30분쯤 지나자 불안감이 조금 싹텄다. 잠자코 휴지와 수다를 떨며 50분쯤 기다렸는데 여전히 반응이 없다.

이것들이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의 얼굴이 생각났다. 사기를 칠 관상은 아니었는데. 설마.

“그러고 보면 엘프가 너무 속세에 물든 느낌이었는데···.”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고고한 엘프가 속세에 물들면 웬만한 인간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는다. 사람을 속이고, 기만하고, 뒤통수치는 수법에 이골이 났을지도 모른다.

가만 보니 입구를 매번 바꾼다고도 했었는데.

“설마 뒤통수를 치겠다는 복선이었나?”

그러고 있는데 계단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