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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의 귀환-108화 (108/127)

# 108

제왕(帝王).

은색 왕관을 쓴 노인이 그곳에 있었다.

“역시··· 너로군.”

그는 나를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무슨 소리지? 난 당신을 처음 보는데.”

“자네를 찾고 있었다네. 문제의 인간이여.”

“문제의 인간? 나를? 왜···?”

내가 나를 가리키고 묻자 휴지가 내 얼굴과 노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는 사람이냐, 주인?”

“저런 노인을 내가 알겠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겉모습을 보고 노인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왜 벌써부터···?’

노인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공관의 인원을 제외하고 이곳에서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제공권에 대한 제약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법률적으로 혹은 능력적으로, 일반적인 천외천인들은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의 신분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공관의 관리.’

게다가 하급 관리는 아닌 듯했다. 계급이 높아 보였다. 노인이 쓰고 있는 은색 왕관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심상치 않은 기운 탓이었다.

‘강한 상대다.’

노인을 살폈다. 뒷골이 선득했다. 숱한 경험으로 단련된 오감의 본능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다. 어디서 이런 놈이 갑자기 튀어나온 거지?

조심한다고 사리 나오듯 사렸는데 벌써부터 들켰나?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노인이 지면에 착지했다.

“마렐퀴로부터 처음 보고를 들었을 때도 반신반의했는데 확실히 이상하군.”

노인이 말했다.

“이상해.”

그는 이상한 사람처럼 굴었다. 양치질을 안 하는 건가? 이 상한 소리 좀 그만해라.

“뭐가 그렇게 이상하지?”

“너는 하계에서 온 인간이다. 확실히.”

“그래서?”

“하계의 인간이 너처럼 강해지는 건 불가능해.”

나는 인식표를 보이며 거짓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굳이 왜 그 점을 지적하는 거지? 지금의 상황에서 신분에 대한 진위 따윈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자네의 정체가 궁금하다네.”

“내 정체? 그게 중요한가?”

“내게는 중요한 문제일세. 대답에 따라서 자네를 죽여야 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기가 막혔다.

“나를 죽인다고?”

“그래.”

“당신이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해?”

기운을 숨기는 낌새는 전혀 없다. 노인이 강하긴 했지만 나보다 강한 건 아니었다. 이건 확실히 장담할 수 있었다. 나는 시조 드래곤의 기운을 얻은 뒤로, 마력의 파장을 읽을 수 있게 됐고 상대의 전투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눈앞의 노인은 내 적수가 아니다.

노인이 생각 끝에 말했다.

“확실히 자네를 죽인다는 보장은 못 하겠군. 직접 보니 말이 안 되게 강해. 하계의 존재가 어떻게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는 거지? 수인 족도 아닌 인간이 이 정도로 강해질 수 있다니···. 솔직히 놀라워.”

“칭찬해주려고 온 거면 고맙게 받을 테니까 이만 사라져주세요.”

나는 최대한 공손히 말했다. 괜히 긁어서 부스럼 일으킬 필요는 없지. 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저 여자는 확실히 죽일 수 있다네. 장담할 수 있지.”

그가 휴지를 가리키며 협박했다. 이거 미친놈인가.

“결국 싸우자고?”

“아니, 나는 자네와 싸우러 이곳에 온 게 아냐. 자네가 천외천인을 몇 명 죽였지만 난 이해할 수 있어.”

“도돌이표냐?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게 되는 것 같은데. 싸우러 온 게 아니면 대체 뭐야?”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대화할 필요는 없다. 후딱 치우고 끝내자. 선빵필승을 생각하고 손끝에 내력을 모으는데 노인이 말했다.

“자네의 뒷조사를 했어. 자네는 지구에서 왔더군.”

폭탄이 떨어졌다. 그냥 폭탄도 아니고 원자 핵폭탄이다.

“그, 그걸 어떻게···?”

내 얼굴이 뒤 닦은 휴지처럼 구겨졌다. 지금까지 내 출신성분에 대해서 말한 적은 결코 없었다. 항상 들키지 않게 조심해서 행동했다. 수가 틀리거나 잘못되면 지구가 날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외천의 기술력을 얕보지 말게. 시간이 충분하다면 알아내지 못할 것도 없지. 자네의 행적을 밟았다네. 자네처럼 그런 특이한 마력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용건이 뭐지?”

긴장이 확 솟구쳤다. 손끝에 모았던 내력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본인의 이름은 하드버. 천외천의 관리로 태경직을 맡고 있다네.”

“태경직?”

이름이 요상하다.

“고위급 관리라고 생각하면 편해.”

그가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다른 직함으로는 연합의 수뇌부를 맡고 있다네.”

“연합의 수뇌부?”

“해방 연합.”

그는 단어 하나를 툭 내뱉고 나를 뜯어보듯이 쳐다봤다. 꿀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눈빛이 따끔따끔 매섭다. 입을 닫고 계속 쳐다보니 내 얼굴에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았다.

“해방 연합이 뭐지?”

내 물음에 하드버의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졌다.

“과연 아니었군.”

“아니라고?”

뭐가 아니라는 거지. 이거 미친놈인가.

“먼저 사과부터 하겠네. 자네를 시험했다네. 쓸데없는 대화를 길게 이어간 것은 그런 이유지. 나는 상대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어. 자네는 확실히 하계에서 올라온 인물이군. 천외천과 아무 연고도 없는···.”

“무슨 개소리야?”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인다.

“간단히 설명하지. 나는··· 아니, 해방 연합은 자네와 같은 피해자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용무는 알겠다.

“피해자를 없앤다니? 암살 집단이냐?”

“내가 잘못 표현했군. 그런 게 아니네. 자네 세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악수를 하며 말했다.

“인권 보호 단체 같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지.”

“인권 보호 단체?”

계속 요상한 소리를 한다. 진짜 미친놈인가?

“천외천의 많은 사람들이 일방적인 파괴를 하고 있지. 수많은 차원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삼고 있다네. 오직 하나,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그가 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마의 주름처럼 세월의 풍상이 느껴지는 눈빛이다.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불쌍하게도 정신이 조금 돌은 모양이다.

“해방연합은 거기에 반발하는 세력이지. 우리는 침략을 거부하고 식민지를 해방시키는데 노력하고 있다네.”

그 순간 나는 이해했다.

“반군 같은 거군.”

“그래. 하지만 우리는 힘이 약해. 황제에 대항할 수 없어. 그래서 전면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조용히 숨어서 행동하고 있지.”

“나를 찾아온 이유는 이해관계가 일치해서인가?”

“말이 통하는군.”

“도와달라고?”

“그래.”

뻔뻔한 노인이다.

“대뜸 찾아와서 도와달라니···.”

함정일까?

나는 하드버의 눈을 쳐다봤다. 변함없이 진중한 눈이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찜찜하다. 하드버가 말했다.

“대신 지구를 해방시켜 주지.”

폭탄이 또 떨어졌다. 이번에는 수소 핵폭탄이다. 내 눈이 저절로 치켜 떠졌다.

“지구를 해방시켜 준다고?”

“그래.”

황당했다.

“정말로?”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사실을 말하자면··· 그래, 지구는 이미 해방됐다네. 벌써 손을 써놨지.”

“지구가···, 지구가 이미 해방됐다고?”

폭탄이 연속해서 떨어졌다. 이번에는 중성자 핵폭탄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껌뻑였다.

“자네를 만나기 전, 자네의 출신을 파악하자마자 이미 처리를 끝냈네.”

“왜 그런 짓을···? 당신한테는 이득이 없을 텐데···?”

그가 웃었다.

“혼자서 얻기 힘든 건 다른 사람과 협력해서 얻어야 하네. 신뢰야말로 혼자서 얻기 힘든 걸 쉽게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지.”

그가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나는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 이익을 원하네. 그래서 자네에게 먼저 신뢰를 건넨 걸세.”

기가 찼다. 내가 지금까지 고생했던 모든 일들이 보잘 것 없이 느껴질 만큼 단순하게 문제가 해결돼 버렸다. 이럴 수가 있나?

“당신 말을 어떻게 믿지?”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지구로 가는 포탈을 열어주지.”

오감을 확장하고, 마력의 파장을 읽었다. 분명 거짓말이 아니다. 그래서 더 기가 찼다.

“이렇게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였다니···.”

“공관의 태경직은 낮은 직책이 아닐세. 자네 세계의 표현대로 설명하자면 최소한 장관급이야. 태경 정도의 직책에겐 하위 차원의 침략에 대한 권한을 수정할 수 있는 힘이 있지. 어려운 일이 아닐세.”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간단하게···.”

“지구처럼 별 볼 일 없는 행성은 더 쉽지. 점심 메뉴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 쉬워. 내 말 한마디면 침략이 취소된다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그 대가로 내가 뭘 해주면 되지?”

“천외천인을 한 명 죽여주게. 물론 일반적인 천외천인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천외천이 아니라면?”

“하계 차원의 침략을 주장하는 구심점 중에 하나일세. 그가 죽으면 황제의 세력이 와해될 걸세. 그럼 황제는 완벽하게 고립되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무조건 오케이다. 다만 거슬리는 게 있었다.

“지구를 해방시키는 게 단순한 문제였다고 했지?”

“그렇다네.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문제였지.”

“그럼 부탁 하나만 더 하자.”

하드버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부탁이지?”

“그 전에 잠깐 할 말이 있어.”

“말하게.”

“내가 뒤통수 맞는데 민감해서 말이야.”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말했다.

“내 부탁이 선불이야. 가능한가?”

* * * * * *

황당할 정도로 쉽게 천외천에 오게 된 목적을 달성했다. 침략세력으로부터 지구를 해방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할 게 남았다. 구슬들(시조 드래곤들)이 말했던 일을 해야 한다.

블루 드래곤의 시조(하늘색 구슬)가 말하길 레드 드래곤의 시조를 찾아가라고 말했다. 누린 게 있고 받은 게 있으니 할 건 해야 한다.

“여긴 우리 연합 건물의 지하야.”

하드버가 말했다.

“슬라임으로 가려져 있는 게 연합의 건물이었나?”

“황제는 항상 깨어 있어. 낮을 읽고 밤을 듣지. 천외천에서 그의 눈과 귀를 피하려면 특수한 지역에서 거주해야 해.”

“이곳이 특수한 지역이라는 거냐?”

“그래. 아주 신비한 곳이지.”

이해가 된다.

“입구의 슬라임이 괜히 덩치가 큰 게 아니었군.”

“그건 구슬의 부작용을 받은 놈들이야. 힘에 삼켜져서 의지를 잃은 불쌍한 존재들이지.”

“불쌍한 놈들을 멋대로 문지기로 사용하면서 그런 말을 해?”

“가만히 방치 했으면 진즉에 소멸했을 걸세. 말하자면 공존이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말한다. 이거 순 나쁜 놈이잖아. 날 찾아온 의도가 의심스러워진다.

“이곳의 지하를 확인하고 지구가 무사한지도 확인해야겠어.”

“좋을 대로 하게. 급할 건 없으니까. 모든 건 때가 정해져 있는 법이니 문제만 없으면 상관없지.”

우리는 연합의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 계속 걸었다. 경비를 서고 있는 천외천인들이 제지할 때마다 하드버가 나섰다. 일사천리였다. 막힘없이 술술 풀렸다.

고속도로처럼 잘 닦인 복도를 지나서 계단을 타고 지하로 계속 내려갔다. 비포장 도로처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적인 풍경이 나왔다.

기묘한 문은 그곳에 있었다.

암석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붙은 돌문을 보고 내가 말했다.

“여기군.”

기묘한 마력의 파장이 문 너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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