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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의 귀환-120화 (120/127)

# 120

* * * * * *

황제는 권좌의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왼편의 검은 구슬을 쓰다듬으며 그는 미래를 읽고 있었다.

“······.”

빛이라곤 한 줌 들지 않는 완벽한 검은색의 구슬. 오래전 혈육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이다. 비록 완전히 자신의 힘으로 흡수하지는 못했지만 겉핥기만으로도 미래를 예견할 수 있었다.

네 예언은 틀렸어.

자신이 예상했던 모든 일들이 그대로 벌어지는 걸 보고 황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오랫동안 부재였던 자리가 차고 세상은 뒤바뀔 것이다. 혼란스러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질서가 정립될 것이다.

황제는 감았던 눈을 떴다. 읽었던 미래대로 라면 이제 그가 움직여야 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황제는 겨울처럼 새하얀 백안을 껌뻑이며 권좌에서 일어섰다. 왼손에 검은 구슬을 쥔 채 황궁을 나섰다. 그가 걸을 때마다 대지가 체온을 잃은 것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 * * * * *

순간이동이나 소환마법에 대한 개념을 배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용도 어렵지 않았다. 하드버에게 말로 설명을 몇 번 들었을 뿐인데 자유자재로 가능했다. 하드버는 내가 사용하는 걸 보고 펄쩍 놀라서 뛰더니 내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자네는 정말 엄청나군.”

“이거 되게 쉬운데.”

초등학교를 다닐 때도, 중학교를 다닐 때도,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닐 때도 단 한 번도 타고난 재능의 우월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단지 운명이 지랄 맞고 운이 미친놈 널띄기 타듯 왔다갔다 하고, 어느 누구보다 고생을 더 하고, 살려고 노력을 좀 더 했을 뿐이다.

재능이라는 건 평생 나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줄 알았다. 평생을 모르고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알겠다. 노력이 필요 없는 재능이란 200억짜리 로또 1등 당첨을 확정받고 태어난 것보다 더 좋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가능한 거야. 제대로 하려면 수많은 훈련과 노력을 해야 하네.”

“이것도 쉬운데.”

하드버는 메테오나 토네이도, 쓰나미 같은 마법은 직접 창조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차원에서 소환을 하는 형식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놀라울 만큼 상상하는 능력이 선명해서 소환하는 대신 창조를 해도 문제가 없었다.

나는 메테오 콜링 마법을 곧바로 사용했다.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마력을 그대로 불어넣어서 운석을 만들었다. 다른 차원 계에서 소환마법을 통해 부르지도 않고 직접 창조해낸 것이다.

어라, 그러면 메테오 콜링이 아니고 그냥 메테오인 건가?

“역시 자네는 틀림없는 예언의 존재야.”

나는 하늘에 만들어진 운석을 없앴다. 그리고 이번에는 적당한 곳에 소환진을 그려서 다른 차원에 있는 메테오를 이곳에 소환시켰다. 정석적으로 메테오 콜링을 사용한 것이다.

직접 운석을 만들어 낼 때와 달리 훨씬 손쉬웠다. 나는 메테오 콜링을 중간에 취소시키고 토네이도, 쓰나미 같은 마법도 시도했다. 몇 번이고 사용하고 취소하길 반복했다.

이것도 문제없이 잘 되는군.

분명 처음 해보는 건데 오랫동안 해봤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나는 손바닥을 탈탈 털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순간이동을 시도해볼 차례다.

“순간이동도 아까 그거랑 똑같다고 했지?”

“그렇다네. 소환마법과 원리는 비슷하네.”

“좋아. 한번 해보겠어.”

하드버에게 들었던 설명대로 마법을 사용했다. 먼저 가야 할 곳을 떠올린 후 그곳에 소환진을 만들었다. 순간이동은 소환마법과 달리 입구와 출구를 다르게 설정하면 된다. 소환마법이 다른 차원계에 입구를 만들어서 이쪽 차원에 배출을 하는 것이라면, 순간이동은 목적지에 출구를 만들고 이쪽에 입구를 만드는 것이다.

실패할까? 그럴 리가.

역시나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성공했다.

시야가 암전되었다가 밝아진 직후 눈을 떠보니 백두산의 천지연이 나를 반겼다. 나는 차가운 칼바람 탓에 으슬으슬한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밟았다.

“자주 사용하기엔 기분이 더럽네.”

멀미가 심하게 걸린 것처럼 머리가 팽팽 울리고 속이 매스꺼웠다. 하드버가 열어준 포탈을 통해서 움직일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때와 달리 매개체가 없기 때문인 모양이다.

나는 지구로 온 김에 바벨탑이 있던 북쪽으로 올라가서 중국인들의 마을을 관찰하고 그들이 약속을 잘 이행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한국인 마을에 도착했다.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날짜를 물어보고 내가 천외천에 간 지 반년이나 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원 간의 시차가 이렇게 무섭다.

일이 끝난 후 가족들을 만나기로 다짐하고 나는 다시 천외천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내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하드버나 칼리고가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설마 지구로 순간이동을 할 줄은 몰랐겠지.”

하드버는 순간이동의 위험성을 몇 번이고 내게 설명했다. 이동을 잘못하면 공간이 겹쳐져서 바위나 나무와 합쳐질 수 있다고. 나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눈앞에 보이는 공터 대신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지구로 순간이동 했다.

“어···.”

잠깐만. 그럼 이거 순간이동이 아니라 차원이동이 아닌가?

그렇다면 차원이동도 별거 아니었군.

나는 천외천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천외천의 위치를 떠올리고 막 이동하려는데 갑자기 코가 시큰거린다. 이게 무슨 냄새지? 순간이동을 멈추고 냄새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려보니 마음씨가 푸근해 보이는 아줌마가 식당 앞에서 그릇을 들고 토렴을 하고 있었다.

어어, 저건···!

간판을 보니 돼지국밥집이 분명했다. 나는 갑자기 시장기가 동해서 배가 고파졌다.

“갈 땐 가더라도 식사 한 끼 정도는 괜찮겠지?”

자문자답하고 국밥집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문득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가만 보니 나 돈이 없구나.”

천외천에 갈 때 지갑과 신분증을 모두 들고 갔는데 수련에 방해가 된다고 공동 어딘가에 처박아뒀다. 나는 골몰히 생각하다가 해답을 떠올렸다.

“이게 가능할까?”

스스로도 반신반의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해보자.”

우우웅.

나는 머릿속으로 금을 떠올렸고 마력을 사용해서 골드바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돈을 만들어낼까 생각했는데 디테일이나 일련번호 등의 문제 때문에 골드바로 대신하기로 했다.

양손을 포개고 마력을 내뿜었다. 상상력을 더하면서 신중을 기해서 골드바를 창조했다.

잠시 후 손바닥을 펼쳐보니 처음에 들었던 의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골드바가 말끔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10돈짜리 순금 골드바였다.

“가능할 줄은 알았는데 막상 진짜로 되니 신기하네.”

나는 골드바를 들고 근처 금은방으로 향했다. 인상이 고약해 보이는 주인아저씨가 나를 반겼는데 흉악한 인상처럼 흥정가격도 고약했다. 디테일을 생각해서 검인마크까지 만들었는데 그는 사정없이 가격을 후려쳤다. 몇 번의 흥정 끝에 150만원에 골드바를 팔기로 했다.

나는 5만원권 30장을 들고 국밥집으로 다시 향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순대국밥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여기 순대국밥 단 하나!”

아줌마가 주문을 받은 후 사라지고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시간이 점심때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주아랑의 말대로 황무지 개척 산업이 돈벌이가 쏠쏠한 모양이다. 돈이 벌리니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이지.

잠시 후 순대국밥이 나왔다. 나는 국에 새우젓을 넣고 들깨 가루를 둘둘 쳤다. 잘 섞이라고 숟가락으로 휘휘 젓고 밥을 말은 다음 한 입 크게 떠서 먹었다.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맛있네.

게 눈 감추듯이 한 그릇을 끝내고 순대 한 줄을 추가로 주문한 뒤 순대를 먹었다. 어느 정도 포만감이 가셔서 TV를 보며 세상 돌아가는 정세를 구경하는데 옆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어이, 김씨 소식 들었어?”

“뭔 소식?”

“백두산 근처에 엘프들이 있다는 거.”

노동자로 보이는 남자 세 명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박씨. 그거 당신 말고 여기 있는 사람 다 알어. 옛날 옛적 고리짝 이야기를 하고 있어.”

“아니, 내 말 좀 들어봐. 자네들 엘프가 얼마나 예쁜지 알지?”

“그럼 알지.”

“어디서 개수작이야. 최씨, 박씨 말 믿지 마. 저번에도 괴상한 소리해서 다른 사람 헛바람 들이키더니···.”

“아냐 아냐,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 참말이야. 어디서 들어보니까 엘프를 사냥하는 헌터들이 있다고 하더라구.”

내 귀가 쫑긋 섰다.

“엘프를 사냥하는 헌터?”

“그려. 자네들도 알다시피 엘프가 좀 예쁜가? 노리는 사람들이 많은 거지.”

“엘프들과의 분쟁은 협약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나? 엘프를 사냥하다니? 미친 건가? 당장 공동 구역을 빼고 그들의 영토에는 한 발자국도 못 들어갈 텐데···.”

“어허, 이 사람이 뭘 모르는구만. 우리나라 법이 어디 법인가? 암암리에 다 눈 가리고 귀 막으면서 하는 거지. 당장 검 같은 무기만 보더라도 소지 허가증이 있어야 들고 다닐 수 있는데 지키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흉흉해지고 총포, 도검, 화약류 등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이 느슨해졌다. 총포나 화약류는 단속을 하는 경우가 있어도 도검 같은 무기류의 관해서는 단속이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그래서? 자세히 좀 말해봐. 박씨.”

“몇몇 질 나쁜 헌터들이 엘프를 노리고 사냥을 한다는데 벌써 수 명의 엘프 사냥에 성공했다는군.”

“오오. 그럼 말로만 듣던 엘프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건가?”

“그렇지.”

더 듣고 있을 이유가 없다.

“잔돈은 괜찮아요.”

나는 5만원권을 던지다시피 카운터에 냈다.

“어이구, 고마워. 젊은이.”

활짝 웃는 아줌마를 뒤로하고 백두산의 서리 엘프족 마을로 날아갔다.

* * * * * *

서리 엘프족 마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몇 번 와본 곳이라 찾기 쉬웠다. 땅으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는데 엘프들이 나를 보고 소리쳤다.

“어! 인간이다!”

엘프와 인간과의 협약 탓에 엘프가 사는 곳엔 인간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다. 그들은 나를 보고 적대심을 품고 무기를 들고 왔다. 내 눈에 익은 엘프도 몇 명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를 몰랐다. 아무래도 달라진 내 피부색 때문에 나를 제대로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이거 귀찮네.

설명을 하려고 나서는데 인파가 갈라지면서 엘프 여왕 레아 세라핌이 다가왔다.

“오오. 내 오랜 벗이 왔구나.”

그녀는 어렸을 적 친하게 지내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나를 반겼다.

“이 자는 우리 종족의 은인이다. 피부색이 달라졌어도 기운으로 알 수 있어. 몇 년 전 마굴 문제를 해결해준 주은성이다.”

여왕의 말에 그제야 엘프들이 무장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여왕이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어떻게 악마들이 있던 곳에서 이곳으로 되돌아온 거지?”

그녀는 천외천을 아직도 악마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운이 좋았어. 지구로 가는 포탈을 발견했거든.”

“지구로 가는 포탈?”

“그래. 그보다 기쉬네는 어디에 있지?”

헤어지기 전, 기쉬네는 여왕의 호위기사였다. 여왕이 있으면 기쉬네도 옆에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내 물음에 여왕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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