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110화 (110/127)

# 110

내 피부색이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얼굴은? 내 얼굴도 바뀌었어?”

다급히 물어보니 휴지가 물로 만든 거울을 소환했다. 물을 거울처럼 비춰보니 다행히 외모는 변한 게 없었다. 단지 색깔이 바뀌었을 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하드버가 말했다.

“실례하지만 나는 빨리 다음 약속을 이행하고 싶네. 지구의 침략이 정말로 끝났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와 처음 말을 나눌 때 모든 부탁을 선불로 받기로 약속했었다.

“그렇긴 하지. 그런데 뭐가 그렇게 바쁘지?”

“일이 급한 건 아니지. 하지만 여긴 우리 시설의 지하야.”

하드버가 미간을 좁히며 바닥을 툭툭 때렸다.

“시간을 오래 끌수록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걸세. 내 명령을 어기고 다른 사람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르지. 나는 되도록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

“그렇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드버가 품에서 기계장치를 꺼냈다.

“축포는 고향에 가서 터뜨리게. 지금 당장 지구로 가는 포탈을 열어주지.”

그가 기계를 땅에 던지자 직사각형의 기계장치가 책처럼 펼쳐졌다. 그곳에서 아지랑이가 파도처럼 피어오르고 곧 그 위로 포탈이 생겨났다. 주변이 어두워서 유난히 푸른 포탈이 더 밝아 보였다.

“이제 들어가면 되나?”

“잠깐. 어디로 가면 되지?”

“무슨 소리지?”

하드버가 내게 손을 건넸다. 악수를 하자는 건가.

“저 기계는 내 전용이야. 기억 입력으로 좌표를 알아내야 해.”

이해는 안 되지만 손을 잡아야 하는 건 알겠다.

“가야 할 곳을 떠올려보게.”

“지구.”

“입으로는 말 안 해도 돼. 지구의 어딘가?”

“한국. 아니, 한국이 아니라···.”

하드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잠자코 내가 도착할 곳을 떠올렸다. 일단 침공이 끝났다면 마왕의 탑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려면 그 근처가 좋을 것이다.

“좋아. 좌표는 이상 없이 입력됐네.”

포탈이 하드버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꼭 살아 숨 쉬는 것 같네.

“이제 가봐도 되지?”

“잠깐.”

하드버가 또 나를 멈춰 세웠다.

“또 뭐야?”

“이걸 받게.”

“이건···?”

하드버가 건넨 것은 반지였다. 아무 이니셜도, 장식도 없는 밋밋한 은반지였다.

“평범한 반지가 아니네. 일종의 차원도약 송수신기지.”

“차원도약 송수신기?”

“자네 세계의 표현대로라면 차원을 넘어서는 휴대폰이라고 보면 되네. 모든 과실이 제철이 있는 것처럼. 모든 일에는 때가 있어. 때가 되면 자네를 부르겠네.”

새삼 하드버의 무한적인 신뢰에 경외감이 들었다.

“나를 배려해주는 건가?”

“글쎄. 그건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하게.”

그리고 껄껄껄 웃는다. 역시 나이를 헛먹은 노인네가 아니다.

사람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군.

나는 작별을 고하고 휴지와 함께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 * * * * *

떠날 때는 다시 돌아오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구가 바뀌어 있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많이 변했군.”

다행히 하드버의 포탈이 제대로 작동한 모양이다.

“끔찍할 정도로 탁한 공기. 부족한 대기 중의 마력. 지구에 제대로 도착했어.”

내 말에 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마비행술로 하늘을 날아서 마왕의 탑부터 찾아 나섰다. 제대로 도착했다면 아마도 이 근처에 흔적이 있을 것이다.

“저기군.”

오래지 않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추위와 살얼음의 길. 대륙의 중앙에 우뚝 솟은 마왕의 탑, 바벨 탑.

“확실히 탑이 사라졌어.”

탑이 있던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남아있는 것은 검게 그을린 탑의 터뿐이었다.

“정말로 지구가 안전해진 걸까, 주인?”

“일단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네.”

마력의 파장으로 주변을 읽어보았다. 탑의 터가 있는 주변으로부터 몬스터는 여전히 존재했다. 고블린, 오크, 오거, 트롤, 그리고 각종 변종 몬스터들. 던전도 몇 개나 있었다. 아마도 이미 뿌린 것은 제대로 수거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일을 대충대충 처리했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큼 한 셈이다.

“그래도 수도꼭지를 잠근 셈이니 이제 물이 흘러나올 일은 없겠지.”

나는 몸을 돌렸다. 이제 가족들을 만날 차례다. 가장 먼저 나는 휴지를 데리고 백두산 인근으로 갔다. 근처에 있는 서리 엘프 족의 마을을 염탐하고 그들이 여전히 잘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나와 하룻밤을 보냈던 기쉬네도 잘 살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 아기가 안겨져 있어서 순간 찔끔했는데 다행히 귀가 뾰족했다. 인간과 엘프가 교배를 하면 그 아이는 귀가 뾰족하지 않다. 뾰족한 귀가 열성인자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 아이는 아닌 모양이군.’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버지 노릇을 할 필요는 없어졌다. 나는 휴지를 안고 수원시로 향해 전속력으로 날았다. 가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길드는 무사한지 몹시 궁금했다.

* * * * * *

지구를 떠나기 전 수원을 내 길드(실버스타)의 거점으로 만들어놨었다. 그리고 길드를 여동생 주아랑과 박은애에게 맡겼었다.

그래서 변화가 궁금했다. 떠나기 전에는 길드 건물을 중심으로 인프라가 구축되는 중이었다. 지금은 얼마나 변화했을까.

“엄청 발전시켜 놓았겠지.”

“무슨 소리냐, 주인?”

“아니. 아무것도 아냐.”

천마비행술로 백두산에서 쭉 날아서 내려왔다. 서울 인근에서부터는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서 땅으로 내려와 걷거나 낮게 날았다.

수원시에 도착하고 길드 건물이 있던 곳으로 날았다. 도착한 후 주변을 둘러보니 군인들과 경찰들이 보였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어, 이쪽으로 오시면 안 됩니다.”

얼굴이 유난히 큰 소위가 나를 제지했다. 깜짝이야.

“무슨 일 있나요?”

“곧 터질 겁니다.”

“터져요? 뭐가 터져요?”

호기심을 품고 쳐다보는데 뒤에 있는 대위가 소리쳤다.

“야! 거기 사람 뭐야! 언제 튀어 나왔어! 제대로 막아! 이제 곧 던전이 터진단 말이다!”

나는 황당해서 굳듯이 섰다.

던전이 터져?

‘설마···.’

침략이 모두 백지화 되었음에도 흔적들은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문제는···.

“저기는 실버스타 길드 건물 아닙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서 던전이 생성된 지역을 가리켰다. 길드 건물 앞에 떡하니 남산만한 포탈이 위치해 있었다. 왜 저기에 던전이 있는 거지?

“예. 맞습니다. 예전에는 실버스타 길드의 본사 건물이었죠.”

“예전에는···?”

소위의 대답이 요상하다.

“예전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때 대위가 다시 소리쳤다.

“야! 대갈빡! 빨리 제대로 안 막을래? 헌터들은 또 왜 이렇게 안 와? 부른 거 맞아?”

소위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5년 전 말입니다. 선생님! 헌터를 제외하고 일반인은 던전 근처의 출입이 금지돼 있습니다. 저쪽 안전선 너머로 물러가세요!”

5년 전? 5년이나 흘렀다고?

“어어··· 이거 시공간이 이렇게 차이 나는 거였나?”

천외천으로 넘어갈 때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다. 그런데 5년이나 시간 차이가 났다니.

“아오! 헌터들은 또 왜 이렇게 안 와!”

대위가 신경질을 내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개새끼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돈만 받아 처먹고 일하지는 않고!”

그때 던전이 생성된 포탈이 활화산처럼 붉은 빛을 훅 뿜어냈다. 소위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선생님! 제발! 제발 빨리 안전선 안쪽으로 대피해주세요!”

주변을 둘러봤다. 확실히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나는 휴지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하늘을 날았다.

“어, 어, 어···”

소위가 떠듬떠듬 놀랐다.

“허, 헌터 십니까···?”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은 헌터밖에 없다. 게다가 하늘을 날 수 있는 헌터는 흔하지 않다. 그 때문인지 소위의 목소리엔 경외감이 잔뜩 실려 있었다.

“몬스터는 내가 처리할게요.”

나는 대답 직후 포탈 앞으로 가뿐히 날아갔다. 피처럼 붉은 포탈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롭다. 정해진 기간 내에 꼭 클리어해야 하는 레이드형 던전이 남아있는 건 의외였지만.

‘왜 클리어를 안 하고 남겨둔 거지?’

레이드형 던전은 1회 한정 던전이다. 클리어를 하면 던전 자체가 사라진다. 길드 건물 앞에 생겨났다고 해서 길드 본사를 옮길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왜 길드 본사를 옮겼을까? 더 좋은 곳으로 갔나? 다른 이유가 있나?’

의문을 삼키고 있는데 대위가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헌터이신 건 알겠습니다만 여긴 위험합니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두 팔을 붕붕 휘저었다.

“곧 있으면 몬스터가 튀어나옵니다. 그냥 몬스터도 아니고 보스 몬스터입니다! 저기 저 폐건물보다 크기가 큰 거인이라구요!”

마치 뭐가 나올지 아는 사람처럼 말한다.

“포털의 비석에 쓰인 언어를 읽을 수 있어요?”

“무슨 소립니까?”

“엥? 그럼 어떻게 보스 몬스터의 외형을 아는 거지?”

몬스터가 출현하기 전까진 레이드형 던전은 랜덤박스다. 뭐가 나올지 모른다. 내 물음에 대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농담이 나오십니까? 제아무리 대단한 헌터라도 보스몬스터는 혼자선 위험하다고요.”

그때 포탈이 크게 일렁였다. 끓어 넘치는 냄비처럼 부글부글 넘쳐흘렀고 이윽고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나는 길게 끌기 싫어서 곧바로 주먹을 날렸고 중국식 불상을 닮은 거인 몬스터를 부쉈다. 몬스터는 내부에서부터 으깨져서 다진 모래처럼 변했다.

“어, 어, 어··· 뭐야···.”

대위의 표정이 변했다.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내 표정도 요상하게 변했다.

“뭐야? 보스 몬스터를 죽였는데 왜 던전이 안 사라져?”

* * * * * *

군인들로부터 실버스타 길드의 소재를 파악했다. 레토나를 타고 그들의 안내를 받아서 움직이는데 요상한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요즘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습니다. 선생님.”

“레이드형 던전을 클리어해도 던전이 사라지지 않고 다음 기간 때 또 보스몬스터가 튀어나온다는 거죠?”

“예, 예. 맞습니다.”

그래서 던전에서 어떤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진즉 알고 있는 거였군.

‘침략이 백지화 됐음에도 이런 흔적조차 지우지 못 하는 건가?’

어쩌면 잘 된 것일 수도 있다. 갑자기 던전, 아이템, 능력 이런 게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오히려 엄청난 혼란이 찾아왔을 수도 있다. 현상유지라니 나쁜 건 아닌 것이다.

소위가 말했다.

“세상이 변했어요. 정부 발표로는 베이징 쪽의 탑이 부서지고 나서부터 그렇게 됐다는데. 사실을 알 수는 없죠. 세간에는 그 탑이 모든 일의 원인이라고 했는데···.”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탑을 누가 흔적도 없이 부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차는 계속 움직였다. 변화한 수원의 풍경을 보면서 감상에 젖어있는데 오래지 않아 차가 멈춰 섰다.

“다 왔습니다. 선생님.”

“여기가 실버스타 길드···?”

“저쪽의 커다란 건물입니다. 수원에서 제일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죠.”

건물의 외관부터 으리으리하다. 건물 외벽 하나하나에 돈을 억대로 쏟아부은 것 같다.

소위가 말했다.

“듣기로는 건물 외벽 전체를 벙커처럼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벙커처럼요?”

“미사일도 막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돈 잘 벌리나 보네.”

그러고 보니 박은애와 주아랑은 장사수완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건물 외벽을 벙커처럼 지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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