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처음엔 이 늙은이가 특별한 장비라도 주는 줄 알았다. 동굴 깊숙이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그런 생각은 더욱 짙어졌다. 당연했다. 천외천에서 최고로 강한 황제를 없애준다는데 손에 뭐라도 쥐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내게 뭘 줄 생각일까?”
검? 아니, 검은 너무 식상하다. 게다가 나는 검술에 일가견이 없다. 은의 검술이라는 독창적인 검법을 창조해 냈지만 그 검법이 황제에게 통한다는 확신이 없었다.
검은 아무래도 무리지.
‘검이면 거절하고 다른 걸 요구해야지.’
그럼 일단 검은 패스하고. 다음으로 도? 창? 도끼···?
‘아니야. 일반적인 무기가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활이나 총 같은 원거리 무기일지도 모른다.
‘무기가 아니라 방어구일지도 모르지.’
나는 내심 방어구이길 바랬다. 드래곤에게서 받은 쫄쫄이 타이즈 같은 갑옷이 있지만 성능이 의심스러웠다. 천외천인들과의 전투로 만들어진 갑옷인 만큼 황제와의 싸움에서는 크게 영향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뚝.
동굴의 통로 끝에서 하드버가 걸음을 멈췄다.
“······.”
그가 숨결 같은 주문을 외우자 통로에서 빛의 글귀가 반짝였다. 글귀가 타오르듯이 사라지고 새로운 통로가 나타났다.
“오, 이런.”
넓은 공동이 드러나자 나는 눈을 치켜뜨고 놀랐다.
“허, 이럴 수가.”
놀란 건 나만이 아닌 모양이다. 칼리고도 입을 크게 벌리고 놀랐다.
“내가 지금까지 모은 것들일세.”
하드버가 보여준 것은 무기도, 방어구도, 어떤 마법적인 아티펙트도 아니었다. 아니, 일단 장비가 아니었다. 그저 무지막지하고 막대한 양의···.
“구슬.”
구슬이었다.
투명한 컨테이너 박스들에 담긴 구슬들을 보니 기가 찼다. 구슬이 얼마나 많은지 공동이 무척 넓어서 끝을 모르겠는데 컨테이너 박스가 한 가득이다. 더군다나 내가 서 있는 곳과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내 동공에 다 차지 않았다. 이거 미쳤군.
칼리고가 말했다.
“자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이 엄청난 양의 구슬은 대체···. 어쩐지 자체 감사 때마다 장부와 구슬의 수량이 단 한번도 맞지 않더라니···.”
목 밑의 벼슬이 부들부들 떨렸다.
“은근히 빼돌리고 있었네.”
“이건 은근히 빼돌린 정도가 아니야. 도대체 얼마나 해먹은 거지? 이 정도 품질의, 이 정도 수량의 구슬이면 차원을 몇 개나 구매하고 남을 걸세.”
칼리고가 기겁하자 하드버가 쯧하고 혀를 찼다.
“해먹었다니. 나는 황제와의 결전을 위해 구슬을 모으고 있었을 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데 이건 정도를 벗어났어.”
칼리고가 물었다.
“도대체 얼마 동안 모은 거지?”
“천년 정도.”
“천년!”
인간을 초월한 그들에게도 천년이란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닌 모양이다.
“무려 천년동안이나 구슬을 빼돌렸어!”
“너무 몰아세우지 말게. 모두 다 대업을 위해서였네. 사심은 조금도 없었어.”
하드버가 칼리고에게 변명을 하는 사이 나는 공동 안을 자세히 살폈다. 과연 구슬이 무시무시하게 많다. 이거 무식할 정도로 모았네.
멀거니 서 있는데 하드버가 다가왔다.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최소 노란색 이상의 구슬들이네.”
그는 스스로 뿌듯하다는 투로 말하며 구슬을 가리켰다.
“자네에게 주는 선물이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 구슬들을 모두 내게 주겠다고?”
“그렇네.”
지금쯤에서 어느 정도 생각은 했지만 구슬을 모두 다 줄 생각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보고 여기 있는 구슬들을 모두 흡수하라는 건가?”
“정답이네.”
그래서 기가 막혔다.
“이 정도 양의 구슬을 먹으라는 건···.”
“알고 있나 보군.”
“구슬의 부작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어.”
천외지에서 겪었던 시련의 탑을 통해서 나는 구슬의 부작용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구슬을 많이 먹으면 괴물이 된다. 자아를 잃고 구슬만 탐하는 괴물. 구슬을 많이 먹을수록 전투력이 강해지지만 종국엔 자아를 완전히 잃는다. 강한 에너지 덩어리에 지나지 않게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보고 여기 구슬들을 다 먹으라고?”
“그렇네.”
“장난하자는 건가?”
이거 미친놈인가?
“장난이 아닐세.”
“그럼 뭐야.”
“자네라면 가능할 것 같아서 부탁하는 거네.”
예상외의 대답에 목소리가 팍 꺾였다.
“부탁··· 이라고?”
“그래. 이건 황제를 처단하기 위해 모아둔 구슬. 그리고 자네는 분명 이 구슬들을 모두 흡수할 수 있을 거야.”
“왜 그렇게 나를 믿지?”
“예언에는 자네가 황제를 물리칠 거라고 했어. 그렇다면 적어도 황제를 물리치기 전엔 안 죽지 않겠나? 자네가 예언의 그 존재가 많다면···. 아니, 예언이 틀리지 않다면···.”
할 말을 잃었다.
“부디 이 구슬들을 모두 먹고 강해져서 황제를 물리쳐주게.”
* * * * * *
그때부터 구슬을 흡수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밥을 먹고 구슬을 먹고 잠을 자고 구슬을 먹고 아침에 눈을 뜨면 구슬을 먹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구슬을 먹었다.
어느 정도 구슬을 먹은 뒤에는 그저 구슬을 먹기만 해선 제대로 기운이 흡수되지 않아서 별도로 운기를 해야 했다.
시조 드래곤들을 통해서 얻은 신성한 기운들과 구슬을 흡수해서 얻은 기운들을 융합시켜야했는데 놀라운 것은 운기를 할 때마다 흡수한 구슬의 부작용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녀석의 말이 맞았군.’
하드버의 말이 맞았다.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구슬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부작용이 없었다.
나는 구슬의 부작용을 없애는 운기의 과정을 정화(淨化)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도 구슬을 흡수한 후 내력을 정화하고 있었다.
우우웅.
구슬의 기운을 흡수한 뒤 몸에서 응어리진 에너지를 신성한 기운으로 감쌌다. 응어리진 구슬의 기운은 바위처럼 단단해졌다가 이내 가루가 되고 물처럼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본신의 내력에 흡수되었다.
“후우. 지겹군. 지겨워.”
나는 운기를 끝내고 몸을 일으켰다.
‘단순히 전투력만 높아져선 안 되는데.’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구슬이 많이 남았다. 천년 동안이나 빼돌려서 모았다니 그 숫자가 얼마나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황제에게 아주 칼을 갈았구나.
그나저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모르겠다.
‘여기서 몇십일 소모했다고 또 지구의 시간이 5년이나 흐르면 곤란한데···.’
빨리 끝낼 것이라 판단하고 인사도 안 하고 왔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릴 줄 몰랐다. 갈수록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있었다.
“어험.”
그때 칼리고가 목 밑의 벼슬을 만지며 다가왔다.
“수련은 문제없이 잘 되어가고 있나?”
그는 은근히 내게 관심이 많았다.
“문제가 아주 많아.”
“그래, 엄청난 지원을 해주는데 문제가 있을 리가··· 문제가 있다고?”
“그래.”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어이, 하계의 인간. 하드버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반응 절대 용서 못 하네.”
“용서 못 한다고?”
“나는 아직 자네를 잘 못 믿겠어.”
그가 얼굴을 펴지 않고 계속 말했다.
“확실히 자네에게 구슬의 부작용이 없는 건 신기해. 하지만 말이야. 자네가 황제를 이길 인물인가 의문이란 말이지. 무엇보다 자네는 하계에서 온 반편이잖아.”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생각하나?”
그리고 살기를 살짝 흘리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무, 물론 자네가 나보다 강한 건 분명해 보이지만 말이야. 황제에 비교하면 얼마나 강할지 의문이란 소리지···.”
목 밑에 달린 닭 벼슬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나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이 수련이란 게 단순히 구슬만 먹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
“구슬만 먹어선 수련이 안 된다고?”
“그래. 제아무리 좋은 칼이 있어도 익숙하지 않으면 말짱 황이잖아.”
몸이 좋아지거나 내력이 상승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강해지기만 해서는 강해진 전투력을 백퍼센트 활용하지 못한다. 실전경험을 통해서 적응할 필요가 있다.
“으응? 그럼 더 필요한 게 있나? 무엇이든 말해보게. 준비해 줄 테니.”
나는 짧게 두 마디로 대답했다.
“대전상대. 실전경험.”
“······.”
그리고 칼리고를 삿대질하며 말했다. 하계에서 온 인간이라고 무시한 대가이자 응징이었다. 칼리고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보고 대전상대를 해달라는 건가?”
“그래.”
“왜?”
“마땅한 사람이 없잖아.”
나는 그가 손사래를 치며 거절할 줄 알았다. 그래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구슬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음. 그럼··· 좋네.”
“좋다고?”
선뜻 수락하다니. 무슨 생각일까.
“대신 나는 천외천 과학기술의 집약체인 천외장기를 사용하겠네.”
“천외장기?”
이름만 들어선 상상이 안 간다. 무슨 속셈이지.
“그게 뭐지?”
“말로 설명하기보다 눈으로 직접 보여주는 게 낫지.”
칼리고가 말을 마치고 품에서 비타민 약품통 같은 것을 꺼냈다. 약품통 위의 빨간 버튼을 누르자 연기가 치솟았고 그가 약품통을 바닥에 던지자 굉음이 났다.
쿠구구구.
잿빛 연기가 연막처럼 피어올랐다. 쳐다보니 바닥에서 육망성의 마법진이 생겨났고 연기 사이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쓸데없이 거창하다.
잠시 후 연기가 걷히자 그곳엔 5m 남짓한 크기의 대형기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메카물이 떠올랐다.
“로봇이잖아?”
“그냥 로봇이 아니네. 구슬을 녹여서 만든 천외장기이지.”
나는 황당해서 되물었다.
“구슬로 로봇을 만들었다고?”
“그렇네. 구슬을 흡수하지 않고 에너지를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하다가 나온 결과물일세. 사용할 일이 없어서 상용화되지는 못하고 시제품밖에 없지만 지금 사용하기에는 제격인 것 같군.”
로봇의 겉 색상이 보라색인 걸로 보아 보라색 구슬로 만든 모양이다.
“보라색 구슬이면 엄청난 성능이겠군.”
“부서지지도, 깨지지도 않네. 사용자의 내력을 폭발적으로 증폭해주고 모든 전투 가능성을 서포트 해주지. 엄청난 성능의 전투 병기야.”
칼리고가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다가가서 로봇의 표면을 만져보았다. 과연 틀림없는 보라색 구슬의 재질이었다.
“황제를 상대할 때 이걸 사용하면 안 되나?”
물어보고서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는데 칼리고가 고개를 흔들었다.
“황제에겐 안 통해.”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이 천외장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네.”
“치명적인 결함? 그게 뭐지?”
칼리고의 입에선 예상외의 대답이 나왔다.
“상대방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거지.”
“·········.”
그걸 말이라고 하나?
“좋은 검의 치명적인 결함이 상대방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군.”
내 비아냥에 칼리고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 천외장기는 구슬로 만들어서 기술적 한계가 명확하다네. 누구든지, 어느 부위에서든 이 천외장기에 내력을 불어넣으면 주인으로 인식하지.”
“·········.”
듣고 보니 치명적인 결함이 맞다.
“그건 좀 문제군.”
“그래서 황제에겐 사용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