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의 귀환-116화 (116/127)

# 116

내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황제?”

“그래. 황제.”

“화아아아앙제···?”

“그래. 황제. 본래 한 명만 죽여준다는 내용이었잖나?”

어이가 없다.

“그래. 그리고 그 대상이 적어도 천외천의 황제는 아니었지.”

“황제에 대해서 들은 게 있나 보군.”

“이건 명백한 계약위반이야.”

나는 단호한 어조로 못을 박았다.

“계약위반까진 아니네. 그저···.”

“위반 맞아.”

“아닐세. 그저 계약 내용의 변경 정도가 아닐까···.”

“계속 말장난 할거면 그만두고 싶은데.”

내가 손사래를 치자 하드버가 입맛을 다셨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올 뒷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바가 틀어지면 약속을 어긴다. 제아무리 신의가 있다고 평가된 사람이라도 종국에 원하는 바가 틀어지면 약속 자체를 어기는 경우가 많다. 머리가 있고 생각이 있는 존재라면 대개 그렇다.

뇌물을 줄 때 원하는 게 있어서 선뜻 줬는데, 나중에서 그게 틀어진다면 어찌 뇌물이 아깝지 않을까.

하드버도 같은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말을 바꾸고 지구 침략을 재고할 줄 알았다. 적어도 이걸로 협박은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수가 틀리면 바로 죽일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착각이었다.

“자네에게 이걸 보여주겠네.”

그는 품에서 점성술사가 쓸 법한 수정구를 꺼냈다.

“그게 뭐지? 수정구?”

“말하는 것보다 보여주는 게 낫지. 이걸 잘 보게나.”

하드버가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수정구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영롱한 구체를 쳐다보는 순간 의식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찔한 느낌이 들었는데 미간을 찌푸리자 금세 증세가 사라졌다.

“수정구의 손길을 거부하면 안 되네.”

“거부하면 안 된다고?”

무슨 꿍꿍이지?

“가만히 집중해서 수정구를 쳐다보게.”

“언제까지?”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의심이 들었지만 호기심이 더 컸다.

나는 그의 말대로 수정구에 정신을 집중했고 곧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물에 둥둥 떠다니는 부유감이 들어서 몸을 맡기고 있는데 하드버가 말했다.

-이제 고개를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게. 무엇이 보이는가?

그의 목소리가 넓은 홀에서 말하는 것처럼 웅장하게 들렸다.

“뭐가 보이냐니···.”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거친 숨을 훅 들이켰다.

“어, 어, 어···.”

이게 뭐지?

갑자기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서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수작이지? 이건 영상장치 같은 건가?”

-비슷한 걸세.

“내게 뭘 보여주는 거지?”

-잠자코 보고 있게나.

나는 하드버의 말대로 잠자코 주변을 관찰했다. 부서진 빌딩이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있었고 곳곳에서 사람들의 시체가 넘쳤다. 불에 탄 흔적도 있었다. 움푹 파인 땅바닥과 갈라진 파편들을 보니 폭탄의 흔적인 듯했다.

현실감이 넘치네.

영화관 맨 앞 좌석에 앉아서 3D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감상을 끝낸 나는 기다리지 않고 하드버에게 물었다.

“이게 뭐지?”

-지구일세.

그의 잔잔한 목소리에 나는 뒤통수가 아찔했다.

“지구라고···?”

황당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여기가 지구라고? 이 멸망한 도시가 지구?”

-그렇네.

“농담이지?

-농담이 아니네.

지구가 이렇게 변했다고?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렇게 변했다니···?”

황당해서 몸을 부들부들 떠는데 하드버가 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현재의 지구는 아니고 미래의 지구야.

“미래의 지구···?”

더 황당해졌다.

-그렇네. 미래의 지구. 자네가 황제를 죽이지 못하면 일어날 지구의 모습이지.

“내가 황제를 죽이지 못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그래.

나는 하드버의 말을 믿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기울어진 남산타워를 보았다. 맙소사! 남산타워!

하늘을 날아서 더 둘러보다가 반쯤 부서져 내린 경북궁도 발견했다. 확실히 지구였다. 틀림없는 지구였다. 내 머릿속의 정보를 읽어서 시뮬레이션화 한 걸까?

“왜? 황제가 어째서 지구를 파괴하지?”

나는 사태를 더 지켜보기로 했다.

-황제는 얻을 곳이 없는 차원을 가만히 두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왜?”

-자네는 모르겠지만 자고로 차원마다 차원의 균형이란 게 있다네.

“차원의 균형?”

하드버는 천기누설에 버금갈 말을 꺼냈다.

-모든 차원의 에너지 총량이 같다는 거지. 예전에는 가설이었지만 요즘은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네.

“무슨 개뼈따구 같은 소리야?”

사이비 종교 같은 말인데 천외천인이 말하니 이상하게 믿음이 간다.

-자네가 사는 지구처럼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구슬, 그러니까 마력 혹은 내력과 같은 에너지를 가지지 않은 차원에서는 그 반대급부로 차원 자체가 묘한 걸 품고 있게 되지.

“묘한 것이라고?”

나는 되물으면서도 머릿속에서 하얀색 구슬을 떠올렸다.

어, 그러고 보니 근원이 있었지.

하지만 실버의 시조 드래곤은 다른 차원에서 툭 떨어져 나와 우리 쪽 차원으로 봉인된 게 아닌가? 처음부터 우리 차원과 같이 있었던 건가?

‘뚜껑이랑 병이 안 맞는 느낌인데···.’

더 생각하려니 머리가 복잡하다. 나는 생각을 지우고 말했다.

“그래서 그 차원의 균형이란 게 도대체 지구가 파괴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야?”

-모든 건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걸세.

“균형?”

-강한 존재가 있으면 약한 존재가 있고 약한 존재가 있으면 강한 존재가 있는 법. 적은 에너지가 있으면 강한 에너지가 있고 강한 에너지가 있으면 약한 에너지가 있는 법일세. 쉽게 말해서 에너지의 총량은 차원마다 같아야 한다는 거지.

점점 요상한 소리를 해댄다.

“어!”

나는 문득 의문이 떠올라서 물었다.

“그럼 천외천은 뭐지?”

내 질문에 하드버가 웃었다.

-바로 그걸세.

“바로 그거라고?”

-천외천은 다른 차원들과 달라. 차원의 균형을 전혀 맞추고 있지 않아. 강한 사람이 있으면 약한 사람도 있어야 하는데. 천외천에서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다른 차원에 가면 해당 차원에서 가장 에너지가 많은 존재가 돼버리지.

“그럼 모순이잖아?”

-맞아. 모순이네. 그것 때문에 천외천에서 다른 차원을 파괴하는 걸세. 파괴되고 남은 공간을 천외천이 차지하게 되면 에너지의 총량은 a가 아닌 2a가 되는 거니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천외지가 천외천에 붙어있는 것도 그런 이유인가?”

-비슷하지만 다르지. 천외지는 식민지니까. 다만 다른 차원들도 천외지처럼 천외천에 붙어있네. 차원의 균형을 위해서.

이제 어느 정도 알겠다. 다만 의문이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그럼 다른 차원의 주민들을 이곳에 불러들이는 이유는 뭐야?”

-그것도 차원의 균형 때문일세.

“완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이네.”

내 비아냥거림에 하드버가 변명했다.

-균형이라는 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야 하네. 에너지가 부족하면 다른 곳에서 에너지를 가진 구슬이나 생명체를 채워와야 하고 에너지가 넘치면 다른 차원을 파괴해서 빈 공간을 확보해야 하지.

“까다롭네.”

-그래. 이걸 신경 쓰지 않으면 차원에 과부하가 걸리고 종국엔 구멍이 뚫려버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지. 천외천에서 다른 차원을 계속 파괴하고 침략한다면 우리는 계속 이 짓거리를 해야 한다네. 침략전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세.

황제를 가만히 놔두면 지구가 왜 멸망하는지는 알겠다.

“그래서 내가 황제를 죽여야 한다고?”

-가까운 미래일지도 모르고 먼 미래일지도 모르네. 하지만 황제를 살려두면 침략전은 계속될 거고 언젠가는 지구도 파괴될 걸세.

“흐음.”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건 어떻게 한 거지?

“근데 혹시 당신 미래를 볼 수 있나?”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장면들이 썩 현실감이 있어서.”

-미안하지만 잘못 짚었네. 나는 예지능력이 없어.

그렇군. 나는 질문을 바꿨다.

“당신은 내가 황제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네.

“가능성이라···. 확률로 따지면 몇 퍼 센트 정도?”

-50퍼센트.

뻔한 대답을 하는군. 괜히 물어봤다.

내가 잠자코 있자 하드버가 뒷말을 덧붙였다.

-최근 모든 일들이 누가 틀에 맞춘 듯 예언대로 이뤄지고 있다네. 그러니 자네와 황제의 싸움도 예언대로 이뤄질 걸세.

“예언에서는 내가 황제와 싸운다고 했나?”

-그렇네.

“그럼 싸움에서는 누가 이긴다고 했지?”

하드버는 즉답했다.

-자네가 황제를 무찌른다고 했네.

마음에 드는 예언이네.

“그 예언 믿을 만한가? 당신 생각은 어떻지?

-황제에 대한 예언은 오래전부터 민간에서 내려오던 예언이야.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라서 옛것을 믿는 경향이 있지. 그래서 당연히 예언을 믿고 있네. 다만 확답은 할 순 없어.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

“정확히 그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나? 수정구로 지구의 미래는 예측했잖아.”

“수만, 수천, 수백 가지의 미래 중에 단 한 가지 가능성을 보여줬을 뿐이네.”

나는 납득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수정구의 힘에서 벗어날 때다. 전신의 내력을 뿜어내듯이 발산하자 주변 풍경이 안개처럼 걷혔다. 이내 나는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황제를 죽여주겠나?”

하드버가 물었다.

“흐음···.”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말했다.

“좋아. 황제를 죽이라는 의뢰. 접수하지.”

* * * * * *

황제와 대적하기 전 지구에 한 번 다녀올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관뒀다. 괜히 지금 가면 어정쩡해서 지구에 오래 눌러앉을 것 같았다. 그러니 당면한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하고 가는 게 낫다.

“어디로 가는 거지?”

내 물음에 하드버가 고개를 흔들며 손짓했다.

“잠자코 따라오게.”

나는 하드버와 칼리고라는 수탉 수인족과 함께 걷고 있었다. 정확히는 하드버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하드버의 본거지인 해방연합 근거지에서 한참 떨어진 북쪽으로 걷고 있는 중이었는데 도착지가 어디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설마 바로 황제랑 싸우라는 건 아니지?”

“아니네.”

“모든 일에는 준비운동이 필요해. 혹시라도 황제랑 싸우는 거면 말해줘.”

“나도 그 말에 동감하네. 그리고 준비운동은 철저히 해야지.”

어느새 하드버의 걸음이 멈췄다. 눈앞에는 절벽과 함께 남산만한 바위가 위치해 있었다.

“도착했군.”

“여기가 도착지라고? 이거 신성한 바위인가보군.”

바위를 톡톡 두들겨봐도 특별한 장치는 보이지 않는다.

“비아냥거리지 말고 기다려보게.”

뭘 하려나 싶어서 지켜보자 하드버가 바위에 손을 댔다. 그러자 바위가 푸른 빛을 뿜어냈다.

우우웅.

그리고 지진이 나더니 저 스스로 옆으로 굴러갔다.

이거 새로운 방식의 자동문인데.

바위가 몸을 비킨 곳에는 커다란 동굴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드버가 말했다.

“따라 들어오게.”

나는 하드버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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