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113화 (113/127)

# 113

집에 돌아온 후 느긋하게 여가생활을 즐겼다. 중국의 도발로 전투준비를 하던 주아랑이 돌연 보고를 받고 내 방에 쳐들어온 건 예상 밖이었지만 일련의 사건이 나와는 관련이 없다고 못 박았다.

“정말 오빠가 한 거 아냐?”

“응. 아냐.”

“백두산 근처의 중국 마을 하나가 완전히 사라졌는데?”

“몬스터에게 공격당했겠지.”

“그렇게 강한 몬스터가 존재할 리 없잖아. 정말 오빠가 손 쓴 게 아니라고? 어제 나한테 물어봤잖아. 어디에서 문제가 일어났냐고.”

“궁금해서 물어봤지.”

“아씨, 이상한데. 알겠어.”

나는 하드버가 준 반지를 확인하며 그동안 미뤄놨던 미드를 봤다. 여가 시간이 많아지니 소모하는 방법이 문화생활밖에 없다.

미뤄놨던 미드를 다 보고 만화책, 소설책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런데 집중이 안 된다. 기분이 요상하다.

“돌아버리겠네.”

그간 밖으로 싸돌아다니면서 방랑벽이라도 생긴 걸까. 쉬는 것보다 뭐라도 하고 싶다. 집에 있는 것보다 당장이라도 여행을 떠나고 싶고, 새로운 사건들,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사람이란 게 본래 앉으면 눕고 싶고 누으면 자고 싶나 봐. 그리고 잠을 너무 오래 자면 머리가 돌아버리는 거지.”

“무슨 소리하는 거냐, 주인?”

“너무 나태해진 느낌이야.”

할 일이 남았는데 느긋하게 있으려니 조바심이 난다. 몸에서 좀이 쑤신다.

“나는 지금이 딱 좋다, 주인. 놀고 먹고 자고···. 특히 먹는 게 무척 만족스럽다. 뷔페가 너무 좋다.”

“너는 너무 많이 먹어.”

“생명체란 본래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것이다, 주인. 나는 생명의 본분에 충실한 것이다.”

“그래 그래. 너 잘 났어.”

차라리 지구에 오기 전 완전히 처리하고 올 걸 그랬나? 그랬으면 찝찝하지도 않았을 텐데···. 괜스레 후회가 된다.

반지가 언제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조바심이 더 나는 것 같군.

“어디 가냐, 주인?”

“바람이라도 쐬어야겠어.”

답답한 마음에 방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뭐지? 복도 끝방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여긴 접객실 층이라서 평소엔 사람이 없는데···.”

길드 마스터의 사무실이 같은 층에 있지만 주아랑은 여자다. 남자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청각에 집중했다.

“···중국 쪽에서 우리 정부에게 만남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이번 사태를 저희 쪽의 잘못이라고 보고 있고, 저희에게 책임을 물고 있습니다.”

“결국 자작극인 걸까요?”

모르는 사람과 주아랑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중국 쪽에선 전면전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자의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머릿속이 간질간질거린다.

“어!”

그러고 보니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겼던 환경부 장관의 목소리였다.

정부에서 사람이 왔구나.

“전면전이요?”

“예. 전면전을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런 자작극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확인 결과 그들은 거짓이 아닌 정말로 피해를 입었고, 분명히 수십 명의 헌터가 죽었습니다. 현장확인을 위해 방문했을 때 확실한 피해의 흔적을 발견했으니까요.”

“전면전이라··· 중국 측에서 단순히 던전의 선점을 위해 그런 감수를 할까요? 백두산 인근의 지역은 그렇게 중요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합동 참모 본부에서도 초기에 그렇게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놈들의 목적이 단순한 던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단순한 던전이 아니라고요?”

환경부 장관이 말했다.

“아무래도 백두산 인근의 엘프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엘프!”

감탄사는 주아랑이 아닌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서리 엘프족이 백두산 인근에 살았었지.”

중국의 목적이 그것이었구나. 봐주면 안 될 이유가 더 생겼다.

주아랑이 말했다.

“우리 쪽과 협약을 맺고 있는 서리 엘프족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중국 쪽에서 왜 엘프를 탐내는 거죠? 엘프들은 상당히 강합니다. 엘프들을 확보한다고 해도 상당한 피해를 봐야 할 텐데··· 득보다는 실이 크지 않나요?”

“중국 문화에는 그런 게 있죠. 동종동식.”

“동족동식?”

주아랑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환경부 장관이 마른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간이 안 좋을 땐 소 간을 먹고, 눈이 안 좋을 땐 생선 눈을 먹는다는 뜻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인들의 대다수가 생명의 위협을 크게 느끼면서 민간에 잘못 와전됐죠.”

“잘못 와전되다뇨?”

“중국에선 이런 소문이 있습니다. 오크처럼 용맹해지려면 오크 고기를 먹고, 오우거처럼 힘이 세지려면 오우거 고기를 먹어라. 실제로 그들은 오우거의 심장을 먹고, 트롤의 간을 빼먹습니다. 효능은 플라시보에 가깝지만 그들은 믿고 있습니다. 특히 트롤의 피 같은 경우는 실제로 회복 포션에 쓰이니 그들의 잘못된 믿음에 근거가 아주 없는 건 아니죠.”

“그래서 엘프들을 먹기 위해 우리를 공격한단 말인가요? 엘프들의 미모를 닮기 위해서?”

환경부 장관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접객실 밖에 있었지만 파장이 흔들리는 것으로 그가 고개를 격하게 흔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환경부 장관이 찹찹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프는 장수의 상징입니다. 인간보다 최소 10배는 오래 살지요. 중국인들이 엘프를 노리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불로장생(不老長生). 엘프들의 미모는 부차적인 문제지요. 물론 성적인 목적으로 엘프를 노리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엘프족과의 접전으로 볼 피해를 생각한다면 불로장생이 주목적이라고 봐야죠.”

“무서운 얘기군요.”

주아랑이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소름이 돋았다. 잘못된 믿음이 이래서 무섭다.

“그래서 당장 중국 정부에서 저희에게 요구하는 건 뭡니까?”

“중국 측에서는 이번 사건의 관련자와 만나길 원합니다. 그들은 선전포고 때문에 보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선전포고를 당한 쪽이 바로 길드 마스터님이 관리하는 마을이다보니 아무래도 실버스타 길드의 책임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아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도 않은 일에 책임을 지라는 건가요?”

“면목 없습니다. 저희 정부 측에서는 어떤 결정이든 실버스타 길드의 의견을 수용하겠습니다.”

“······.”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문을 두드리고 접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주아랑이 놀라서 소리쳤다.

“어, 어? 오빠?”

환경부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라면··· 주은성씨 맞으신가요? 5년 만이군요. 그런데 피부색이···.”

“좀 심하게 태웠죠.”

“···너무 변하셨군요.”

나는 그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중국에서 사건 관련자와 만나길 원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했죠?”

“내일 오전 국경 근처 협정선에서 만남을 원합니다.”

“빠르군요.”

“그들은 제대로 된 정부가 없다 보니 격식을 따지지 않습니다. 다른 국가에도 무례를 요구하죠.”

“좋아. 이 기회에 다 쓸어버려야겠군.”

내 말에 주아랑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오빠!”

“왜?”

귀가 따끔따끔하네.

“중국 헌터가 몇 명인 줄 알고 하는 소리야?”

“몇 명인데?”

“우리 측에서 추산한 것만 100만명이 넘어.”

“한국 헌터는 몇 명인데?”

“200만명.”

“많네. 그 중에서 우리 길드는?”

“10만 명도 안 돼.”

“음. 그건 좀 적네.”

문제는 안 된다. 나 혼자서 1억 명을 상대할 수도 있으니까.

“머릿수 문제가 아니야. 중국 헌터들은 산전수전을 다 겪었어. 그래서 우리 헌터들보다 강해. 양계초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행동력의 수준도 달라. 완전히 사이비 종교 같다고.”

“사이비 종교?”

“응.”

나는 웃었다.

“그럼 이야기가 더 쉽겠네.”

“무슨 소리야?”

“우두머리가 생기면 우두머리만 제거하면 돼. 그럼 나머지는 다 밑으로 들어오거든.”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야.”

“양계초라는 사람 신원정보를 줘.”

환경부 장관이 눈치 좋게 내게 서류를 건넸다. 나는 서류를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을 하든 가까운 미래를 보면 안 돼. 먼 미래를 봐야 해. 지금 가만히 놔두면 더 병신 같은 짓을 저지르고 부당한 요구를 하겠지. 나는 그런 꼴 못 봐.”

“오빠···.”

좀이 쑤셨는데 잘 됐군.

“신경 끄고 결과만 기다리고 있어. 갔다 올게.”

“오빠! 위험하다니까!”

나는 소리를 버럭 지르는 주아랑을 외면하고 약속 장소로 날아갔다.

* * * * * *

백두산 인근 협정선에 도착했다. 약속장소로 정해진 회담장 인근의 마을에 가니 길드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백두산 지부 담당 하주미 본부장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아랑이 내가 사라지는 걸 보고 다급히 연락을 한 모양이다.

“갑작스럽게 오셔서 준비를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예전부터 팬이었습니다. 주은성님. 같이 사진 좀 찍을 수 있을까요?”

그녀는 내 옆으로 와서 사진을 찍고 수줍게 웃었다. 귀엽네.

“약속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나요?”

“아직 하루 정도 남았습니다.”

“그럼 하루 동안 기다리죠.”

“네.”

나는 기다리는 동안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마을을 구경했다. 한반도 북쪽에 위치한 거주지역이다 보니 북한 문화가 많이 묻어있었다. 평양냉면과 녹두전, 북한식 만두와 김치말이 국수로 식사를 마치고 나머지 시간은 백두산 인근을 탐방했다.

서리 엘프족 마을 주변을 서성이며 엘프 족들의 동태를 확인하니 문제는 없었다.

“한국인들과 마찰은 없는 것 같군.”

그리고 다음 날 약속 시간이 다 돼서 회담장으로 갔다. 회담장에 가니 머리를 완전히 밀어버려서 대머리가 된 헌터가 중국 대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많이 늦으셨군요.”

그는 내게 핀잔을 날렸다.

“정각에 왔어. 이야기를 시작하지. 당신이 양계초?”

그리고 내 물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예의가 없으시군.”

“예의가 없는 건 그쪽이지.”

“나도 무례를 감행하겠소.”

“좋으실 대로.”

속으로 칼을 가는 것보다 개싸움처럼 치고받는 게 편하다.

“당신이 이 사건의 주동자요?”

“주동자?”

“그렇소. 며칠 전 중국 마을에서 소란이 있었지. 부하의 보고대로라면 검은 피부의 동양인이라고 했는데 당신이 맞는 것 같군.”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에둘러 말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그래서 용건이?”

“대가를 요구하러 왔소.”

“대가?”

나는 그를 노려보고 물었다.

“뭔데? 구체적으로 말해봐.”

“백두산 인근 지역을 모두 우리 중국에게 넘겨주시오.”

“그게 끝?”

이거 뻔뻔한 놈이군.

“엘프족 때문인가?”

내 물음에 그가 정곡을 찔렸다는 듯 찔끔했다.

“맞군.”

“당신이 알 필요는 없지.”

“만약 안 넘겨준다면?”

“전면전을 각오해야 할 것이오.”

그리고 씩 웃는다.

“겁이 없군.”

“겁이 없는 건 당신이지. 대국을 건드리고도 그렇게 목을 뻣뻣하게 세우다니.”

“흐음.”

아무래도 서경춘처럼 강한 놈은 아닌 모양이네.

“···아니면 수준을 읽을 줄 모르던가.”

“무슨 소리요?”

“혼잣말.”

서경춘이 말하길 태생적인 능력으로 내 기운을 읽는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다른 놈들은 내 기운을 전혀 못 읽는군.

그렇지 않고선 괴물 앞에서 자신의 요구사항을 관철할 미친놈은 없다.

“요구한 건은 생각해보지.”

“빠른 시일 내에 결정해야 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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