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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의 귀환-124화 (124/127)

# 124

기다리고 있다가, 대책 없이 미루고 있다가 기회는 달아난다. 황제는 검은색 구슬을 계속 살폈다. 그의 흔적이니 때가 되면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인내심을 발휘하는 건 쉬웠다. 기다리고 있는 건 익숙했다. 억겁의 시간동안 그는 오직 목적을 위해서 살아왔고 목적을 위해서 시간을 죽였다. 그의 영혼은 기다리는 것을 과정이라고 생각했고 담금질이라고 생각했다. 결과를 위해서 당연히 있어야 할 과정이라고 여겼다.

그가 처음 눈을 떴을 때 과거와 현재는 삼켰지만 미래는 삼키지 못했다. 그래서 불확실했다. 과거와 현재를 토대로 예측은 할 수 있어도 미래를 정확하게 말할 순 없었다. 황제는 불확실한 게 싫었다. 모든 걸 제대로 정립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면 산의 정상이 보이는 것처럼 능력이 있는 존재는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평선 너머의 풍경처럼 멀리 떨어질수록 혹은 장애물이 있어서 앞이 가려져 있어도 능력만 있다면 그것 또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신에게 빌었다. 영성을 얻은 미물들이 대개 기도하듯 그 또한 신에게 자신의 소망을 토해내듯이 기도했다.

믿음은 이뤄지지 않았고 간절한 소망은 원망으로 바뀌었다. 황제가 신의 부재를 알아챈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황제는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무작위성을 위해서 같은 걸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현재의 세상은 공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좀 더 단순하게 가야 한다. 넓은 공간을 하나로 합쳐야 한다. 다양한 여러 존재보다는 우수한 단일의 존재가 낫다.

그래서 하늘 위의 하늘을 만들고 구슬을 모았다.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에너지를 모았다. 그는 자신의 가치관으로 정해지는 단일한 미래가 예측할 수 없는 무수한 혼돈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 미래를 삼킨 자신의 다음 존재가 파멸을 예고했으나 그것은 잘못된 예견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결과를 보는 일만 남았다. 책을 집어서 페이지를 하나 넘기는 정도의 수고스러움만 기다리면 된다. 억겁을 기다린 그에게 그 정도의 수고스러움은 무엇보다 쉽고 어느 것 보다 단순한 일이다.

반짝.

그때 검은색 구슬에 빛이 일었다. 황제는 드디어 때가 도래했음을 알고 구슬을 삼켰다.

* * * * * *

흔히 말하길,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늦었다는 말이 있다. 반대로, 나는 늦지 않아서 아직 괜찮다고 생각했다.

시공간의 차이로 대략 지구의 9일이 천외천의 하루라고 판단했고 내가 사라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천외천에 도착해보니 예상과 많이 달랐다.

“자네 도대체 어딜 갔다 온 건가?”

하드버가 노발대발하며 펄쩍 뛰었다.

“지구에 다녀왔어.”

“지구? 자네의 고향을 말하는 건가?”

“그래. 차원이동을 하고 왔어. 처음 해봤는데 한 번에 성공하더라고.”

내 말에 그가 피로에 찌든 한숨을 토했다.

“맙소사. 디바이스의 도움 없이 차원이동을 했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한···.”

그러더니 놀라는 것도 지쳤는지 헐헐거린다.

“자네가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어. 죽은 줄 알았다고!”

“죽긴 누가 죽어. 예언의 사람은 안 죽는다며.”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사라져 있으면 누구라도 죽었다고 생각했을 거야.”

“오랫동안 사라져 있었다고? 내가 사라진 지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하드버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3일.”

그의 말에 내가 놀랐다.

“반나절도 아니고 하루도 아니고 3일이라고?”

“그래.”

“어라,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예전 하드버의 디바이스로 지구로 갔다가 돌아왔을 때 시공간의 차이는 명확했다. 천외천의 시간이 지구보다 훨씬 느리게 흘렀다. 그러니 지금의 시간 차이는 말이 안 된다. 하드버가 말했다.

“지구에서 며칠 동안 있었지?”

“3, 4일 정도···.”

그는 내 말을 듣더니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지구는 하계에 속한 차원이야. 여긴 천외천이고···. 둘 사이에 시간 차이가 거의 없다는 건 아무래도 중간에 속한 차원들이 없어지고 있는 것 같군. 황제가 정복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 같아.”

“무슨 소리지?”

“천외천과 네 고향 지구 사이에는 무수한 차원들이 존재했어. 그래서 그 거리만큼 시간의 차이가 났지. 중간에 속한 차원들이 사라지니 천외천과 지구의 사이가 가까워고 그만큼 시간이 비슷해진 거야. 거리가 가까울수록 시간이 비슷하게 흐르거든.”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요컨대 시간이 없다는 거지?”

“그런 셈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더 빨리 강해져야겠군.”

* * * * * *

미래는 알 수 없다.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절망은 예고가 없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날의 하늘은 우중충했다. 잿빛이었다. 죽은 것 같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지상의 모든 것들이 빗물에 잠기고 있었다. 천외천에서 지내는 동안 보기 드문 폭우였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틈은 없었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수련을 해야만 했다.

“구슬은 먹어도 먹어도 줄질 않아.”

빌어먹을. 그래도 많이 흡수했다. 그만큼 많이 강해졌다. 이제 황제를 상대해도 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감이 넘친다.

쿠구궁.

밖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얼핏 뭔가가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비가 많이 내려서 산이 무너져내렸나 그렇게 생각했다. 공동을 나올 때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서 하드버와 칼리고를 찾는데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다. 음침하고 음습한 기운이 뱀처럼 내 전신을 훑는데 온몸이 욱신거리고 뒷골이 선득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불길한 기운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이 음습한 기운의 근원지인 하늘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언제 있었을지 모를 평범한 외모의 사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부가 백지장처럼 창백하고 놀라울 정도로 핏기가 없는 사내였다. 그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나는 시체가 하늘을 떠다니고 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누구지? 누굴까.

범상치 않은 마력의 기운에 멀거니 서 있는데 멀리서 하드버가 보였다. 그는 나를 보고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

무슨 소리지? 빗소리에 잠겨서 들리지 않았다. 아니, 빗소리가 아니다. 빗소리에 잠겨서 말이 안 들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는 어떤 장막이 우리 사이를 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역시 음습하고 음침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드버의 근처에 있던 칼리고가 하드버를 잡았고 잠시 후 둘은 포탈을 타고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 걸까? 예전에 나를 지구로 이동시켰던 순간이동 디바이스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왜 나를 버리고 가는 거지?

좀비같이 생긴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나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다. 나는 이쯤에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내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파악하고야 말았다. 내게 남은 마지막 시련인 것이다.

“황제··· 구나.”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올 줄 몰랐다. 그는 내가 있는 곳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왜 기다려 준거지. 소년만화에서 흔히 나오는 변태 같은 악당인가. 아니면 그냥 변태인 건가. 어쩌면 하드버와 칼리고가 자신들의 빌미로 황제에게 나를 팔아치운 걸까.

머릿속에서 수많은 가정들이 오갔다.

섬뜩한 침묵이 내려앉았고 적막함이 주변의 공기를 메웠다. 빗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귓가를 두들겼다.

내가 먼저 나설까? 아니면 기다릴까? 옛말에도 선빵 필승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먼저 나서는 게 좋지 않을까?

황제가 사라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어, 어···!”

어디로 사라졌는지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이 새끼 어디 갔어.

눈을 감았다뜨니 황제가 귀신처럼 내 앞에 나타나 있었다. 헉. 나는 다급히 오러를 실어서 주먹을 날렸다.

휙.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이 틀렸다. 내 주먹이 녀석의 얼굴에 직격 했다. 오러를 실어서 때렸음에도 단단한 바위를 때린 것처럼 내 손등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금강불괴란 이런 놈을 말하는 모양이다.

“크흐흐.”

“왜 웃어.”

황제는 미친 사람처럼 실소를 하더니 두 손바닥을 올리고 합장을 했다. 그러자 땅이 갈라지고 그 속에서 수백 마리의 거대한 뱀들이 솟아올랐다. 자세히 보니 뱀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칡덩굴들이다.

파앗.

나는 덩굴들을 피해서 뛰어올랐고 오러를 끓어 올려서 몸을 휘감는 칡덩굴들을 끓는 물처럼 증발시켰다. 손끝에 내력을 실어서 탄지공을 수십 발 장전하고 무차별적으로 날리니 유도 미사일이 멀리 퍼졌다가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는 것처럼 수십 발의 탄지공이 황제의 몸 위에 직격 했다.

퍼버버벅.

폭발음이 나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나는 녀석이 유효한 타격을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적어도 작은 생채기는 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과 달리 창백한 피부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음침한 마력이 넘실거리는 걸로 봐선 찰나의 순간에 마력을 이용해서 몸을 방어한 것 같았다.

“생긴 건 시체처럼 생겨서 되게 민첩하네.”

내 말에 황제가 웃었다. 뭐지?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뭔가 섬뜩한 웃음이다. 진짜 변태 같네. 그 기묘한 웃음의 저의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욱씬.

돌연 내 왼쪽 발목이 시큰거렸다. 뭐지? 마취를 당했을 때처럼 발아래의 감각이 사라지는 섬찟한 상실감이다. 내가 고개를 굽혀서 다급히 확인해보니 왼쪽 발목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어, 어, 어··· 내 발목이···.”

도대체 언제 공격한 걸까. 나는 기가 막혀서 떠듬떠듬 놀랐다. 내 왼쪽 발목이 사라졌다. 발목이 있어야 할 자리엔 근육과 뼈가 훤히 드러난 채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마력의 파장을 읽어야겠어.

장애인이 되었다는 상실감은 들지 않았다. 발목의 고통보다 놀라운 감정이 더 강했다. 이 녀석은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나는 마력의 파장을 집중하면서 녀석의 공격을 읽기로 했다. 자칫 공격에 나섰다간 도리어 반격을 당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녀석의 공격을 읽어서 반격을 하는 게 낫다.

황제가 다시 합장을 했다. 또 땅에서 칡덩굴이 나오나? 다급히 땅을 확인하는데 변화가 없다. 이번에는 하늘이 갈라졌다. 폭우를 쏟아내던 먹구름이 일시에 걷히고 그 속에서 천사의 속살 같은 햇살이 쏟아졌다. 순간적으로 눈이 부셔서 눈을 게슴츠레 떴는데 코앞에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빠직.

부처님의 손처럼 거대한 손바닥이 내 몸을 짓눌렀다. 나는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고통에 피를 울컥 토해냈다.

“커헉.”

사혈을 토해낸 것처럼 토해낸 피가 새까맣다. 몸을 짓누르던 손바닥의 압력이 더 강해졌다. 내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쿨럭, 쿨럭.”

망할. 녀석은 내 몸을 납작하게 찌부러뜨리려는 것 같다. 이런 개죽음이 있나.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나는 내 몸이 빈대떡처럼 되기 전에 오러를 끌어올렸다. 평생 이렇게 써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오러를 끌어 올리자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서 나를 짓누르던 돌주먹이 파편이 되어 부서졌다.

몸을 회복해야 해.

공격에서 벗어났지만 몸은 만신창이였다. 사라진 왼쪽 발목부터 성한 곳이 한 곳도 없다.

회복할 수 있을까?

나는 엉거주춤하게 서서 마력을 사용하는 상상을 했다. 신성한 기운으로 뭔가를 창조할 수 있다면 몸을 회복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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