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팔이 재생되지 않았다.
“······.”
그 대신 오러가 생겼다. 팔처럼 생긴 오러가.
“···미쳤군.”
어깨 아래의 팔, 팔꿈치부터 손목, 손바닥, 손가락 다섯 개까지 완벽한 팔이 생겨났다. 순수한 오러로 빛이 번쩍번쩍한 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 순간 황제가 오러 대검을 휘둘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오러 팔을 들어서 막았다. 내 예상이 맞았다. 황제의 오러 대검이 내 팔에 흡수됐다. 물로 물을 벨 수 없는 것처럼 황제의 오러가 저항도 없이 내 팔에 삼켜졌다.
이거 쩌는데.
멈칫 굳은 황제를 보고 생각했다.
흡수한 오러를 내가 사용할 수도 있을까?
희망을 품고 움직여보니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한 모양이다. 분명 같은 기운인데 섞이지 않았다. 바닷물과 민물처럼 구분되는 성질에 조금이나마 차이가 있는 걸까? 섞이지 않으니 사용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털어버려야겠어.
나는 흡수한 황제의 오러를 그대로 방출했다. 사용도 안 되는 기운을 가지고 있으면 공간낭비다. 도리어 내력을 컨트롤 하는데 정신력만 더 소모된다.
그때부터 황제의 오러를 흡수하면서 공격했다. 전투가 한결 수월해졌다. 나는 부처님 손 같은 거대한 손을 소환해서 황제를 후려갈기고 오러를 휘두르고 사출하면서 싸웠다. 내 팔에 맞은 황제가 야구방망이에 맞은 야구공처럼 멀리 날아가서 바위에 처박혔다.
콰과광.
바위가 무너지고 황제가 돌무더기에 깔렸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다시 근접했다. 오러로 만들어진 팔을 칼처럼 날카롭게 변형시키고 공격했다. 순수한 오러로 만들어진 검은 몸을 통해 사출해서 만든 오러보다 강력했다.
서걱.
잘려지는 소리가 나고 황제의 오른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순수한 오러는 말도 안 되게 강력했다.
이길 수 있겠어.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자신감이 훅 솟구쳤다. 나는 황제가 몸을 재생할 때마다 검으로 그의 몸을 조각냈고 그가 도망칠 때마다 순간이동으로 접근했다.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황제는 나와 달리 상처받은 몸을 오러로 재생시키지 못했다. 이후로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이 계속됐다.
자르고 자르고 또 자르고 계속 자르고 쉼 없이 잘랐다.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두르고 계속 휘두르고 쉼 없이 휘둘렀다.
나는 황제를 자르고 휘두르고 가르고 박살 냈다. 울음 같은 숨을 토해내며 녀석의 몸을 계속 토막 냈다.
황제는 저항하지 않았고 반격을 하지도 않았다. 웃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으며 여전히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처럼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지옥의 무저갱에 사는 악마보다 더 괴기스러웠다.
거대한 파도에 삼켜져서 헛손질을 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정신이 지배돼서 어느 순간 녀석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 같았다. 검을 휘두르는 매 순간순간마다 함정이 아닐까 하는 선득한 의심이 뒤통수를 아프게 찔렀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믿었다. 내 선택을 믿었다. 끝없이 몸을 회복하는 녀석의 내력에 대항해서 오러를 끊임없이 휘둘렀다.
서걱.
한껏 타오르는 오러의 검이 황제의 몸을 난자했다. 나는 생각하길 포기하고 무아지경으로 오러 검을 휘둘렀다. 서걱서걱서걱서걱··· 헐떡이는 내 숨소리보다 몸을 자르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귀신이 들린 사람처럼,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녀석의 몸을 무작정 갈랐다. 피가 튀고 뼈가 갈리고 황제의 힘줄과 근육이 사방을 수놓았다. 그때마다 핏물과 핏줄이 춤을 추며 녀석의 몸을 급속도로 회복시켰다. 그것은 정교한 바느질이 누더기 인형을 기우는 것 같은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세상이 어둠에 잠기고 빛에 깨어나길 반복했다. 낮과 밤이 계속 바뀌었다. 폭우에 삼켜져서 물살에 떠다니던 내 의식도 어느샌가 깨어났다. 나는 여전히 괴기스러운 황제의 모습을 보고 의지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개새끼. 존나 안 죽네.
투박했지만 순수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쯤 하면 죽었어야 옳다. 녀석은 내력에 끝이 없는 걸까? 그래서 몸이 잘릴 때마다 몸을 회복하는 걸까.
괴물 같은 자식···.
이런 놈은 생전 처음이다. 불사신이라니···.
결국 내가 포기했다. 도망가야 한다. 이 녀석을 죽이려면 이걸로는 안 된다. 내가 뭘 놓치고 있는지 녀석의 약점이 무엇인지 확실히 파악한 후 다시 싸워야 한다.
“이대로라면 결판이 안 나겠어.”
“······.”
내 말에 황제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더 이상 싸우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
그는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서로 불가침조약을 맺고 협상을 하는 게 어때?”
나는 은근히 그를 설득했다. 내 본래 목표는 지구를 지키는 것이다. 애초에 이렇게 싸울 필요가 없었다. 지구만 지키면 되니까···. 대화를 나누면 서로가 원하는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황제는 대답 대신 오러를 날렸다. 개새끼. 이러면 결판이 안 난다는 걸 뻔히 알면서.
서걱.
황제의 오러에 왼쪽 어깨 아래로 내 팔이 잘려져 나갔다. 방심하고 있어서 미처 방어하지 못했다.
결국 끝까지 해보자는 거지?
나는 녀석의 판단을 비웃고 왼팔을 재생했다. 왼팔도 오른팔처럼 순수한 오러의 기운으로 재생시키면 좋을 것이다.
나는 오른팔을 재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간절히 바랬다. 더 없이 바라면서 왼팔을 재생시켰다. 오러를 담기에 최적인 형태를 떠올리면서.
“······.”
예상과 달리 평범한 인간의 팔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뭔가 실수를 한 모양이다. 상상력이 부족했나?
뼈가 생겨나고 그 밑으로 식물 줄기가 막대를 타고 휘감기는 것처럼 핏줄과 근육, 신경이 재생됐다. 팔과 팔꿈치, 손과 손바닥이 생겨나고 손가락들이 생겨났다. 이변은 그때 나타났다.
“······.”
마지막 새끼손가락이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다. 피부와 근육이 없이 뼈마디만 재생된 새끼손가락이 보였다. 나는 급히 원인을 파악하고 깨달았다.
그렇게 내력 컨트롤을 노력했는데···.
몸속에 내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확실했다. 내력이 줄어서 왼팔을 오러로 만들지 못했고 평범한 인간의 팔로 회복하는데 그친 것이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새끼손가락의 회복을 마저 끝내고 황제의 의도를 파악했다.
괜히 맞아주고 있었던 게 아니었군.
그는 내가 힘에 삼켜져서 무작정 공격하길 의도했다. 그리고 힘을 죽인 채 얌전히 맞아주고 있었다. 내 내력이 닳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다가왔다. 나는 멀쩡한 척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모든 걸 깨달은 듯 천천히 걸어왔다. 내가 마력의 파장으로 기운을 읽는 것처럼 녀석도 내 기운을 읽은 모양이다.
황제가 다가와서 내 목을 잡으려고 했다. 나는 오러 검으로 변한 오른팔을 휘둘러서 저항했다. 황제의 팔이 잘려져 나갔지만 그는 이내 재생시켰다. 나는 뒷걸음질치고 저항하면서 생각했다.
차원이동으로 도망칠까?
내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른팔의 오러를 모두 수거한다고 해도 내 몸을 차원이동 시키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그렇다면 순간이동?
인근으로 도망쳐봤자 헛된 발악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수단을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할까?
그 순간 황제가 오러를 날렸다. 나는 오러 팔로 그의 공격을 막았다. 그는 오러 날리기를 몇 차례 반복했고 나는 그때마다 방어에 급급했다. 황제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마다 팔에 담긴 순수한 오러의 기운이 줄어들고 있었다. 빨리 결정해야 한다. 더 이상 결정을 유예했다간 선택의 기회조차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도망치거나 혹은 최후의 발악을 하거나.
그 순간 머릿속에 빛이 번쩍였다. 그것은 몰랐던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는 것 같은 기묘한 실마리의 번뜩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시조 드래곤과 만난 이후로 얻었던 신기한 지팡이.
내 힘을 흡수하던 지팡이, 구슬의 기운을 빨아들이던 지팡이.
시조 드래곤들은 그것을 고대의 유산이라고 불렀다. 내가 그것의 필요성을 물었을 때 그들은 때가 되면 알게 된다고 대답했다.
지금이 그들이 말한 그 때인걸까. 고대의 유산이 황제에게도 통할까?
황제가 나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지금의 전투에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나였다면 방심하지 않았을 텐데···. 가까이 다가오기보다 확실히 적을 끝내버렸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목숨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고 위기보다 신의를 중요시하는 것 같았다. 그는 기억 속에서 이 전투가 멋지게 끝마무리 되길 원하는 것 같았다. 어리석게도.
황제가 한 발자국 앞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오른팔의 내력을 수거했다. 밫으로 타오르는 오러의 팔이 사라지자, 인간 형태의 오른팔을 재생시키고 남은 오러로는 대규모의 마법을 소환할 때처럼 다른 차원에 입구를 열었다.
좌표를 상기하는 수고는 그다지 들지 않았다. 내 소환물인 휴지로부터 입구를 열면 된다.
나는 휴지를 기준으로 입구를 열었고 유산이 있는 좌표를 모색했다. 고대의 유산은 그녀의 근처에 있었다. 나는 남은 오러를 끌어 올려서 고대의 유산을 소환시켰고 황제가 다가오는 순간 그를 향해 뻗었다.
훅.
그 순간 어둠이 퍼지고 빛이 삼켜졌다. 지팡이의 장식구에서 튀어나온 블랙홀이 황제를 집어삼켰다. 세상의 존망을 걸었던 전투는 그렇게 싱겁게 끝나버렸다.
* * * * * *
시간이 바람처럼 흘러갔다. 그날로부터 반년이 넘게 흘렀다. 나는 하드버와 얘기해서 지구의 소유권을 얻었고 지구로 돌아왔다.
서리 엘프족 마을과 실버스타의 길드건물을 왔다갔다하며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 하염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포탈이 열리고 사람이 튀어나왔다. 노인의 얼굴을 한 사내. 하드버였다. 그는 종종 지구로 와서 나를 찾았다.
“자네는 정녕 천외천으로 올 생각이 없나?”
“왜?”
“여기보다 살기 편한 곳이야.”
“나는 고향이 좋아.”
벌써 수십 번째 나눈 대화라서 별 고민도 없이 물처럼 흘려보냈다. 드디어 지구로 돌아왔다. 그런데 천외천으로 가자고? 죽어도 싫다. 하드버는 내가 천외천에 와서 큰 자리를 꿰차고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는데 나는 그러기 싫었다.
“자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네.”
“뭐든지.”
“황제를 죽일 때 말이야. 진짜로 그렇게 싱겁게 끝났나?”
게다가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은 모양이다. 몇 번을 말해줬는데도 또 물어 본다.
“응.”
“단순히 지팡이를 휘둘렀을 뿐인데 황제가 죽었다고?”
“글쎄. 사실 안 죽었는지도 몰라. 다만 마력의 파장으로 읽어도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으니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만약 황제가 살아있거나 봉인되어있는 거라면··· 끔찍하군.”
그는 양팔을 잡고 몸을 부산스럽게 떨었다.
“그래서 너희에게 고대의 유산을 맡겼잖아. 제대로 관리해달라고.”
“끄응.”
그러고 보니 나도 찝찝하긴 하다. 내가 녀석을 제대로 처리했나? 의문이 든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시비를 걸면 어떻게 하지.
나는 TV를 보다가 슬쩍 말했다.
“혹시 말이야. 그 예언이라는 거 혹시 제대로 볼 수 있나?”
“왜? 보고 싶은가?”
“어! 볼 수 있어?”
처음 알았다. 예언을 볼 수도 있구나.
“예언은 전승을 통해 기록되어 있네.”
“혹시라도 말을 하는 거지만 수정구라면 사양이야.”
“구전과 구전을 통해서 책으로 보관되어 있다네.”
하드버가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내게 한 권의 책을 건넸다. 세월의 풍파를 제대로 맞았는지, 아니면 제대로 관리를 못 했는지 낡고 허름한 책이었다.
“언젠가 자네에게 보여주려고 미리 번역해놨어. 읽는데 문제는 없을 거야.”
나는 책을 천천히 살폈다. 태초에 뭐가 있었다느니, 누군가 뭔가 했다느니··· 하는 서두의 웅장함은 모두 무시했다.
책을 계속해서 넘겼다. 내가 황제와 싸웠다는 대목까지 나왔다. 진짜로 예언이 되어 있었구나. 이거 신기하다.
그러던 중 손길을 멈추고 나는 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뭐야.”
뒷장이 없었다.
“예언이 없잖아···.”
계속해서 뒷장을 넘겼다. 모두 백지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예언이 융통성 있게 작성되어 있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음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