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109화 (109/127)

# 109

“하, 무슨 부탁인가 했더니 봉인된 지역을 가겠다는 거였나?”

하드버가 말했다.

“봉인된 지역?”

“그래. 우리가 이곳에 연합의 근거지를 만들 때 아주 요상하고 불길한 기운이 있었지. 그게 바로 이 문이야. 근거지의 지하시설을 넓힌다고 이 문을 부수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지만 결국 해결하지 못했네. 아마도 태초의 존재들이 남긴 유적이겠지.”

그는 문의 기묘한 문장들을 가리켰다. 문에는 부적처럼 요상한 글자들이 쓰여져 있었다.

“그런데 자네는 대체 뭐지? 어떻게 여기에 유적이 있는 걸 알고, 어떻게 여기로 온 거지? 자네는 하계의 존재인데···.”

내가 말을 잘랐다.

“그건 말해줄 이유가 없지.”

“과연 그렇군. 그건 약속에 없었지.”

하드버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도 이 문은 말이야. 겉으로 보기엔 돌문이지만 평범한 돌문이 아니야. 우리도 정체를 모르겠어. 세상의 어떤 광석보다 단단하고 강했거든.”

“세상의 어떤 광석보다 단단했다고?”

“그래. 어떤 금속을 써도 흠집조차 나지 않고 가루조차 나오지 않았다네. 그래서 천외천의 기술력으로도 어떻게 못 했어.”

하드버가 문을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그런데 이 문을 넘어가겠다는 건가?”

“그래.”

내 대답에 하드버가 피식피식 웃었다.

“어떻게? 자네를 무시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천외천의 기술력으로도 어떻게 못 한 이 문을 도대체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거지?”

목소리에 비웃음이 가득하다. 이거 진짜 재수 없는 노인이네.

“문을 부술 생각인가?”

“글쎄···.”

부술 생각은 없다. 나는 문을 보자마자 해결책을 느꼈다.

그래, 확실히 말하겠다. 떠올린 게 아니라 온몸으로 느꼈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익숙하다. 아니, 익숙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친숙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하군.”

하드버가 팔짱을 낀 채 한발 물러섰다.

나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나섰다.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낫다.

탁.

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마력의 파장을 읽었다.

‘당연히 이 문은 광석으로 만들어진 문이 아니지.’

처음 봤을 때부터 곧바로 느꼈다. 느끼고 말았다.

기운.

‘그냥 기운도 아니다.’

내 몸 안에서 휘몰아치는 기운과 똑같은 느낌의 기운. 이 기묘한 문은 광석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기운을 응축시켜서 만들었다. 보자마자 알겠다. 상상도 못 할 정도의 막대한 내력을 압축, 응축시켜서 만든 문이다.

‘그러니까 부서지지도 않고 가루조차도 나지 않았겠지.’

그래서 내게는 무엇보다 간단했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문을 만지고 있는 손바닥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대형 슬라임의 기운을 흡수할 때처럼 내력을 이끌어서 문의 응축된 기운을 건드렸다.

빠드득.

오래지 않아 문에 균열이 났다. 하드버가 놀라서 소리쳤다.

“어, 어!? 어떻게!? 이, 이럴 수가···!?”

거미줄처럼 문 전체에 균열이 퍼졌다. 문은 이내 부서져 버렸다.

꽈드득 빠드득.

부서진 문들은 덩어리로, 알맹이로 단계적으로 부서져 내렸다. 종국엔 모래알처럼 작아졌다. 물론 바닥에 흘러내리지 않고 내 손을 중심으로 문의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자, 자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이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하드버가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나는 기운을 흡수하는 것에 집중했다.

“으음.”

내 손을 중심으로 블랙홀이 만들어졌다. 싱크대에 물이 내려갈 때 소용돌이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내 손바닥을 중심으로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슈우우우.

문의 형태로 부유하고 있는 기운이 내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무지막지한 기운에 내 몸 전체에서 땀방울이 소나기처럼 흘러내렸다.

‘무식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군.’

한참의 씨름 끝에 겨우 기운의 흡수를 끝냈다. 숨을 몰아쉬고 있으니 하드버가 경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도대체···. 진짜로 자네는 정체가 뭐지···? 한낱 인간이 맞는가? 하계의 인간이···?”

나는 그를 외면하고 문 너머를 쳐다봤다.

‘이 끝에 레드 드래곤들의 시조가 있겠군.’

지금까지의 경험대로라면 레드 드래곤들의 시조 또한 구슬 형태일 것이다. 아마도 불그스름한 빛깔의 구슬이겠지.

생각을 정리하며 흡수한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는데 휴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주인 괜찮냐?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다.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니냐?”

커다란 눈망울로 쳐다보는데 꼭 강아지 같다. 귀여운 짜식.

“나는 이상 없이 멀쩡해.”

“전혀 멀쩡해 보이지 않는다. 많이 아파보인다.”

한 번에 기운을 너무 많이 흡수했으니까 그렇지.

“아냐, 괜찮아. 그러니까 바로 출발하자구.”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들부들 부드러웠다. 꼭 강아지 털 같네.

“후딱 끝내고 지구로 돌아가자.”

나는 부서진 문 너머로 걸음을 내딛었다.

* * * * * *

태초에 빈 공간이 있었다. 세상 무엇보다 넓은 공간. 그 공간에는 먼지보다 작은 점이 있었다. 모래 알갱이보다 작은, 아주 작은 점이었다.

점은 억겁의 세월 동안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무한의 시간이 흘렀다.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기나긴 시간이었다. 점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떠한 것도 아니었기에 어떠한 것도 될 수 있었고 모든 것이 아니었기에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점은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났다. 점은 더 커졌다. 덩치가 더 커져서 오래지 않아 별이 됐다. 그 상태로 또 무한의 시간이 흘렀다.

그 뒤로 별은 행성이 됐고, 은하가 됐고, 우주가 됐고, 차원이 됐다. 매시기마다 무한의 시간이 흘렀다.

하나였던 차원은 두 개가 됐고, 두 개였던 차원은 세 개가 됐고, 세 개는 네 개가 됐고 네 개는 다섯 개가 됐다. 무한의 시간 동안 차원은 무한히 늘어났다.

태초의 신은 만족했다. 동시에 실증이 났다. 문제가 없었기에 해결할 필요가 없었고, 만족을 했기에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자신이 있을 필요는 없었다. 더 이상 할 게 없다. 그래서 태초의 신은 떠났다. 모든 가능성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오래도 기다렸군.”

황제는 감았던 눈을 떴다. 태초에 있었던 모든 일들의 회상하는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존재로 각성한 후 ‘과거’를 먹어치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랜 시간이었다.”

그는 손바닥에 쥐고 있는 검은 구슬을 쳐다봤다. 빛 한 점 없는 완벽한 어둠의 구체였다.

덜덜덜.

구슬은 저 혼자서 몸을 떨었다. 구슬의 정체는 황제 자신이 태초의 존재로 각성하고 얼마 뒤 생겨난 다른 존재였다.

세계의 두 번째 자의식.

황제의 동생이었다.

“네가 남긴 건 모두 틀렸다.”

동생은 황제와 달랐다. 황제가 황제로 불리기 훨씬 이전부터. 처음부터 자신과 달랐다. 그래서 황제는 동생을 죽였다. 과거를 먹고 미래를 죽였다.

동생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방해했다. 그리고 자신을 저주했다. 세 개의 구슬을 만들고 예언을 내렸다.

황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건 변하기 마련이야.”

황제가 눈짓했다. 시종이 탁자 위의 포도주 병을 땄다. 글라스에 포도주를 따르고 황제에게 건넸다.

“세계의 고혈이라는 이 최고의 포도주도 병을 따고 나면 맛이 바뀌지. 시간이 오래될수록. 어쩌면 얼마 뒤엔 상할지도 몰라.”

황제는 포도주를 마셨다. 달콤했다. 아니, 첫맛은 달콤했지만 끝맛은 썼다. 그래서 더 각별했다. 달기만 했다면 결코 천외천 최고의 와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네가 미래를 보고 예언을 내린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동생이여.”

황제는 손에 쥔 글라스를 소멸시켰다.

“네 예언은 바뀌었다. 네가 본 미래는 바뀌었다.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예언은 틀렸어.”

그리고 웃었다. 미친 사람처럼.

“네 힘은 모두 내 것이 될 것이다. 동생이여.”

* * * * * * *

“윽!”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 춥다.

“왜 그래 주인?”

휴지가 달려와서 안부를 물었다.

“아니, 갑자기 소름이 돋아서.”

“감기 걸린 거 아냐?”

“감기라니···.”

“아까부터 얼굴빛이 창백해. 거무죽죽해서 똥이라도 씹은 표정이야.”

진지한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니 기가 막힌다.

“너는 입으로 똥을 싸고 있구나.”

나는 웃었다. 우스웠다. 손짓 하나로 행성을 파괴할 능력을 가진 내가 감기라니.

“그냥 기분 탓이야. 기분 탓. 감기일 리 없지.”

“정말 괜찮아?”

“괜찮대두.”

휴지가 내 이마에 얼굴을 댔다.

“열은 없는데···.”

이럴 땐 생각 없이 과감하다. 나는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기분 탓이니까 얼굴 치우고 신경 꺼.”

“알겠어.”

나는 휴지를 밀치고 앞장섰다. 이제 관문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마력을 읽어보면 이제 여기가 마지막이다.’

최후의 관문.

“이곳만 넘어서면 끝이야.”

활화산을 타고, 용암의 파도를 넘고, 불의 정령들과 싸웠다. 지겹게도 많이 봤던 석상형 몬스터들과도 또 전투를 끝냈다.

이제 마지막이다.

“정말 정체를 알 수 없군. 하계의 인간이 어떻게 이런 곳을 아는 거지? 천외천의 기술력을 넘어선 돌문을 부수지 않나. 나아가 유적을 돌파하질 않나···.”

하드버가 산통을 깼다.

“호기심이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이야.”

“끙···. 하지만···.”

“거거, 또 쓸데없이. 조용히 하고 이제 마지막 관문을 열어보자고.”

최후의 관문은 일종의 보너스였나보다. 별다른 시련 없이 밀기만 했는데 문이 쉽게 열렸다.

그 순간 빛이 일었다.

* * * * * *

눈앞에 피처럼 붉은 드래곤이 있었다. 태산처럼 거대해서 고개를 치켜들어야 겨우 배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블루의 시조를 만났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또 시간정지냐?”

휴지와 하드버가 멈춰있고 나만 움직일 수 있었다.

붉은 드래곤은 이내 내 손바닥보다 작아져서 불그스름한 구슬이 됐다.

“네가 레드 드래곤들의 시조로군.”

내가 가리키자 구슬이 대답했다.

-그래. 너는 예언의 존재로구나.

그는 기다리다가 지친 사람처럼 말했다.

-오래 기다렸어. 확신이 들었던 모든 사실들의 확신이 지워질 만···큼. 그대가 오기 전, 나는 몇 번이고 내 존재의 이유를 시험했다네.

“블루의 시조가 너를 만나라고 했어.”

-오. 그래. 예언대로 되고 있구나. 미래는 바뀌지 않았구나.

“그놈의 예언, 예언···.”

이제 귀가 따가울 정도다.

“내가 뭘 하면 되지?”

-나를 흡수해라. 내 힘을 흡수해라. 네 것으로 만들어라.

“대본에 적힌 연극 말투처럼 말하네.”

되도록 빨리 끝내고 싶다. 나는 놈을 흡수하기 위해 마력의 파장을 읽었다.

‘역시···.’

입구의 슬라임, 관문을 통과하면서 흡수했던 수많은 기운들과 똑같았다. 많은 것들이 레드의 시조에게 영향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삶에 대한 미련은 없는 건가?”

-내 존재 이유가 이것이었다. 네게 힘을 주는 것.

“그것 참 기구한 운명이야.”

나는 놈의 기운을 흡수하려다가 문득 고대의 유산이 떠올랐다.

이제는 휴지가 쥐고 있는 영문 모를 지팡이. 내가 쥐기만 하면 내 힘을 흡수하는 지팡이.

블루의 시조는 그것을 고대의 유산이라고 했었다.

“잠깐. 너 혹시 이게 뭔지 알아?”

나는 고대의 유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고대의 유산을 말하는 건가?

“그래. 이게 대체 뭐지?”

레드가 웃음 섞인 소리로 대답했다.

-고대의 유산이다.

“결국 너도 모른다는 거지?”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블루의 시조와 같은 소리를 한다. 영문 모를 개소리.

“그래. 정보 고맙다.”

나는 놈의 마력을 읽었고 내력을 집중했고 놈의 기운을 흡수했다. 놈의 기운을 모두 흡수하고 나니 몸이 터질 것 같다.

‘기운을 갈무리해야 해.’

나는 내력에 신경을 쏟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멀거니 서 있는 하드버와 휴지를 두고 기운을 갈무리 하는데 집중했다.

다행히 어려움은 없었다. 레드의 시조가 가진 기운도 이상 없이 내 내력에 융합됐다. 다만 문제는.

“주인. 피부색이 이상하다.”

“어? 어어···?”

나는 떠듬떠듬 놀랄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