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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의 귀환-104화 (104/127)

# 104

“흠?”

고양이를 닮은 근육질 사내와 귀가 뾰족한 엘프 하나가 내려오고 있었다.

“뭐지?”

“뭐야?”

그들은 나를 보고 의문을 연발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고양이 사내가 중얼거리자 귀가 뾰족한 엘프가 내게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지?”

“손님.”

“손님?”

“그래. 번호표 뽑고 대기 중이야.”

내 말에 고양이 사내가 피식피식 웃었다. 뭐야, 여기선 부장님 개그가 먹히는 건가?

“손님이라니. 밤손님인가?”

고양이 사내가 말하자 엘프가 끼어들었다.

“계집도 있는 걸 보니 예사 손님이 아니군.”

그리고 저들끼리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농담을 한 것처럼 킬킬 웃는다.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물었다.

“무슨 소리지?”

“여긴 길드원들에게만 허락된 구역이다. 얼굴도 모르는 외간 놈들이 올 곳이 아니란 소리야.”

고양이 사내가 웃음을 멈추고 정색했다. 자세히 보니 이마와 콧등에 왕(王)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연인들이 사랑을 나눌 장소도 아니야.”

호랑이 사내가 나와 휴지를 보고 으르렁거렸다. 말은 장난스럽지만 표정은 더 없이 진지했다. 윗니에 나있는 뾰족뾰족한 송곳니가 섬뜩하다. 저기에 찔리면 무지하게 아플 것 같은데 쟤는 밥을 어떻게 먹을까. 고통을 참고 먹나.

“손님이라니까.”

“미안하지만 그럴듯한 변명은 아니군. 길드의 접객실은 따로 있어. 오늘은 유난히 기분이 좋은 날이니 그냥 보내주지. 썩 꺼져.”

설명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뒤에 서 있던 엘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잠깐. 가만 보니 천외천의 시민들이 아니군. 인식표가 없는 걸 보니 설마 노예계급이냐···?”

장난스럽던 목소리가 고슴도치처럼 뾰족해졌다. 주변이 어둑어둑해서 잘 안 보일 법도 한데 그는 엘프답게 눈이 밝았다. 내 손등을 보고 말한 것이다.

호랑이 사내가 길길이 날뛰었다.

“하! 이거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는군. 고작 노예 따위가 시민들에게 까분다고?”

노예는 제대로 말할 권리도 없는 모양이다. 그는 더 이상 분노를 참지 않고 표출했다. 그럼에도 나와 휴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있자 호랑이 사내가 주먹을 좌우로 흔들며 성을 냈다.

“내 살다살다 이런 어이없는 일은 처음이야. 겁을 모르는 가축들이라니.”

그리고 주먹을 꽉 쥐는데 마치 운동선수가 경기를 하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주먹을 흔드는 것 같다.

스르릉.

순간 놈의 손등 위에서 손가락보다 굵은 손톱이 튀어나왔다. 네가 무슨 울버린이냐? 호인족도 저랬던 것 같은데.

“너 그거, 무작정 무기를 꺼내 드는 거 안 좋은 습관이야.”

“말귀를 못 알아듣는 가축에겐 매질이 답이지.”

“상대를 봐가면서 무기를 들어야지. 그리고 손님이라니까.”

“미친놈. 피떡이 된 뒤에도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

호랑이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원할한 관계를 위해서 죽이는 건 곤란하다. 허점이 너무 많아서 어딜 때려야 죽지 않을까 고민하는데 주먹이 날아왔다.

팟.

대응도 하지 않았는데 호랑이 사내가 인상을 쓰며 뒤로 넘어졌다.

“으아악! 내 주먹!”

이거 때릴 필요조차 없군.

호랑이 사내가 주먹을 붙잡은 채 바닥을 나뒹굴자 엘프가 소리쳤다.

“무, 무슨 수작을!”

당황한 모양이다. 놈의 양손에서 마력이 느껴지고 시원한 바람이 내 얼굴을 강타했다.

“헉.”

고개를 돌리자 엘프가 헛바람을 들이켜며 황당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윈드커터를 맞고도 상처 하나 없는 거지?”

“윈드커터? 방금 바람을 이용한 공격을 했나?”

선풍기 틀어놓은 줄 알았네.

“너 정체가 뭐야?”

“손님이라니까.”

“그게 대체···.”

놈들은 말꼬리를 흐리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이내 겁에 질려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급격히 공손해진 호랑이 사내가 물었다.

“손님.”

“그, 그렇게 말하시면 저희 같은 문지기들은 모릅니다···.”

엘프가 유들유들한 얼굴로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문지기라면 이곳을 지키고 있는 놈들이었나. 이런 경험이 많은지 눈치가 제법 빠른 모양이다.

“비밀 입구라길래 무인 시스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이들을 닦달해서 상황을 알아볼까 생각하는데 마침 벽에서 돌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쿠구궁.

사라졌던 문이 다시 생기고 그곳에서 아르헨이 튀어나왔다.

“미안. 오래 걸렸지.”

“팀장님!”

호랑이 사내와 뾰족귀 엘프가 아르헨을 보고 울부짖듯이 말했다. 이거 꼭 어린 아이한테 잘못 저지른 어른이 된 기분인데. 아르헨은 벙쪄있는 호랑이와 엘프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네가 요구했던 사항이 복잡해서 확인하느라 오래 걸렸어.”

“결론은?”

“인식표 작업은 준비가 끝났어.”

“휴지 것까지?”

“물론이지.”

일단 1차 적인 목표는 달성했군.

“지구와 관련된 건은?”

나는 그녀와 협상할 때 요구사항으로 지구와 관련된 건을 말했었다. 이들에게 지구가 표적으로 잡혀 있는 만큼 천외천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1순위는 시조드래곤의 봉인지역을 찾는 것보다 지구를 위협에서 구하는 것이다.

“그건 곤란해.”

아르헨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성과가 전혀 없나?”

“내 권한 밖이야. 한번 시행된 계획을 무마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행성관련 계획을 취소하려면 최소한 공관의 대장급 이상이어야 해. 결재권자가 대장급이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혹시 대장급과 접촉할 수단은 없나?”

아르헨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쉽게도 없어.”

나는 빠르게 납득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막연했던 일들이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 시조드래곤의 봉인을 풀고 공관의 대장급을 족치면 될 것이다.

“좋아. 그럼 인식표를 줘.”

내가 손바닥을 내밀자 아르헨이 말했다.

“따라와. 인식표는 손등에 직접 새겨야 해.”

* * * * * *

하드버는 해리온과 함께 그의 부하를 따라서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주변의 부서진 나무들과 시체들을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예상한 것보다 사건 현장이 참혹하다.

“이곳인가?”

“그렇습니다.”

부하가 싹싹하게 말하자 하드버가 허공에 손을 빙빙 휘둘렀다.

슈웅.

그러자 아공간이 열리고 손바닥 크기의 네모난 상자가 나왔다.

“그게 뭐지?”

해리온이 물었다.

“분석장치야.”

“분석장치?”

“정보 분석기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지.”

“희한한 걸 들고 다니는군.”

“비싼 값을 치르고 구매했어.”

하드버는 분석장치를 꺼내서 주변의 토양을 채취한 후 분석장치에 넣었다.

우우웅.

분석장치가 반으로 갈라지자 그 위에서 빛이 쏟아지고 3D 홀로그램이 나왔다.

해리온이 물었다.

“그걸로 뭘 할 생각이지?”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다시 시뮬레이션 할 거야.”

하드버의 말이 끝남과 홀로그램이 영상을 재생했다. 잠시 후 홀로그램을 모두 본 하드버가 말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무슨 소리지?”

하드버는 분석장치를 조작하며 말했다.

“놈은 천외천의 인원이 아니야.”

“그럼?”

“어떤 방법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천외천으로 온 존재야. 그리고 내가 찾던 놈이군.”

“네가 찾던 놈?”

하드버는 눈을 반짝였다. 비로소 녀석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했다.

* * * * * *

아르헨을 따라서 벽 쪽에 나 있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법으로 다른 지역과 이어져 있는지 들어가자마자 고풍스러운 복도가 나왔다. 우리는 카펫을 밟으며 그녀를 따라서 걷다가 이내 어떤 방에 도착했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주인.”

“그러게. 으슬으슬하네.”

방 안은 점집처럼 분위기가 요상 했는데 방 한가운데에 수정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백발이 무성한 오크 노인이 서 있었다.

또 오크냐? 그만 좀 나와라.

오크 노인은 우리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인가?”

아르헨이 대답했다.

“그래요.”

오크 노인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처럼 몹시 초조해 보였다.

“자네가 급하다고 사정해서 왔지만 이건 쉬운 일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들키면 큰일 나는 거야. 내 머리 하나로는 부족할 걸세.”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리를 수정구가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내가 말했다.

“뭘 하면 되지?”

오크의 표정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말이 짧은 사람이군.”

“말이 짧은 사람?”

“자신의 분수를 모른다는 거지. 사정은 들었지만 본인의 목숨을 귀하게 여긴다면 앞으로는 말을 길게 하는 것이 좋을 걸세. 나처럼 이해심 많은 오크는 많지 않아.”

“네가 이해심이 많다고?”

“대부분은 젊은 혈기 탓에 요절하거든. 천외천에는 나처럼 오래 산 오크가 적어.”

나이처럼 말이 많은 오크인 듯했다. 그는 툴툴거리면서 기분이 나쁜지 아르헨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이봐. 팀장. 진정 이런 사람에게 가치가 있다고 보는 건가?”

“사정이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 못 할 사정이로군.”

그러더니 혀를 쯧쯧 차고 내게 말했다.

“일단 자네부터 이걸 만지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네.”

그가 가리키는 곳엔 수정구가 놓여있었다.

“손을 얹고 있기만 하면 되나?”

“일단은··· 그렇게 하면 돼. 말이 정말 짧군.”

전체적으로 어두운 빛깔의 검은색을 띠고 있는 수정구였다. 한눈에 봐도 크기가 작아 보였는데 내가 오른손을 얹자 갑자기 훅 커졌다.

“이제 양손을 모두 얹게.”

노인의 말에 따라서 양손을 모두 얹자 어두웠던 수정구가 밝게 변했다.

“그대로 가만히 있게.”

나는 그의 말대로 수정구에 손을 얹어둔 채 가만히 있었다.

1초, 2초, 3초···10초를 지나서 1분이 넘어서자 오크 노인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뭐지?”

그가 말했다.

“뭐가?”

“설마 수정구가 고장 났나?”

그는 내 손을 물리고 수정구를 살폈다. 값비싼 보석을 만지는 것처럼 손길이 조심스럽다.

“이게 벌써 고장나면 안 되는데··· 돈이 얼마짜리인데···.”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 자신의 손을 수정구에 얹고 대기했다. 3초쯤 지나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고장이 아니잖아?”

나는 왠지 귀찮아져서 물었다.

“문제없는 거면 다시 하면 되는 거냐?”

“이상하군. 일단 다시 해보게.”

나는 처음 그에게 들었던 설명대로 수정구에 다시 손을 얹었다. 1초, 2초, 3초··· 10초를 지나서 이번에도 1분이 넘어서자 오크 노인의 표정이 또 다시 요상하게 변했다.

“말도 안 돼.”

그는 기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당신··· 누구십니까?”

목소리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갑자기 왜 그러지?”

오크 노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아르헨이 먼저 말했다.

“손등의 인식표에는 단순히 신원확인 용도만 있는 게 아니야.”

“그러면?”

“전투력을 확인할 수 있어.”

“전투력을 확인할 수 있다고?”

“그래. 일종의 계급표 같은 거지. 알다시피 천외천에는 별에 별 놈들이 많아. 취지는 사소한 분쟁을 줄이기 위해서 만들었는데 별 효과가 없어.”

“그러면 왜 현 시스템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거지?”

“과시욕구야.”

“과시욕구?”

“내가 남보다 더 강하다. 너는 나보다 약하다. 그러니까 강한 내가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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