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훅.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목을 노리고 장검이 쇄도해왔다. 나는 검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줬다. 사람에게 칼을 휘두르는데 거리낌이 없는 걸로 봐서 지금까지 사람 좀 많이 죽여봤을 것 같다.
파지직.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내 몸에 맞은 칼이 유리파편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나를 공격한 헌터가 입을 크게 버리고 놀랐다.
“금강불괴!”
“놀랐냐?”
칼을 부순 걸 보고 금강불괴라니 무협지를 좀 많이 본 모양이다.
“짜식이. 사람한테 칼을 쓰는데 거리낌이 없네.”
나는 헌터의 얼굴을 쥐고 단숨에 던져버렸다. 그는 야구공처럼 직선으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콰과광.
폭발음이 나고 벽의 내장재가 모래성처럼 부서져 내렸다.
“이런 씨발! 괴물이다!”
비쩍 골아서 약해 보이는 짧은 머리의 헌터가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헌터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겁먹지 마. 놈은 혼자다. 당장 공격해!”
지남철이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헌터들이 동요를 감추고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나를 둘러쌌다. 일사불란하게 진열을 갖추는 걸 보니 평소에 훈련을 많이 한 모양이다.
“끝까지 해보자 이거지?”
스트레스 좀 풀까? 그냥 끝낼까?
그 순간 사방에서 검이 엄습해왔다. 방금 전 검날이 부서지는 걸 보고도 또 검을 쓰다니. 우습게 생각하는데 검끝에서 오러가 뿜어져 나온다. 우와, 이것들 봐라. 빨강, 주황, 노랑, 초록··· 오러 색깔이 휘황찬란하다.
“무지개냐? 내력 성분이 다양하네.”
나는 몸을 굴려서 가볍게 피하고 탄지공으로 대꾸해줬다. 일반 버전이 아닌 업그레이드 된 버전으로 투명한 내력을 날리자 탄지공이 총알처럼 날아가 놈들의 몸을 꿰뚫었다.
“으악!”
“커억!”
“캬악!”
“쿠억!”
“커헉!”
비명이 오케스트라처럼 울리고 핏줄기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보이지 않는 탄지공에 헌터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다섯 명을 일시에 전투불능으로 만들고 숨 좀 돌릴까 하는데 복도에서 새로운 인원들이 다시 들어왔다. 디펜스 게임이냐? 잡자마자 또 나오게. 헌터관리부의 차관직책이란 생각보다 힘이 강한 모양이다.
“경호원이 대통령 경호원 뺨치네.”
새로 들어온 헌터들은 처음 들어온 헌터들과 많이 달랐다. 두 번째로 들어온 그룹은 검이 아닌 채찍과 그물을 위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살인전담과 포박전담이 그룹별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았다.
흠, 전략적이구만.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놈은 당장에 죽이고, 그게 힘들거나 불가능하면 예비부대가 투입돼서 포박 위주로 움직임을 봉쇄한 후 사냥을 하는 듯했다. 짜임새가 잘 맞춰진 그룹이다.
휘익.
가장 먼저 눈이 작아서 얍삽하게 생긴 헌터가 내게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이 뱀처럼 내 몸을 노리고 날아왔다.
휘리릭.
내 팔목이 채찍에 휘감기자 그물을 들고 있는 헌터들이 어망을 던지듯 그물을 던졌다. 호텔 방은 넓었는데 사람이 많아서 공간이 협소하게 느껴졌다. 피하지 않으니 그물이 내 몸을 집어삼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행동이 철두철미한데.
놈들은 기세를 몰아 그물에 오러를 실었고 오러를 머금은 그물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가만히 놔두면 내 옷을 다 찢어발길 기세다.
“죽어라! 괴물!”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훅.
나는 내력을 거친 콧김처럼 단숨에 뿜어내서 내 몸을 에워싼 그물들을 일시에 해치웠다. 내공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1푼의 정도의 작은 양만 사용해도 무리가 없었다.
오러가 실린 그물을 잡고 내력을 그물에 실어 넣자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그물에 스파크가 일어났다.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물을 쥐고 있던 헌터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게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내력이 역류하자 내가 주입한 내력을 버티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빠진 것이다.
“좀 더 버틸 줄 알았는데 역시 고만고만하네.”
그때까지도 채찍을 든 헌터들은 나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찰싹. 찰싹.
나는 내 사지를 휘감고 있거나 내려치는 채찍들을 도리어 낚아채서 놈들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남은 놈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박살낸 후 둘러봤다. 시뻘건 피들이 사방을 난잡하게 어지르고 있고 더 이상 덤비는 놈이 없었다. 오로지 지남철 혼자서 순둥이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 어···.”
그가 떠듬떠듬 놀랄 때 마력의 파장으로 주변을 읽어보니 더 이상 충원되는 인원이 없다. 아무래도 차관의 경호는 주 그룹과 예비 그룹으로 2개 그룹만 운영되는 모양이다.
끝이네.
나는 손을 탈탈 털고 지남철에게로 다가갔다. 오랜만에 몸을 좀 풀었지만 역시나 싱거운 승부였다. 짜식이 되도 않는 발악을 하고 말이야.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지남철은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괴, 괴물···.”
“괴물이 아니고 사람이야.”
“괴물 검둥이···.”
“이 새끼가 인종차별 발언을 하네.”
퍽.
발로 차려다가 그 대신 내력의 구체를 날려서 놈의 팔을 때렸다. 쉽게 죽일 순 없어서 내력을 적당히 실은 후 때렸는데 놈의 팔이 기형적인 방향으로 꺾였다.
“갸아악!”
되게 약하네.
“헌터부 차관이면서 왜 이리 허약해? 그거 맞았다고 팔이 부러지냐?”
“끄윽, 끄으윽···.”
“헌터부 차관이면서 몸은 일반 헌터보다 못해. 낙하산인가보네.”
아니면 진급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대개 우리나라의 고위직은 현장경험은 전혀 따지지 않고 인사권자에게 빌붙은 순서로 진급을 결정하니까. 어··· 가만 보니 이게 낙하산을 말하는 건가?
지남철이 죽기 직전의 늙은 강아지처럼 헥헥거렸다. 굳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불쌍해 보이려고 애썼다. 그는 맨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거듭 말했다.
“사, 살려줘.”
그리고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살려줘. 죽기 싫어. 살고 싶어.”
“싫어.”
“날 살려만 주면 다 줄게.”
“다 준다고? 뭘 줄 수 있는데?”
“원하는 건 모두 다 줄 수 있어. 농담이 아냐.”
“구체적으로 말해봐.”
내 말에 녀석은 침을 튀기며 구질구질하게 설명했다.
“내, 내가 손가락 하나만··· 아니, 내가 말 한마디만 하면 뭐든지 다 얻을 수 있어. 그 구하기 힘들다는 드래곤 하트···? 혹은 드래곤의 뼈? 아니면 전설의 영약으로 불리는 만드라고라? 다 가질 수 있어. 다 너한테 줄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제발···.”
그는 삶의 욕망을 토해내면서 내 얼굴 표정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가만 보니 눈칫밥으로 차관자리까지 진급한 것 같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나, 나 헌터부 차관 지남철이야!”
지남철은 자신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리고 내 표정을 살폈는데 내 얼굴에서 감정의 동요가 전혀 보이지 않자 크게 실망하면서 덧붙였다.
“너, 너를 고용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네 의뢰인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있어. 그럴 능력이 있어. 네 의뢰인에게 받은 돈의 10배를 주지. 아니, 20배··· 아냐, 30배도 줄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제발···.”
그는 아직도 내가 암살자로 고용된 줄 아는 모양이다.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이 녀석을 지금 죽여봤자 죗값을 못 받는다. 하지만 살려두기는 영 꺼림칙하다.
“좋아. 이렇게 하자.”
“어떻게?”
“네 목숨을 가져가지.”
“제발. 내가 죽으면 큰일 나···. 내가 사라지면 혼란이 올 거야. 나는 헌터부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어.”
“네가 하는 일이 뭔데?”
내 물음에 지남철이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가끔 감투가 높아지면 자의식이 강해져서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 된 줄 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정작 일을 하는 건 밑에 있는 실무자들이고 위에 있는 놈들은 없어도 문제가 없고 상관없다. 당장 헌터와 무관한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해도 처음만 삐그덕댈뿐이지 금방 적응하고 순탄하게 흘러갈 것이다.
“나, 나는 몬스터들로부터 자국민을 지키고 평화를 위해서···.”
“웃기는 소리하네.”
개소리를 더 들어줄 이유가 없다. 나는 놈의 머리를 잡고 시계방향으로 돌렸다. 녀석의 몸이 쓰러지자 살아있는 헌터 한 명을 깨워서 내 말을 전했다.
“또 이상한 짓 하면 오늘처럼 신벌이 있을 것이라고 전해.”
이 정도면 알아먹겠지. 나는 당부를 끝으로 호텔 방을 나섰다.
* * * * * *
나는 서리 엘프족 마을로 돌아와서 시간을 죽였다. 여왕에게 사건의 결과를 말해주니 여왕은 통쾌해하면서 좋아했다.
보답으로 제공받은 숙소에서 숙박을 하고 엘프족 마을에 눌러 살면서 기쉬네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고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와 몸을 섞다가 뒤늦게 아이의 존재가 떠올라서 물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했다. 다른 엘프족의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을 내가 착각했던 모양이다.
그날도 우리는 격정적으로 몸을 섞었고 여덟 차례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휴전 선언을 했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기쉬네가 말했다.
“이제 일이 모두 끝난 거야?”
“아직 안 끝났어.”
“언제 끝나? 끝나면 나랑 같이 평생 여기서 살자.”
하트가 깨알처럼 쏟아질 것 같은 저 달콤한 눈빛이 무섭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이 여자랑 평생 같이 살 수 있을까?
일단 외모는 나쁘지 않다. 아니, 매우 좋다.
특히 몸매가 발군인데 피부는 새하얗고 가슴은 크고 허리는 잘록하며 골반과 엉덩이는 적당히 커서 손으로 만지는 맛이 있다. 게다가 엘프라서 그런지 피부의 촉감이 아기 피부처럼 부드럽다. 솔직히 말해서 환상적이다.
하지만 버틸 수 있을까?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3일 동안 마을에 눌러 살았는데 하루 평균 10번 정도 몸을 섞었다. 일반적인 남자였다면 가지가 시들다 못해 썩어버렸을 것이다. 나 정도 되니까 버틴 거지.
“······.”
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 잠시 후 하반신에 이상한 감각이 들어서 눈을 떠보니 기쉬네가 또 내 가지를 만지고 있다.
“나는 준비됐어.”
준비됐다니? 뭐가 준비돼?
“······.”
마르지 않는 저 성욕의 샘은 도대체 어디서 솟구치는 걸까. 나는 소름이 돋아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대로 밖으로 나와서 밤하늘을 쳐다보니 달빛이 밝다.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 하드버와 칼리고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어.
아니, 진짜로 오래 자리를 비웠나?
“······.”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시공간의 차이로 대략 이쪽 시간의 9일이 천외천의 하루 같은데 그러면 아직 하루도 안 지난 것이다.
“그래도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안 좋겠지.”
나는 힐끗 기쉬네가 기다리고 있는 집안을 쳐다보고 시선을 거둬들였다. 아직 행복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일을 모두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나는 지구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상상을 하면서 차원이동을 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