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공동지역으로 갔어.”
“공동지역엔 왜?”
나는 알면서 되물었다.
“최근 엘프들이 사라지고 있어. 그것도 어린 엘프들만 골라서.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기쉬네를 주축으로 특수부대를 조직했어. 분명히 인간 헌터들의 짓이야.”
“왜 인간 헌터들의 짓이라고 생각하지?”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냐. 이곳으로 이주해오기 전에도 인간은 항상 우리 엘프를 노려왔어. 여기 인간도 전혀 다르지 않을 거야.”
“이번에는 아닐 수도 있잖아.”
내 말에 여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을 통해서 이미 확인 작업을 끝냈어. 인간들이 납치한 게 확실했어.”
할 말이 없다. 여왕이 이어서 말했다.
“문제는 물증이 명확한데 인간 쪽에선 대답이 없어. 분쟁 협약을 맺은 외교부 쪽에 따졌는데 그들은 계속 자기들 이관이 아니라고 하고 헌터부 쪽에 말을 하니 자기들은 모르겠다고 여전히 발뺌하고 있어.”
“우리나라 외교부나 헌터부가 그렇지.”
외교부나 헌터부뿐만 아니라 정부부처가 다 그럴 것이다.
“몇 명이나 사라졌는데?”
“저번 주 들어서 사라진 한 명을 합치면 총 다섯 명이야.”
여왕이 손가락을 펼치며 말했다. 다섯 명이면 다행히 적다. 아직 본격적으로 사냥을 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다행이군.”
“뭐가 다행이야?”
일이 커지기 전에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여왕의 물음을 무시하고 다시 질문했다.
“공동지역이 어디지?”
여왕이 말했다.
“안내해줄게.”
* * * * * *
폐가들이 즐비해서 인적이 드문 마을에 찬 바람이 휘이잉 불고 있었다. 기쉬네는 긴 머리를 뒤로 묶어서 포니테일로 만들었다. 세계수로 만든 활을 어깨에 고쳐매고 허리춤에 달린 천년 늑대의 단검을 다시 확인했다. 행여나 문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한 행동이었다. 그녀는 분대 규모의 엘프를 이끌고 인간 사내를 따라서 걷고 있었다.
“이쪽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헤헤.”
길드는 어느 곳에서나 있다. 정보 길드라면 두 말할 것도 없다. 분쟁지역에 세워진 정보 길드에 기쉬네는 서리 엘프족을 대표해서 의뢰를 했고 오늘 그 결과를 받아보는 중이었다.
본래 직접 특수부대를 움직여서 배후를 추적했는데 진척이 없었다. 예상보다 훨씬 큰 놈들이 개입된 탓이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하지만 불가피하게 인간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엘프라는 건 정말 아름다운 종족이군요.”
사내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파리처럼 슥슥 비볐다.
인간들이란···.
기쉬네는 혐오스러운 시선을 거두고 사내의 발길을 재촉했다.
“잔만 말고 빨리 안내해.”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사내가 으슥한 골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입니다.”
그는 골목길로 가서 별안간 멀쩡한 담 앞에 섰다. 왜 멈춰 섰을까 의문스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을때 그가 벽돌 중 특정한 벽돌을 문지르듯이 만졌다. 그러자 끌리는 소리가 나면서 담벼락이 회전문처럼 돌아갔다. 기쉬네가 말했다.
“숨겨진 곳이군.”
“그렇습니다. 헤헤.”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
“저희 정보 길드의 정보망은 최고지요. 그래서 놈들의 근거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기쉬네는 사내의 표정을 살폈다. 반질반질 개기름이 낀 모습이 믿음이라곤 전혀 들지 않는 얼굴이다. 이런 놈을 믿느니 지나가는 오크를 믿는 게 낫겠어.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기쉬네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쪽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헤헤.”
의심스러웠지만 심증만 있을 뿐이다. 기쉬네는 정령을 꺼내서 흔적을 추적해보려다가 관뒀다.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 섣불리 상대를 불신하면 상대도 자신을 불신할 것이다. 그러니 확정이 되지 않는 일에 굳이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믿을 만한 인간도 있어.
기쉬네는 자신과 뜨거운 밤을 보냈던 주은성을 떠올렸다. 첫 만남은 별로였지만 알면 알수록 괜찮은 인간이었고 자신들과의 약속도 지켰다.
사내가 숨겨진 곳에 앞장서자 기쉬네를 선두로 엘프들이 따라서 걸어갔다. 폭이 좁은 계단이 있었고 군데군데 횃불이 퀴퀴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엘프가 모두 들어오자 문의 입구가 소리를 내면서 저절로 닫혔다.
기쉬네의 부하 중 한 명이 기쉬네의 귀에 대고 말했다.
“불길합니다. 기쉬네님.”
“새삼 지금 와서 불길할 것도 없어.”
“들어온 직후부터 정령의 기운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그녀는 부하가 말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곳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 놀라울 정도로 정령의 기운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기쉬네가 군말 없이 사내를 따라가는 건 이곳에서 동족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곳에 있어.’
기쉬네는 어깨의 활과 허리춤의 단검을 매만졌다. 정령이 없어도 활과 검이 있다. 엘프의 궁술과 단검술은 인간 헌터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거의 다 왔습니다.”
계단 끝에는 녹슨 쇠문이 있었다. 사내가 쇠문을 열자 긴 복도가 드러났다. 사내는 복도 끝으로 걸어갔고 엘프들도 뒤따라서 걸었다. 엘프들이 모두 들어오자 이번에는 입구의 녹슨 쇠문이 저절로 닫혔다. 사내는 괜히 무안해서 한마디 했다.
“본래 보안에 힘쓰는 곳입니다. 질 나쁜 손님들도 있다 보니 불가피하게 자동문을 쓰고 있습니다. 헤헤. 이해해주시길.”
기쉬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복도 끝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동그란 원형의 공간이 나타났고, 턱을 세 겹으로 나누고 있는 살찐 덩치가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는 게 보였다. 덩치는 사내를 보고 의자에서 일어나 말했다.
“강일수. 많이 늦었군.”
“아냐. 늦지 않게 제대로 왔어. 이거한.”
강일수가 선두에서 비키자 이거한이 기쉬네와 엘프들을 살폈다.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허허. 많이도 오셨군.”
“긴말 필요 없다, 인간. 용건만 말하지.”
“성격이 그렇게 급해서야 원. 인간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겠소.”
“우리 엘프족은 인간 사회에 적응할 생각 없어.”
“흠흠. 어쨌든 자리에 앉으시죠.”
이거한이 앉자 기쉬네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둘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기쉬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엘프족들을 찾았다면서? 어디에 있지?”
“사전에 의뢰를 해주신 대로 모두 찾았습니다. 그 탓에 우리 측도 피해가 컸습니다. 생각보다 놈들의 배후가 상당히 커서···. 그런 이유로 대금을 좀 더 받았으면 싶은데···.”
“일단 우리 일족이 무사한지 보여줘.”
기쉬네의 말에 이거한이 책상에 있는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했고 곧 뒤편 공간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수감자를 감시하는 교도관들처럼 엘프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엘프들의 눈에는 안대가, 귀에는 귀마개가,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심지어 수갑에 쇠줄이 길게 이어져서 굴비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걸 보고 기쉬네가 분노해서 소리쳤다.
“감히! 우리 서리 엘프족을 저렇게 대우해!”
이거한이 말했다.
“워워, 진정하시오. 저들을 구출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경향이 없었소. 저기 고고한 엘프분들이 우리를 워낙 천하게 보고 못 믿어서 접근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그렇다고 저런 대우를!”
“우리 쪽 사정도 이해해주시오.”
기쉬네는 눈짓으로 부하에게 명령했고 부하들이 굴비처럼 엮어진 엘프들에게 다가갔다. 포박을 풀어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엘프들은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교도관처럼 엘프들을 데리고 있던 남자들이 그들을 막아선 까닭이다.
이거한이 말했다.
“거래를 모두 끝낸 다음 데리고 가시지요.”
“감히!”
“그게 공평한 겁니다. 당신의 요청에 따라서 나는 당신 부족들이 무사한 것을 보여줬고 이제 당신 차례지요. 지불할 대금이 충분한지 보여주시오.”
분노를 삭인 기쉬네가 부하 엘프에게 눈짓으로 명령했다. 그러자 부하 엘프가 커다란 자루를 책상 위에 올렸다.
툭.
자루의 입구에 묶어놨던 매듭이 느슨하게 풀리면서 수십 개의 금화가 책상에 쏟아져 내렸다. 이거한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오오, 금화. 확인하겠습니다.”
“문제없어. 100골드야. 너희들의 계산법에 따르면 최소 5천만 원은 할 것이다. 엘프 금화의 가치나 세공기술을 알아보는 자들이 있다면 두 배나 세 배는 더 받을 것이고.”
금은 차고 넘친다. 금으로 일을 해결한다면 차라리 더 낫다. 당분간 어린 엘프들의 분쟁지역 출입을 금지하면서 폐쇄적으로 인간들과 교역을 하면 이번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거한이 말했다.
“음··· 이거 대금이 부족하군요.”
“대금이 부족하다고?”
뜬금없었다.
“예.”
“얼마나 더 필요하다는 거지? 이해할 수 없군. 너희들이 본래 요구한 금액이 많다.”
“흐음···.”
“처음에 우리가 의뢰를 했을 때 당신들이 요구한 금액이 맞다. 가치를 따지면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는 걸 모르는 건가?”
기쉬네가 이를 바득 갈자 이거한이 웃으며 말했다.
“욕심이 아니고 당연한 거죠.”
“당연하다고?”
“엘프들의 숫자가 늘어났는데 대금을 더 주셔야죠.”
“그게 무슨 뜻이지?”
그 순간 이거한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번개처럼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교도관처럼 서 있던 사내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무기를 뽑아들고 엘프들을 원형으로 둘러싸서 포위했다.
“이런 비겁한···!”
뒤늦게 깨달은 기쉬네가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새하얀 목을 이거한의 날카로운 검이 위협적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이런 게 전략이라는 거요. 융통성 없는 귀잽이들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당신들 대금으로는 수지타산이 안 맞았어. 우리가 엘프를 잡으려고 얼마나 돈을 썼는지 아나?”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인간이 왜 엘프를 가만히 놔두고 협력을 맺었을 것 같아? 당신들이 겁이 나서 그런 줄 알아? 당신들 엘프도 따지고 보면 우리 헌터들에겐 몬스터나 다를 바 없어.”
그는 과거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법이란 게 말이야, 참 지랄 맞단 말이야. 그래서 인권단체를 꼬드기는데 3년을 쓰고 위쪽에 줄을 대는데 또 2년을 썼어. 그러면서 돈을 어마어마하게 썼고. 그런데 당신들이 준다는 푼돈으로 수지타산이 맞을 것 같아?”
그는 전투자세를 갖춘 엘프들을 보고 소리쳤다.
“너희들 대장이 죽는 꼴을 보고 싶어! 당장 무장해제하고 꿇어!”
엘프들이 동요했다.
그때 돌연 한쪽 벽이 부서지면서 검은 피부의 사내가 나타났다.
* * * * * *
“누구냐!”
바로 나였다.
“누군지 알면 뭐가 달라져.”
상황이 급해 보여서 주먹이 먼저 나갔다. 내 주먹이 기쉬네의 맞은편에 검을 들고 있는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뻐억.
살짝 쳤을 뿐인데 녀석의 머리가 사라졌다. 아직도 힘 조절이 불안전한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하드버가 준 구슬을 먹고 계속 전투력이 증가하니 힘의 조절이 익숙해지기 어렵다.
“이러면 곤란한데.”
내 중얼거림에 기쉬네가 반응해서 소리쳤다.
“너, 너는 주은성!”
“오랜만이야.”
“피, 피부가 왜 그래?”
기쉬네가 놀라서 물었다. 하나같이 비슷한 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