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성좌.
여전히 비어있는 그 권위의 자리를 보며 하드버는 조마조마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소집을 명했던 황제가 돌연 소집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다행이다.’
이유는 모른다. 다만 정신을 압박하던 커다란 문제가 단번에 사라지자 하드버는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단 하나. 그의 오랜 정적 칼리고와의 문제만이 남아 있었다.
“오랜만의 소집이길래 뭔가 했더니 시간만 낭비했군. 이제 자네만 아는 그 정보를 알려줄 때가 됐어.”
칼리고가 다가왔다.
“물론. 알려주겠네.”
“좋아. 어디로 가지?”
하드버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곳을 알고 있지. 따라오게. 정보를 알려줄 터이니.”
하드버는 수도 북쪽에 위치한 자신의 근거지(해방연합의 근거지)로 칼라고를 안내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칼리고가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 멀었나?”
“여기야.”
하드버가 땅바닥을 툭툭 두들겼다. 예전 슬라임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썩 외딴 지역이군. 혹시 다른 생각을 품었나?”
“그럴 리가.”
황제의 눈이 통하지 않는 곳은 여기뿐이다. 유적이 파괴된 직후 인위적인 장치로 가렸기에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됐어. 여기가 말이 샐 구석은 없는 조용한 곳이라고 치지. 이제 말해보겠나? 그자의 정체가 뭔지, 왜 내게도 유용하다고 하는지?”
하드버는 자신의 반지를 쳐다봤다. 그리고 한숨 끝에 말을 꺼냈다.
“자네는 황제를 믿나?”
“무슨 소리지?”
“황제의 행동에 의심을 품은 적이 없냐는 말일세.”
칼리고는 의아해하면서도 말을 아꼈다.
“시답잖은 말을 하려고 내 귀중한 시간을 빼앗은 건가?”
“시답잖은 말이 아닐세.”
“그럼?”
“황제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나?”
“목적?”
“황제가 왜 구슬을 모으고 있는지는 알고 있나?”
칼리고는 웃음이 나왔다.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천외천의 영광을 위해서지. 우리의 수명과 천외천의 번영을 위해서. 자네의 물음에 무슨 의도가 있는지 궁금하군. 내 충성을 의심하나?”
“여긴 황제의 눈과 귀가 가려지는 곳일세. 연기를 할 필요는 없네.”
“내 충성심에는 조금의 가식도 없어.”
칼리고의 눈두덩이 꿈틀거렸다. 하드버가 계속 말했다.
“아주 오래전 황제가 이곳에 와서 우리에게 힘을 줬네. 그는 우리에게 번영을 약속했지.”
“그래. 그 이후로 세대를 거듭하면서 오랜 시간이 흘렀어. 황제의 말은 틀리지 않았네. 적어도 현재까진.”
“틀렸어.”
“틀렸다고?”
“나는 황제가 우리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네.”
“우리를 속여?”
“그래.”
칼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적잖이 언짢은 눈치였다. 하드버가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그들은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이야.”
“약속을 어긴 자들도 죽었어.”
“신뢰의 단절은 언제나 큰 대가를 부르지.”
“구슬의 부작용을 알고 있나? 모두가 괴물이 됐어.”
“그건 정당한 대가야.”
“괴물이 되길 원했던 존재는 아무도 없었네.”
이 대목에서 칼리고는 입을 닫았다.
“······.”
구슬을 많이 먹으면 괴물이 된다. 괴물은 더 많은 구슬을 원하고 종국에는 자아를 완전히 잃는다. 그리고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존재가 된다. 하드버가 말했다.
“자네는 이곳 북쪽이 왜 버려졌는지 알고 있나?”
“미개척지라고 알고 있네. 흉폭하고 미개한 몬스터들이 많아서 철저히 관리되는 곳이지.”
“나도 수십 년 전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지.”
하드버는 자신이 서 있는 장소, 해방연합 근거지의 입구를 쳐다봤다. 예전 거대 슬라임이 있던 곳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황제는 우리를 장기 말로 쓰고 있는 것뿐이야.”
“우리를 이용하고 있다고?”
“전 차원에 걸쳐서 구슬을 모으고 있네. 그 과정에서 그는 작은 배팅을 했을 뿐이야. 어쩌면 씨앗을 뿌린 것일 수도 있고, 유흥을 즐긴 것일 수도 있지. 알고 있나?”
하드버가 바닥을 발로 굴렀다. 그는 자문자답했다.
“이곳 북쪽은 구슬을 먹은 자들의 결말. 즉, 무덤이었네.”
“무덤···.”
“이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기운에 이끌려서 저들끼리 죽고 죽이고, 먹고, 먹혔네.”
“기묘한 기운이라면···?”
“이제는 그 기운 자체가 사라졌지만···.”
하드버는 주은성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주은성이 봉인을 해제한 후 신성한 기운도 같이 사라졌다. 칼리고가 말했다.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자네의 말은 모두 자네 혼자만의 추측이잖아. 그런 추측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하드버는 칼리고를 보고 씩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나는 자네를 죽이려고 했어.”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 나를 죽여?”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지.”
하드버는 칼리고를 쳐다봤다. 칼리고는 언짢은 기색으로 하드버를 노려봤다. 하드버는 ‘하’하고 웃으며 말했다.
“예언이 있었네.”
“예언? 나를 죽이라는 예언인가?”
“아니. 자네도 알고 있는 예언이야. 가끔 단편적으로 미래를 보는 자들이 남긴 예언.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오는 예언.”
고전 예언이라면 내용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천외천에서 전래동화처럼 구전되는 이야기. 하계의 존재가 황제를 죽이고 세계를 구원한다는 이야기.
“고작 그깟 쓰레기 같은 옛날이야기를 하자고, 황제를 기만하고, 나를 협박하고,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아냐.”
“아니라고?”
하드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언은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야. 예언의 남자를 발견했어.”
“예언의 남자?”
칼리고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곧바로 판단을 내리고 되물었다.
“설마 내게 도움이 된다는 문제의 그 남자가 예언의 그 남자라는 소리인가?”
“그렇네.”
확답이 떨어지자 칼리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드버의 말을 믿어서 충격을 받은 게 아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돌았군.”
“나는 돌지 않았어.”
“하계의 존재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건 불가능해.”
“가능성을 보았네.”
“무슨 가능성?”
“황제를 죽일 가능성.”
뒤통수가 멍했다.
“자네는 돌았어.”
“난 미치지 않았네. 멀쩡해.”
“당장 우리 모두의 힘을 합쳐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황제를···. 한낱 벌레만도 못한 하계의 존재가 죽일 거라고? 미친놈! 하계의 존재에게 희망을 걸자니!”
칼리고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하드버가 말했다.
“자네에게 증거를 보여줄 수 있네.”
“증거?”
칼리고가 걸음을 멈췄다. 선뜻 이해가 안 되지만 호기심이 확 솟구쳤다.
“무슨 증거?”
“그 남자를 보여주지. 자네도 그 남자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세.”
“그 문제의 인원이 여기 있나?”
하드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건 아니지. 하지만 나와 약속을 했네.”
“무슨 약속?”
“누구든 한 명을 죽여주기로.”
“······.”
하드버는 말을 마치고 반지를 조작했다. 반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칼리고가 말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약 5분 정도.”
5분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둘은 대화를 계속 나눴다.
“난 황제를 건드리는데 회의적이야.”
“언젠가는 터질 폭탄이네.”
“상처는 가만히 두면 저절로 낫지.”
“그 말은 틀렸네. 모든 일에는 임계점이 있어. 한계를 넘어서면 돌이킬 수 없어.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여서 손을 봐야 하네.”
“자네가 말한 그 남자가 믿을 만한 인물인가?”
“나쁜 존재는 아니야.”
“일단 믿을 수 없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지만 직접 보고 판단을 내리겠어.”
“좋을 대로 하게.”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다.
“이상하군. 반지의 조작을 잘못했나 봐. 좀 더 기다려보게.”
“알겠어.”
하드버는 다시 반지를 조작했다. 또 다시 반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그런데 이번에도 반응이 없다.
“장난치는 건가?”
칼리고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드버가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잠깐만. 잠시만 기다려보게. 이럴 리가 없는데···.”
“내 참을성을 시험하는군.”
또 시간이 흘렀다.
“·········.”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곧 올 거야.”
또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
결국 칼리고가 더 버티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건 시간 낭비야!”
그 순간 섬광이 번쩍하고 둘 사이를 감쌌다.
* * * * * *
생각해보니 반지의 사용방법을 듣지 못했다. 휴대폰과 비슷한 기능이라고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내력을 불어넣고 수화기처럼 귀에 대고 대화도 해보고 별 지랄을 다 했다. 그런데 여전히 반응이 없다.
“이거 어떻게 사용하는 거야?”
한참을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계속 반짝이고 있는 반지를 보면서 제대로 관찰하려고 손가락에서 벗겼는데 그 순간 반지가 허공을 날았다.
위이잉.
반지가 빔프로젝터 스크린처럼 빛을 쏘았다.
우우웅.
바닥에서 마법진이 만들어지고 포탈이 생겨났다. 나는 그제야 반지의 사용방법을 깨달았다.
“사용방법을 제대로 가르쳐줄 것이지.”
짜증을 삭이면서 반지를 챙겼다. 나는 포탈 안에 들어갔다.
* * * * * *
차원이동이 완료됐다. 짜증을 내려고 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일단 멍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하드버에게 아는 척을 했다.
“드디어 불렀군. 영감.”
“내가 할 말이네. 드디어 왔군.”
주변을 둘러봤다. 하드버를 제외하고 한 놈이 더 있다. 얼굴은 수닭인데 몸은 사람의 몸이다. 이거 기괴하게 생겼군.
“이 사람은 누구지?”
“내 동료일세. 칼리고라고 하네.”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하려다가 그의 섬뜩한 눈빛을 보고 포기했다. 통성명은 됐다. 어차피 일만 끝나면 남남인데, 일만 후딱 끝내고 다시 지구로 돌아가면 된다.
“그래서 내가 처리해야 할 사람은 누구지?”
내가 묻자 하드버가 말했다.
“본래 자네가 죽여야 할 사람은···.”
뒷말을 기다리는데 뜸을 들인다. 밥이 덜 됐나. 되게 뜸 들이네.
“누구야? 빨리 말해.”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이 자일세.”
하드버가 가리킨 곳엔 칼리고라는 수인 족이 있었다.
“누구? 치킨?”
치킨이라는 말에 칼리고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는 내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실수했습니다.”
사과를 하고 다시 물었다. 하드버가 말했다.
“하지만 바뀌었어.”
“바뀌었다고.”
“그 전에 하나 묻겠네. 소원이 두 개면 안 되지?”
“당연히 안 되지.”
나는 기가 막혔다. 이 영감 신뢰를 무한정 퍼부어주더니 이런 꿍꿍이가 있었나?
“인정에 기대어 볼 생각이면 포기해. 나는 약속에 철저해. 한번 약속한 건 죽어도 지킨다 이 말이야.”
“그 말을 들으니 고맙군. 오히려 안심이 됐어.”
“천만에.”
이후로 정적이 찾아왔다. 하드버와 칼리고가 서로를 노려봤다. 나는 마력의 파장을 읽고 그들이 전음(傳音) 비슷한 것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슨 꿍꿍이지?
기다리다가 지쳐서 내가 먼저 물었다.
“빨리 말해. 누구를 없애면 되지?”
비로소 하드버가 말했다.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을 처리해야겠어.”
“다른 사람? 누구?”
그는 전혀 뜻밖의 인물을 꺼냈다.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