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114화 (114/127)

# 114

“걱정 말라고.”

“끝까지 건방지군.”

웃음이 나왔다. 건방진 게 누구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 * * * * *

협상이 끝나고 서로 회담장 밖으로 물러갔다. 중국 최고의 헌터인 양계초는 포탈을 타고 수도로 돌아갔다. 나는 그 광경을 쳐다보고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행동에 나섰다.

“베이징 근처겠지?”

양계초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주변을 환히 볼 수 있게 하늘을 난 후, 마력의 파장을 읽으면 됐다. 기운을 감지하고 보니 헌터들의 수준이 비등비등하다. 도토리 키재기라고 할까.

“중국 최고의 헌터라는 놈도 별 것 없구만.”

새삼 의심이 든다. 이 녀석을 죽인다고 해도 제2, 제3의 우두머리가 나오면 어떻게 하지.

“그럼 또 박살내면 되지.”

콧노래를 부르며 날아갔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면에 착지하기 전 하늘에서 쳐다보니 으리으리한 저택이 성처럼 쌓여 있었다. 책에서 봤던 왕족들이 기거하는 고궁 같았다.

“먹고 살기도 힘들 텐데 이렇게 과시해놓은 건 자존심 때문인가?”

기척을 숨기고 안으로 진입했다. 경비는 별로 없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한 모양이다. 이거 잘 됐군.

복도를 지나치고 놈이 자고 있는 침실 쪽으로 갔다. 문을 열고 급습했다. 내력을 끌어올리자 놈이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뭐, 뭐야!”

난생 처음 느껴보는 거대한 내력일 것이다.

“뭐기는. 두 번째 회담시간이지.”

“어, 어, 어···? 너, 너, 너는?”

양계초가 떠듬떠듬 놀랐다.

“뭘 그리 놀래?”

“이거 꿈인가? 아니, 꿈이 이렇게 현실감이 있을 리가···.”

꿈과 현실을 구분 못 하는 모지리인 모양이다. 나는 무형의 내력을 움직여서 놈의 침실 옆에 있는 탁자를 움직였다.

덜컹.

의자도 움직였다. 단숨에 회담장을 할 때처럼 의자와 탁상을 우리 사이에 배치했다.

“앉아.”

내 말에 양계초가 떨떠름해 하며 의자에 앉았다. 나도 그걸 보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두 번째 협상을 시작하지.”

“무슨 속셈이지?”

“속셈이라니···?”

“어처구니가 없군. 배짱이 두둑한 건가? 겁을 상실한 건가? 이런 밤중에 적진에 혼자서 오다니···.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만심이 대단한 모양이야.”

“객관적 판단의 결과야.”

나는 탁자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감상은 끝났나?”

“그래.”

“내 용건을 말하겠어.”

양계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했다.

“한 달의 시간을 주지. 바벨의 탑이 있던 터전을 기준으로 북쪽으로 확 올라가. 그리고 남쪽으로는 두 번 다시 내려오지도 말고 넘보지도 마. 백두산? 웃기지 말라고 그래. 내 말대로 하면 너희들을 살려주지. 어때?”

“뭐라고?”

“잠이 덜 깼나 보군. 다시 말해줄까?”

양계초의 눈썹이 확 올라갔다.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다.

“하! 하하하하!”

그리고 그는 웃었다.

“큭큭큭큭.”

또 웃었다.

“크하하하!”

계속 웃었다. 이 녀석 수면이 부족해서 머리가 돌아버린 건가?

양계초가 말했다.

“너의 의견은 한국 정부 전체의 의견인가?”

“아니. 내 개인적인 독단의견이야.”

“그렇군.”

“대답은?”

양계초가 탁자를 거세게 내리쳤다.

“건방진 놈! 죽고 싶나?”

목소리가 앙칼지다.

“아니, 살고 싶은데.”

“무공수준이 좀 높다고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좀 높다라···.”

좀 높은 건 아닌데.

“넌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어. 너 혼자선 우리 중국을 이길 수 없어. 개인이 집단을 이길 수 있다고 보나?”

“글쎄···.”

“개인은 집단을 결코 이길 수 없어! 특히 우리 대중국처럼 결속력이 강한 집단은 더더욱!”

양계초가 눈을 부라렸다.

“그래서?”

“내 말 한마디에 한반도를 쓸어버릴 정예 헌터가 수십만 명이 돼! 그런데 내게 협박을 한다고? 대중국에게 요구를 한다고!?”

그가 다시 탁자를 거세게 내리쳤다.

쾅!

탁자가 반으로 갈라졌다.

“감히!”

나는 표정 하나 고치지 않고 말했다.

“그 말은 벌레가 사람 걱정하는 것만큼 보잘 것 없어. 넌 아직도 모르고 있군.”

“무슨 소리냐?”

말로 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낫다.

“이런 소리지.”

처음은 반으로 부서진 탁자였다.

덜컹덜컹.

그리고 그다음은 의자였고.

드드드득.

이내 대리석 바닥과 건물 기둥 전체가 흔들렸다.

“허, 허헉!”

양계초가 자신의 목을 잡고 부들거렸다.

“윽, 크으윽!”

그의 핏발 선 눈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 이게 무슨?”

“이제 좀 알겠나?”

내가 가진 내력의 1푼 정도를 뿜어내서 압축시켰을 뿐인데. 이 정도도 못 버티는 모양이다.

“나한테는 개미든, 사람이든, 민간인이든, 헌터든 똑같아. 죄다 개미 한 마리 죽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야. 그럼에도 내가 굳이 이렇게 찾아온 것은?”

나는 자문자답했다. 고개를 숙여서 그의 얼굴에 대고 말했다.

“보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내 자비심을 시험하고 싶어?”

양계초는 달라진 압력차이를 버티지 못하고 의자에서 넘어져 무릎을 꿇었다.

“그, 그만! 그만!”

“내 인류애를 시험하고 싶냐고?”

나는 멈추지 않았다. 보여줄 때는 확실히 보여주는 게 낫다.

찌직! 픽!

그의 몸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나고 실핏줄이 터져 나왔다.

“제, 제발! 제발! 사, 살려줘!”

나는 그제야 멈췄다. 대기 중에 펼쳐놨던 내력을 거뒀다. 양계초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허, 헉헉··· 당신은 누구요?”

항상 이런 식이다. 좋은 말로 하면 호구로 보고 뜯어 먹으려 하고, 힘을 보여주면 깡패로 보고 설설 긴다.

“한국에 거주하는 무명 헌터야.”

“말도 안 돼···. 무명 헌터라고? 이 정도 내공이면 최소 5갑자는···. 서, 설마!”

그는 혼자 말하고 혼자 판단을 내렸다.

“전설에서나 나올법한 영물이오? 사람으로 둔갑한 것이오?”

이놈들 영물 참 좋아하네.

“마음대로 생각해.”

게다가 내가 가진 내력의 1할도 아닌 1푼을 보여줬을 뿐인데 5갑자란다. 이거 제대로 측정할 줄도 모르는 놈이군.

“좋아. 표정을 보니 마음에 드는 군. 내 경고를 제대로 들어먹었으면 좋겠어.”

“헉헉···.”

“그럼 만나서 거지 같았고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나는 인사를 하고 다시 협정선 근처의 마을로 되돌아갔다.

* * * * * *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추가 흔들렸다. 하드버는 가슴을 조리며 시계를 쳐다봤다. 약속된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협심증에 걸린 사람처럼 가슴 속에 무거운 추가 매달린 것 같았다.

‘황제가 왜 갑자기 긴급 소집을 한 거지? 눈치를 챈 건가?’

그는 만찬이 차려진 식탁을 보고 생각했다. 황제가 갑작스레 간부들을 긴급 소집했다. 덕분에 태경급 이상의 천외천인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하드버.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군. 무슨 일 있나?”

그중에는 하드버의 오랜 정적. 칼리고도 있었다.

“자네야말로 목 밑의 벼슬이 축 늘어진 걸 보니 우안이 있는 것 같군.”

하드버는 감정을 숨기고 받은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줬다.

“내가 피곤해 보이나?”

“그래.”

“흐흐. 요즘 일이 많아서 말이야.”

칼리고는 수탉을 닮은 수인족이었다. 목 밑에 닭처럼 벼슬이 있었는데 심리가 안정되고 몸이 건강할수록 탱탱하고 탄력이 넘쳤다.

“그나저나 황제께서 왜 우리를 부른 걸까? 이해할 수 없군.”

칼리고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혹시 이유를 알고 있지 않나?”

“무슨 소리지?”

“최근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 말이야.”

“이상한 소문?”

하드버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칼리고가 말했다.

“수도의 북쪽 지역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는 건 자네도 알 걸세.”

“알고 있지.”

주은성이 유적의 봉인을 깬 이후로 신성한 지역의 신기가 모두 사라졌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하드버는 인위적인 장치를 모색했고 그것으로 주둔지의 위치를 숨기고 있었다.

‘설마 그때 황제가 알아챈 건가?’

사전에 포커스를 자신에게 맞추고 있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현저히 낮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불안을 감추고 있는데 칼리고가 말을 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천외천인을 죽인 놈이 있다는데 말이야.”

하드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런 놈을 비호하고 있는 공관의 간부가 있다고 누군가 그러더군.”

“그런 헛소문은 어디서 듣는 거지?”

“수도의 경비대장을 심문해서 알아냈지.”

“경비대장?”

칼리고가 목 밑의 벼슬을 쓰다듬었다.

“할웬이라고 길고 가늘게 살자는 게 인생의 모토인 놈이 있다네. 덕분에 입을 열고 정보를 듣기가 훨씬 쉬웠지. 얼빠진 놈은 언덕을 보지 못하고 둔덕만 보거든.”

“이런.”

그렇게 누차 경고했는데. 결국 정보를 푼 모양이다.

“이제 물어봐도 되나? 자네가 비호하는 그자는 누구지? 왜 천외천인을 죽인 그자를 비호하는 거지?”

하드버는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말했다.

“오해야.”

“오해?”

“여기서 말하는 건 그렇고. 자네에게도 좋은 정보니까 이따가 말해주지.”

“나에게 좋은 정보라고?”

“그래. 이건 우리끼리만 알아야 해. 여기선 목소리를 낮춰도 한계가 있다네. 알겠나?”

칼리고가 주위를 둘러봤다. 만찬 자리라서 많은 사람들이 친목을 나누고 있지만 몇몇 사람들은 자신과 하드버를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과연 그렇단 말이지.

“좋아. 내게 득이 된다면 기다릴 수 있지. 언제 말해줄 거지?”

하드버가 말했다.

“이 회의가 끝나는 대로.”

* * * * * *

어젯밤 경고가 중국 측에 제대로 먹혔으리라 기대하고 기다렸다.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서 천지연을 바라보니 장관이다. 그러고 보니 백두산 천지연에 괴물이 산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일까?

“중국놈들이 영물 타령 잘 하던데. 정말로 이 근처에 영물이 있는 거 아냐?”

호기심을 품고 천지연의 수면에 돌멩이를 던지고 있는데 주아랑이 다가왔다.

“오빠.”

“아랑이 왔니?”

“응.”

주아랑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결국 오빠가 중국 쪽이랑 얘기를 끝낸 거야?”

“그래.”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한 거야?”

그녀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중국 쪽에서 이번 사건 일체에 대한 책임요구를 완전히 포기했어. 우리 쪽에 책임을 물기는커녕, 오히려 사과를 했어.”

“잘 됐군.”

“그것뿐만이 아니야. 바벨 탑을 기준으로 북쪽으로 완전히 철수했어. 기존에 있던 협정선도 다시 긋겠대. 이해가 안 되는데 우리 쪽을 겁내는 눈치야.”

주아랑이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궁금해?”

“응.”

나는 대화로 갈등을 풀었다고 적당히 거짓말을 했고 그녀는 납득을 하진 못했지만 내 말을 믿는 눈치를 보였다.

“이해가 안 되네. 오빠는 말주변이 없잖아.”

“내 언변실력이 중국인들에겐 먹히나 보지.”

“아씨, 이상한데. 일단 알겠어.”

이제 중국 측과의 갈등도 해결됐다. 남은 일만 빨리 처리하면 되겠군.

바로 그때.

우우웅.

호출이 언제 올까 생각하면서 손가락의 반지를 쳐다보는데 갑자기 빛이 번쩍였다.

“어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드디어 때가 된 모양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