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105화 (105/127)

# 105

“웃긴 소리네.”

“탁상행정의 결과지. 지성체들은 누구나 자기자신의 시선으로 결과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어. 과시욕구의 효과도 그저 자기자신의 만족일 뿐이지. 제대로 알아봐 주는 사람은 없어.”

나는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도움은 되겠어. 상대방에게 자신의 능력을 가시화해서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렇긴 해. 보통은 등 처먹으려는 파리들만 꼬이지만.”

한참을 기다리자 수정구의 빛이 잠들었다. 손을 떼려고 하는데 오크 노인이 말했다.

“지금 떼시면 안 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여전히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왜 그러지?

아르헨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너··· 차원의 틈새에서 왔다고 했지?”

“아마도.”

“강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하계 차원에서 이렇게 강한 존재가 있을 수는 없는데···. 왜 이러지···?”

그녀는 당황한 사람처럼 횡설수설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묻자 그녀가 수정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정구의 작업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전투력이 높다는 증거야. 넌 지금 1분을 넘어섰어. 웬만해선 10초쯤이면 끝나. 말이 안 된다고.”

나는 호기심이 솟구쳐서 물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 걸렸던 사람의 기록은 얼마지?”

아르헨을 보고 물었는데 오크 노인이 대신 대답했다.

“아마도 지금 당신일 겁니다.”

“나라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수정구를 이용했던 모든 사람들의 정보는 당연히 저도 모릅니다. 저는 제가 시행했던 사람들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잠시 후 수정구에서 죽었던 빛이 다시 살아났다. 살아난 빛은 직선으로 쏟아져 나와 내 손바닥을 뚫고 내 손등을 비췄다. 하얀색 반점이 생긴 것처럼 손등이 투명해졌다.

우우웅.

빛은 레이저 프린터가 종이를 태워서 인쇄하는 것처럼 내 손등에 바코드를 새겼다. 탄 냄새가 나고 작업은 금방 끝났다.

“아프진 않네. 이제 끝인가?”

눈치를 살피면서 손을 떼는데 노인이 눈알을 굴렸다.

“굉장하십니다.”

아르헨이 입을 쩍 벌리고 놀랐다.

“전투력 측정치가 안 나타나잖아.”

내가 물었다.

“측정치는 어떻게 확인하지?”

“두 눈을 집중해서 네 손등을 쳐다보면 나와.”

그녀의 말대로 손등을 집중해서 쳐다보자 매직아이를 한 것도 아닌데 홀로그램이 튀어나왔다. 곰곰이 살펴보니 측정치가 물음표로 나와 있다.

“어떤 원리지?”

“글쎄··· 그건 나도 잘 몰라.”

“어쨌든 이걸 신분증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거지?”

내 물음에 아르헨이 겁에 질린 사람처럼 말했다.

“네 인식표를 보면 모두 기겁을 하고 공손해질 거야.”

“혹시 이 인식표를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나?”

“그래.”

“다른 사람이 못 보게 하는 방법은 없어?”

아르헨이 말했다.

“그건 이걸 이렇게 하면 돼.”

* * * * * *

분석장치에는 한계가 있다. 과거에 특정 장소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현재 문제의 인원이 어디에 있는지, 뭘 하고 있는 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

“음··· 역시 이걸로는 놈을 찾을 수 없는 건가.”

하드버는 분석장치를 집어넣은 후 최근 구맨한 정보 분석기를 꺼내서 사용했다. 분석기의 버튼을 눌러서 주변 정보를 검색하니 주변에 있는 존재들의 전투력이 한눈에 보인다.

삑. 삐빅.

하드버는 잠시 후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이 너무 많다. 정보 분석기로 특정한 인원을 특정해서 확인하려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쓸데 없는 놈들이 너무 많아. 빌어먹을. 도시 근처라서 그런지 더 그렇군. 이래선 찾는데 한나절은 걸리겠어.”

정보 분석기를 팽겨치고 다른 방법을 궁리하는데 해리온이 말했다.

“공관에 연락해서 부탁하면 안 되나?”

“공관?”

해리온은 자신의 문제가 빠르게 처리되길 원했다.

“누군지 몰라도 내 길드를 박살낸 대가를 치르게 해야해. 한시라도 빨리.”

“공관에 일을 맡기면 소란스러워질텐데?”

“자네의 권력이 있잖아.”

해리온이 음흉하게 웃자 하드버가 얼굴을 굳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무슨 소리지?”

“입을 막는데는 한계가 있어. 엄한 곳에서 정보가 새어나갈 수도 있어. 네 길드가 이름 모를 놈에게 개박살이 났다는 걸 알게 된다면 경쟁자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우리 해리온 길드 뒤에 공관의 빽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겠지.”

하드버의 얼굴이 구겨졌다.

“내 명성을 이용할 생각인가?”

“친구의 도움을 받는 거지.”

“어쨌든 공관은 안 돼.”

“왜?”

“그런 게 있어.”

공관에 연락을 해서 일을 처리해도 된다. 그 편이 문제의 인원을 포획하기엔 가장 빠를 것이다. 하지만 하드버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처리해야해.

마렐퀴에게 받은 보고서를 통해서 알아낸 게 많다. 문제의 인원이 이곳에 온 이유는 대강 예상된다.

아마도 침략 행성 중 한 곳에서 왔겠지.

하계의 존재가 천외천에 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사례를 살펴보자면 과거에도 이레귤러라 칭해졌던 자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본인들의 재능 하나로 천외천에 왔고 능력을 펼쳐서 업적을 남겼다.

“중요한 건 신원이 없다는 거지.”

하드버는 웃었다. 비정상적으로 강한데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이 하드버가 이 일을 조심스럽게 처리해야 하는 이유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해리온이 물었다.

“멀리가진 못 했을 거야. 시뮬레이션으로 보자면 다른 길드 놈들과 붙어먹고 있겠지. 아마도 아직 도시에 있을 거야.”

“그래서?”

“도시의 경비대장에게 귓뜸해서 수배령을 내리고 놈을 포획해야겠어.”

* * * * * *

휴지의 인식표를 마저 만든 후 정보를 주겠다는 아르헨의 호의를 뒤로하고 길드를 나왔다. 제공권에 대한 권한도 인식표처럼 얻을 수 있냐고 물었는데 불가하다는 대답을 얻었다.

“결국 걸어서 다녀야겠군.”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그나마 지형적인 문제가 없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휴지가 말했다.

“아까 코뿔소처럼 생긴 건?”

“먹이를 많이 먹는다더라.”

“그래도 타고 다니는 게 좋지 않을까?”

“똥도 많이 쌀거야.”

“걸어다니기 싫은데···.”

“짐을 끌고 다닐 것도 아닌데 연비가 구린 걸 타고 다닐 순 없지.”

우리는 마력을 따라서 걸었고 도시를 나가기 위해 상가를 지나쳤다. 상가지구를 구경하면서 관광을 즐기는데 다양한 인종들이 보인다. 오크, 엘프, 수인족 등의 비교적 평범한 인종들부터 문어나 생선 대가리, 온몸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 괴상한 괴물들까지 인종의 종류가 다양하다.

“주인. 여긴 여러인종이 섞여있다.”

“그러게.”

대답을 하고 길거리를 둘러보는데 유난히 돋보이는 사람들도 보인다. 건물 사이의 으슥한 골목에서 민둥머리를 가진 대머리 여러 명이 왜소한 오크를 애워 싸고 있었다.

“그래도 지구와 사는 풍경은 비슷한 것 같다.”

“나쁜 놈들은 어딜 가도 꼭 있군.”

상가지구가 아니라 꼭 슬럼가 같군. 우리는 골목을 지나쳐서 걸음을 옮겼다. 휴지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를 불렀다.

“주인.”

“왜?”

“도시를 나가는 길은 이쪽인데 어디로 가는 거야?”

“밥 좀 먹으려고.”

“밥?”

“그래. 모처럼 신기한 곳에 왔는데 여기 음식도 먹어봐야지.”

이건 관광을 즐기는 게 아니다. 일이 중요한 만큼 적당한 휴식도 중요하다. 마침 음식점으로 보이는 가게가 근처에 있어서 생각한 것이다. 휴지가 어린아이처럼 펄쩍 뛰며 좋아했다.

“나는 찬성이야.”

“좋아. 저기서 먹자.”

우리는 남자가 식기를 든 채 미소를 짓고 있는 간판의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거리에 사람이 많아서 가게 안에도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테이블은 한적했다. 맛집과는 거리가 먼 곳일까.

“어서 오십···.”

간판이 사람이라서 점주도 사람일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점주는 뱀의 머리를 한 수인이었다. 그는 나를 보고 인사를 하려다가 석고상처럼 얼굴을 굳혔다.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그리고는 귀신을 본 사람처럼 횡설수설했다.

“이쪽으로.”

우리는 점주의 안내를 받아서 널찍한 원형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잠시 후 점원으로 보이는 여자 도마뱀 수인이 메뉴판을 들고 왔다.

“주인. 여기 글 읽을 수 있어?”

“아니. 듣고 말하는 건 되는데 읽는 건 안 되네.”

그러고보니 어떻게 말을 이해하는 거지?

아니, 됐다. 쓸데 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우리는 점원의 도움을 받아서 추천 메뉴를 주문했고 테이블을 두들기며 기다렸다. 잠시 후 점원이 음식을 들고 나왔다. 대단한 음식인 것처럼 은쟁반과 은색 가리개에 덮여져서 나왔는데 꼭 요리만화의 중국음식을 보는 것 같다.

“내가 열어 볼게. 주인.”

“그렇게 하렴.”

휴지가 군침을 닦고 쟁반의 뚜껑을 열자 음식이 나왔다. 요리만화처럼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뭐야!”

그 대신 내 얼굴이 뒤닦은 휴지처럼 구겨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점주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무슨 일? 이게 무슨 음식이지? 사람고기인가!?”

나는 음식을 가리키며 따졌다. 제대로 된 음식이 놓여있어야 할 곳에 기괴한 다리 같은 게 있었다.

“사람 고기는 아닙니다.”

“그럼 이 새까만 다리는 뭐야? 너희들 식인을 하는 거야?”

설마하니 간판의 웃고 있는 남성은 사람고기라는 뜻이었나.

내가 으르렁거리자 점주가 넙죽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블린 고기입니다.”

“고블린 고기!”

경악할 노릇이다.

“고블린은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죠. 맛도 좋습니다. 제대로 된 조리만 한다면 독도 없고···.”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점주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신경쓰지 못 했습니다. 여성분의 기운이 인간같지 않아서 동행분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실수를 했나봅니다.”

“······.”

“다른 음식으로 바꿔드리죠.”

나는 손을 흔들었다. 식욕이 싹 달아났다.

“됐어.”

“혹시 과일 종류는 어떠십니까?”

과일도 왠지 기괴할 것 같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호기심이 확 솟구쳤다. 천외천의 과일이 궁금해진 나는 그의 권유에 응했다.

“그럼 과일을 먹도록 하지.”

휴지는 하프 드래곤답게 고블린을 먹는데 거부감이 없는 듯했다. 휴지가 고블린 고기를 먹는 사이 점원이 과일을 은색 쟁반에 담아서 나왔다. 사과처럼 생겼는데 색깔이 푸르딩딩한 과일과 바나나처럼 생겼는데 크기가 수박만한 과일이 나왔다.

어떻게 먹는 거지?

먹으려고 손바닥을 비비는데 점주와 점원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왜 그러지?”

“뭔가 불편하신 게 또 있으실 것 같아서···.”

“뭐 먹고 있을 때 쳐다보는 게 제일 불편해.”

나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사과처럼 생긴 과일을 베어 물었다. 과즙이 달콤한데 뒷맛이 쓰다. 첫맛의 달콤한 맛을 지워버리고 혓바늘이 돋게 할 만큼 쓴맛이 강해서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인종이 다르니까 미각도 다른 건가. 그걸 생각 못 했네.

그때 테이블이 쿵하고 울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휴지가 접시에 코를 박고 엎어져 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기절했나?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게 이런 상황일까.

그럴 리가 없지.

점주가 나를 쳐다보고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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