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무슨 일 있나? 람버스.”
초소에 있던 오크가 걸어왔다.
“이것 좀 봐. 이럴 리가 없는데···.”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
람버스라고 불린 오크가 측정장치를 다른 오크에게 보여줬다. 그 역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흙탕물을 한 사발 먹은 것 같네. 오크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리더니 내게 말했다.
“혹시 공관에서 오신 분입니까?”
목소리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글쎄···.”
나는 가볍게 대꾸하고 눈짓했다. 이럴 땐 침묵이 최고의 대답이다.
“죄송한데, 잠시만···.”
그들은 오크답지 않게 예의를 차리며 등을 돌렸다.
“누구지? 명단에는 없는 사람인데.”
“측정치의 전투력이 한계치를 넘어섰어.”
“오늘 방문 약속된 사람이 있었던가?”
람버스가 입을 벌리고 손바닥을 쳤다.
“아.”
“왜?”
“그러고 보니 아까 공문이 내려왔지 않나?”
“맞아. 공문. 그렇다면 VIP 방문 때문에 내려온 공문인 건가?”
람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군.”
그들은 저들끼리 결론을 내리고 다시 내게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가격을 협상하는 장사꾼처럼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헤헤. 죄송합니다, 나으리. 저희가 아는 게 없어서 확인이 늦었습니다. 요즘 하도 세간이 뒤숭숭하다 보니 높으신 분들의 방문 일정이 기밀이라서 보고가 많이 늦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죄송합니다.”
람버스 옆에 있던 오크가 막아놨던 성문을 열었다.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내가 성문을 나갈 때까지 높은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허리를 넙죽 숙이고 굽신거렸다. 휴지가 호들갑을 떨며 손바닥을 짝 쳤다.
“우와! 인식표의 위력 대단해!”
* * * * * *
하드버가 보고를 받은 것은 30분이 지나서였다.
“뭐? 놈이 성문 밖으로 나갔다고?”
경비대장 할웬의 보고를 들은 하드버는 기가 막혔다. 그렇게 누차 말했는데 놈을 놓치다니.
“그게··· 부하들의 말에 따르면 인식표의 전투력이 높아서 공관에서 나온 사람인 줄 착각했답니다.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그만.”
하드버가 말을 자르고 한숨을 쉬었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들. 그는 끓어오르는 속을 곱씹다가 문득 떠올라서 물었다.
“가만.”
“왜 그러십니까?”
“인식표라고?”
“예. 인식표의 전투력을 확인하니 한계치를 초과해서 공관의 사람이라고 착각했다고 합니다.”
하드버는 관자놀이를 지긋이 누르며 생각했다.
‘인식표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사전에 조사한 결과 문제의 인원은 신분이 없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런데 인식표라니. 인식표는 천외천의 주민들만 받을 수 있는 신분증이다. 문제의 인원은 천외천의 주민이 아니다. 신분이 없는 사람이 신분증을 가지고 있을 순 없다.
‘내가 모르는 일이 있는 건가.’
변수가 생겼다는 사실에 하드버가 인상을 구겼다. 그는 신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할웬이 하드버의 표정을 읽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생겼었나 봅니다. 경비를 서는 놈들이 보통 때는 수하도 잘하고 똘똘한 놈들인데···.”
하드버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구질구질한 변명을 듣고 있기엔 시간이 아깝다.
“놈이 확실한 건가?”
“확실합니다. 여기 영상기록장치에도 확실하게 나와 있습니다.”
확인하니 분명한 것 같다. 하드버는 분노를 속으로 식히고 물었다.
“놈이 어느 쪽으로 나갔지?”
“그··· 성문의 북쪽 방향으로 나갔다고 했습니다.”
“북쪽?”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생각했다.
‘왜 하필 북쪽이지? 북쪽은 위험지역이라서 통행할 이유가 없는데··· 설마?’
북쪽에는 해방연합의 근거지가 숨겨져 있다. 고전적이지만 최고의 위장 수법으로 가깝고도 위험한 곳에 연합의 근거지를 숨긴 것이다.
‘이상하군. 이상해···.’
석연치 않았다. 혹시 수뇌부 측에서 만들어 놓은 함정이 아닐까. 그럴 확률은 거의 없지만 하드버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만 가보겠네. 수고하게.”
“아, 직접 나서시는 겁니까?”
“그래.”
“아, 저기··· 그러니까···.”
힐웬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걱정 말게. 이번 일에 대해서 책임을 묻진 않겠네.”
“가, 감사합니다.”
그제야 그의 근심 가득한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하계에서 올라온 놈이 맞긴 한 건가?’
하드버는 떠오르는 의문을 곱씹으며 건물을 나섰다. 조심스러운 성격의 그였지만 지금은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였다.
* * * * * *
람버스라는 경비원 오크는 성문의 북쪽방향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름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한참을 걸어도 나오는 게 없다.
“되게 한적하다. 주인.”
“오크들이 거짓말을 쳤나본데.”
“아무리 봐도 평범한 숲이다.”
“아냐. 평범한 건 아닌 것 같아.”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흐음.”
괴이할 정도로 조용하다.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나.
‘이상하긴 하군.’
생각을 정리하고 휴지에게 물었다.
“뛰어서 갈까?”
“그랭.”
그녀가 승낙하자 나는 그녀를 들쳐메고 뛰었다. 나보다 뛰는 속도가 느리니 어쩔 수 없다.
“마력의 파장이 요상하긴 하군.”
마력을 파악해서 목적지를 향해 무작정 뛰니 금세 목적지 근방에 도착했다. 도중에 휴지가 속도를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지만 억지로 깨워서 다시 움직였다.
“정신 차려.”
“으으. 어지러워.”
“토하지 말고.”
도착한 곳에는 숲속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비싼 예술품처럼 단조로운 형식의 건물이었는데 얼핏 보면 시멘트를 동그란 반원형 틀에 넣고 무작정 부은 것 같이 생겼다.
꼭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네.
“여기가 어디야?”
“도착했어.”
“에?··· 벌써?”
“그런데 좀 이상하네.”
내 말에 휴지가 겨우 눈을 뜨고 물었다.
“이상해? 뭐가 이상해?”
“건물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 못 했거든.”
지금까지 시조 드래곤들을 만난 곳은 자연물이 아니면 동굴 같은 천연지역이었다. 이렇게 인위적인 장소, 건물은 처음이다.
“이끼나 덩굴 같은 것도 없고 외관도 깔끔해.”
마치 관리자가 있어서 최근까지 관리되고 있던 것 같다.
“유지보수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건가?”
나는 호기심을 품고 건물에 다가갔다. 손바닥으로 벽을 툭 건드려 보았다.
“···어어?”
그 순간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벽이 물렁하잖아?”
언뜻 시멘트처럼 단단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건물의 외벽은 물렁했다. 벽을 대고 있던 손바닥이 움푹 들어갔다.
“꼭 밀가루 반죽 같네.”
손을 떼자 벽에 손바닥 자국이 그대로 남았는데 스스로 복원력이 있는 듯했다. 오래지 않아 자국이 사라졌다. 나는 이 인위적인 현상에 얼굴을 찌푸렸다.
“일종의 결계 같은 건가?”
건물 테두리를 둘러봐도 입구는 보이지 않는다. 마력의 파장을 다시 읽어봐도 장소는 이곳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건데.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 같아.”
휴지가 건물 외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겉으로 보기에 입구가 없잖아.”
나는 살짝 뛰어서 건물의 위쪽을 쳐다봤다. 과연 위쪽방향에도 입구가 없다.
“그래서?”
“입구가 없는 게 아니라 사실 모든 방향이 입구인 게 아닐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좋아. 여기서 기다려봐.”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몸을 움직였다. 진흙 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기분 이상하군.
그런데 벽에 피부가 닿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후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어? 뜨거워?’
피부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겁다. 꼭 파스를 잘못 바른 것 같다. 나는 황급히 내력을 끌어올려서 온몸을 코팅하듯이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어이가 없네.”
천외천에서는 난방을 이런 식으로 하나? 건물 전체에 열을 올리는 비효율적인 난방 방식은 처음 본다. 더군다나 겨울도 아닌데 난방을 한다고?
‘이상해.’
호기심을 품고 건물 안쪽을 향해 몇 걸음 더 걸었다. 사방이 물렁한 벽으로 꽉 막혀 있었다.
‘안쪽도 꽉 막혀 있잖아?’
상황을 의심하면서 한 걸음 더 옮기는데 그 순간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나는 그것을 확인한 후 놀라서 급히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뭐야? 왜 갑자기 나와? 건물 안에 뭐가 있어?”
휴지가 물었다.
“건물이 아냐.”
“무슨 소리야?”
어쩐지 외형부터 이상하긴 했는데.
“슬라임이다.”
“슬라임?”
나는 몸에 묻은 슬라임의 체액을 털었다. 이렇게 커다란 슬라임은 처음 본다.
“슬라임이 이렇게 커?”
“안쪽에 시체가 여럿 있었어.”
“하지만···.”
“나도 믿기지 않지만 정황상 확실해. 겉은 말랑말랑하고 속은 산성이었어. 안에 들어가니까 피부가 따끔따끔거리더라.”
“이게 슬라임이라면 이상해.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잖아.”
“모종의 이유가 있는 것 같아.”
나는 슬라임을 찬찬히 살폈다. 슬라임의 몸체가 입구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시조 드래곤을 만날 때마다 매번 결계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 슬라임이 결계인 듯했다. 나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어떻게 할 거야?”
“탄지공으로 날려버릴까?”
나는 손가락 끝에 내력을 모으다가 생각을 고쳤다.
“아냐, 탄지공을 사용하면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슬라임의 크기를 볼 때 완전히 없애려면 탄지공의 크기가 충분히 커야 하는데 내키지 않았다. 되도록 정체를 숨겨야 한다.
“그럼 어떻게 처리 하려구?”
“귀찮지만 내력을 사용해야겠어.”
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슬라임의 몸체에 오른팔을 박아넣었다.
푹.
고양이가 할퀴는 것처럼 팔이 따끔따끔 따갑다.
“확실히 평범한 슬라임은 아니야.”
나는 고통을 꾹 참고 집중했다. 오른팔에 내력을 끌어모으자 수증기가 일어나는 것처럼 새하얀 기운이 팔을 감쌌다.
뿌드득.
내 오른팔을 중심으로 슬라임의 몸체가 뒤틀렸다. 소용돌이가 이는 것처럼 슬라임의 말랑말랑한 몸통이 빠르게 회전했다. 슬라임의 몸체에 커다란 싱크홀이 생겼는데 빠르게 회전하는 내력이 싱크홀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빠드득. 뿌드득.
슬라임의 몸체가 종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내력에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다시 보니 싱크홀이 아니라 블랙홀 같다. 더군다나 내 오른팔이 슬라임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다.
‘기운을 흡수해?’
이상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윽! 너무 강하다, 주인!”
휴지의 외침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 내력이 의도치 않게 주변의 대기마저 흔든 모양이다.
나는 내력의 운용에 좀 더 집중해서 슬라임의 내부만 흔들리게 조절했다. 내력이 생각대로 움직여 줄까 의심했는데 다행히 내 수족처럼 잘 움직여줬다.
뿌드득.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슬라임의 몸체가 사라지자 전신에 충만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기운을 확인했다. 확실했다. 방금 흡수한 기운은 구슬의 기운이다.
‘몬스터의 기운을 흡수하다니···.’
언젠가 배운 삼투압 현상이 생각났다. 농도가 낮은 쪽에서 농도가 높은 쪽으로 용매가 옮겨가는 현상.
슬라임이 파괴되어 갈 곳을 잃은 기운이 내 몸으로 옮겨온 것이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것밖에 생각나는 게 없었다.
“주인 저길 봐.”
휴지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저게 진짜 입구인가봐.”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예상대로 슬라임이 사라진 곳에 입구가 나타나 있었다. 공터 한가운데에 쇠로 된 기둥이었는데 친절하게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왠지 싱겁네.”
나는 휴지를 데리고 입구로 향했다. 그러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뭐야···.”
등 뒤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