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112화 (112/127)

# 112

노인··· 아니, 서경춘이 말했다.

“그건 합당한 대가였습니다.”

“합당한 대가?”

내 얼굴이 구겨졌다.

“그렇습니다. 여긴 중국 땅이고, 다른 민족들은 침략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은성님께서는 안방에 침입한 도둑을 그냥 두십니까?”

“그래서 죽였다고?”

“그렇습니다.”

“민간인들도?”

“예.”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여긴 백두산인데?”

쳐맞는 말.

“백두산도 중국 겁니다.”

“이봐. 어정쩡한 백두산 인근 지역이 아니야. 여긴 완전 한반도 쪽이야.”

“한반도 이북지역은 본래 중국 땅입니다.”

“어이가 없군. 북한도 중국 땅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렇습니다.”

서경춘의 말엔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우와. 이거 완전 돌은 놈 아냐?

“저희는 안방에 침입한 도둑놈들을 죽였을 뿐입니다. 정당방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들의 잘못은 집을 지킨 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잘못이 없다고?”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원인은 한국 쪽에 있으니까요.”

뻔뻔함이 지나치니 말문이 턱 막힌다. 나는 생각했다. 이 새끼들 어떻게 하지?

‘···전부 죽일까?’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 한 번쯤은 살인을 해본 이들 같았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밟고 살아남은 게 아니라면 이렇게 살기등등할 수 없다.

내 무공수준을 발톱 정도 읽은 서경춘과 달리 다른 헌터들은 무기를 쥐고 당장이라도 공격을 할 것만 같았다. 살인을 쉽게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행동할 수 없다.

‘놔두면 더 큰 문제가 일어날까?’

천마신공을 배우고부터 사람의 목숨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냉혈한 성격은 시조 드래곤들의 기운을 흡수하고 다시 바뀌었다.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다. 무고한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다. 다만 무고하지 않다면, 앞으로 무고하지 않을 예정이라면 죽인다. 나는 생각 끝에 말했다.

“내가 쉬운 해결책을 제시하지.”

“쉬운 해결책 말이십니까?”

“그래.”

“어떻게 말입니까?”

나는 손바닥을 짝 쳤다.

“본래 나는 합리적인 성격이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공평하게 처리하는 걸 좋아하지. 무의미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싫어하고, 무엇보다 시체가 많으면 처리하기 귀찮잖아.”

사실 약간의 수고스러움뿐이다. 내력을 발휘해서 단번에 가루로 만들어버리면 귀찮지도 않다.

“그, 그러면 어떻게?”

“음··· 어떻게 할까?”

“······.”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헌터들이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조용해졌군. 눈 감는 걸 잊다가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숨 쉬는 걸 잊었다가 뒤늦게 숨을 몰아쉬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직접적으로 사건에 가담한 사람들만 죽이겠어.”

“예?”

“직접 가담한 사람들만 죽이겠다고.”

내 대답에 서경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헌터들의 분위기도 얼어붙었다. 어어? 뭐지? 이 정도면 엄청 봐준 셈인데?

내 자비로운 판결이 이들의 마음에는 들지 않은 모양이다.

휴지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주인.”

진짜 심상치 않다. 나는 헌터들의 표정을 읽고 깨달았다.

“하. 과연 이거였군.”

“무슨 소리냐, 주인?”

“이 중에서 깨끗한 사람은 없다··· 이건가?”

확실했다. 전원이 가담한 사람들이다. 모두가 마을을 침략하고 약탈하고 살인을 저질렀다.

“모두가 민간인을 죽이고 헌터들을 죽였다 이건가?”

“그, 그건···.”

당황하는 모습들을 보니 재고할 필요가 없다.

“그럼 모두 다 죽여야지.”

더 이상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후두두둑.

내 손끝에서 내력의 구슬이 수십 발의 총알처럼 발사됐다. 탄지공에 맞은 사람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피도 튀지 않았고 비명도 없었다. 너무 빨라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쓰러지는 사람들이 할리우드 액션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 상대는 하나다! 공격해!”

모두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이 빠져 있는데 쇠를 긁는 듯한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중심으로 중국 헌터들이 내게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전력 차이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네.”

가장 먼저 네 명의 헌터가 동서남북 전 방향으로 칼을 찔러 들어왔다. 나는 내력을 기합으로 내뿜어서 투명한 방어막을 만들었다.

팅. 팅. 팅.

칼이 더 들어오지 못하고 방어막에 막히자 헌터들이 기겁했다.

“뭐, 뭐야!? 검기가 막혔어?”

“검기를 막는 호신강기라고!?”

호신강기 아닌데.

나는 공격에 대한 보답으로 내력이 실린 기합을 다시 내뿜었다. 그러자 방어막에 박혔던 칼이 고스란히 주인들에게 되돌아갔다.

“으악!”

“크악!”

“캬악!”

검기를 머금고 있던 칼이라서 그런지 그들의 몸이 종잇장처럼 쉽게 잘렸다. 비명소리가 아카펠라처럼 들렸다. 화음 좋구만.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다시 소리쳤다.

“단순한 술수다! 당황하지 마라! 놈은 하나야!”

웃긴 놈이네. 자기는 나서지 않고 끝까지 부하들을 희생시키겠다는 건가.

“어차피 다 죽일 테니 상관은 없지만.”

귀찮게 질질 끌 필요는 없다. 나는 손바닥에 내력을 모았다. 무형의 내력을 압축하고 압축해서 손바닥에 반원 형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동그랗게 모인 내력을 엿가락처럼 늘렸다. 여의봉이 늘어난 것처럼 새하얀 내공의 줄기가 순식간에 하늘에 닿을 것처럼 길어졌다.

“허, 헉!”

“거, 검강!”

“저런 거대한 검강은 처음이다!”

내 앞에 있던 헌터들이 소리쳤다.

“칼이 없으니 검강이랑은 조금 다르지.”

하지만 편의상 검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는 당황하는 그들 사이로 검강을 횡으로 휘둘렀다.

후욱!

황룡사지 8층 석탑처럼 거대한 검강이 몰아닥치자 중국 헌터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빗자루로 가을 낙엽을 쓸어 담는 것처럼 무차별하게 공격했다.

서걱! 서걱!

가을에 은행나무의 낙엽을 쓸면 구린내가 난다. 은행 열매에 있는 독 성분 때문이다.

검강으로 한 번 훑을 때마다 피가 솟구치고 머리가 날렸다. 코끝으로 더러운 냄새가 났다. 질 나쁜 사람을 죽일 때 구린내가 나는 건 단순히 기분 탓일까. 이유가 있는 걸까.

“새끼들 다음 생에선 좀 깨끗하게 다녀라.”

나는 검강을 계속 휘둘렀다.

후두둑.

휘두를 때마다 낙엽이 쓸리고 은행 알맹이가 휘날렸다. 몇 초 지났을 뿐인데 내 주변이 피바다가 됐다. 눈대중으로 대충 세보니 한 번 휘두를 때마다 10명 정도 죽인 것 같았다.

“거의 다 정리됐네.”

예정된 결말이었다. 나는 휴지를 시켜서 물의 정령으로 몸을 씻고 내력으로 몸을 말렸다. 뻐근한 목을 풀고 있는데 쇠 긁는 목소리가 다시 소리쳤다.

“겁먹지 마라! 우린 대중국의 헌터들이야!”

살아남은 헌터들 중에 대장인 격의 놈이 아직 살아있는 모양이다.

“대장이란 놈이 끝까지 쥐새끼처럼 숨어 있군.”

내 말에 발끈했는지 놈이 튀어나왔다.

“멍청한 소리!”

예상외로 생긴 것도 평범하고 복장도 평범했다. 평소에 근검절약을 실천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겁이 많아서 정체를 가리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던가.

“뭐가 멍청한 소리지? 내가 틀린 말 했나?”

“사, 상대에 걸맞게 대우를 해줄 뿐이다. 상대가 병졸인데 대중국의 장군이 왜 나서서 대해야 하는 거냐?”

목소리에 떨림이 가득해서 설득력이 없다.

“쥐새끼 맞네.”

계급은 높아도 서경춘과 달리 무공 수위가 높지 않은 모양이다.

‘내 내력을 발톱 끝만큼도 읽지 못 하는 군.’

귀찮아진 나는 하품을 쩍 했다. 그리고 말했다.

“서경춘은 단순한 간판이고 네가 여기 총 관리자였군?”

“그, 그렇다.”

“흐음. 그래···. 마력을 읽어보니 근처에 다른 중국인 마을도 없고. ···마지막으로 유언은?”

내 물음에 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너, 너는 정말 영물이냐?”

“그게 유언이냐?”

나는 한심해져서 솔직하게 말했다.

“영물이겠냐?”

남은 헌터는 스무 명 남짓. 최후의 발악으로 칼, 창, 화살, 쇠사슬 따위가 엄습해왔지만 내게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귀찮아져서 탄지공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후두두두둑.

볼링공이 스핀 볼을 치고 박으며 모두 쓰러뜨리는 것처럼 내력의 구가 놈들 사이를 헤집으며 놈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스트라이크!”

“으, 으어어···.”

그리고 대장 옆에 있던 어벙해 보이는 한 녀석을 살려뒀다. 휴지가 말했다.

“주인. 쟤는 안 죽이냐?”

“한 녀석은 살려둬야지.”

“왜왜?”

“모두 다 죽이면 경고를 전할 수 없으니까.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할 순 없잖아?”

“아항.”

나는 살아남은 녀석에게 다가갔다. 녀석이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머릿수가 많을 때는 기세등등하더니 혼자 남게 되니 겁쟁이네.

“가서 네놈들 수뇌부에게 제대로 전해. 또 한국인 마을에 선전포고를 하면 찾아가서 모두 다 죽여버리겠다고.”

“으, 으어어어어···.”

“알겠냐?”

“어, 어, 어어···.”

설마 돌아버린 건 아니겠지?

다행히 아닌 모양이다. 놈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헐레벌떡 달아났다.

* * * * * *

양계초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비판했다. 공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을 살도록 기회가 오지 않을 줄 알았다. 짐꾼이었던 할아버지나, 고물 장사꾼이었던 아버지처럼 자신도 비루한 인생을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래를 읽는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위기가 고착화되기 전에 강해져야 함을 깨달았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가진 게 없었기에 두려울 것도 없었다. 살아서 비루한 삶을 연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는 그런 생각으로 던전을 다녔고 몬스터를 사냥했다. 만약 도중에 죽게 되더라도 잃을 건 없는 셈이다.

그의 무모한 행동력은 살아남은 중국인들 사이에 영웅담처럼 퍼져나갔고, 부풀려진 소문은 바람을 타고 전 대륙을 뒤흔들었다.

양계초가 어느 정도 강해진 뒤에는 그의 밑에 수많은 추종자들이 생겼다. 혼자는 두려워도 뭉치면 두렵지 않다. 그 슬로건 아래 살아남은 사람들이 계속 모였다.

표면적으로는 군대를 제외하곤 계급이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등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양계초는 추종자들에게 신격화되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신중하고 미래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서 그의 말대로 움직이면 손해를 보는 일이 없었다. 과정은 윤활유 없는 톱니바퀴처럼 삐그덕거렸지만 결과는 좋았던 것이다.

바벨의 탑이 사라진 후 양계초는 몬스터의 위협보다 자신과 같은 사람의 위협이 커질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한정된 자원을 선점하기 위해 온 정신과 노력을 쏟았다.

다른 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거나 살인을 하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과정은 문제가 있어도 결과는 좋을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그렇게 생각했다.

계속 성공하다 보니 미신을 생각하기도 했다. 세상이 바뀌고, 사람들이 모이고, 자신이 중국인들의 대표인 주석이 되자, 이 모든 비현실적인 일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는 거만해져 있었다.

최근 자신이 명령을 내렸던 소장 박춘만이 헐레벌떡 보고를 하러 왔을 때 양계초는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었다.

지난번 한국 마을에 실행한 도발이 잘 먹힌 건가?

그런데 보고를 듣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다.

“한국의 헌터···. 단 한 사람에게 마을 하나가 전멸했다고?”

“그, 그렇습니다.”

“몬스터도 아니고 단 한 사람에게···?”

“예. 그쪽에 있던 상등병이 확실히 그렇게 보고 했습니다.”

얼굴을 뜯어봐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박춘만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웠지만 확인할 필요성은 있었다.

“한국 쪽에 전하게. 만남을 가져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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