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프롤로그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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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
검과 검이 부딪혔다. 사방에 날아다니는 마법들이 시야를 어지럽혔지만 검사는 눈앞의상대에게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허리 뒤쪽에서부터 크게 베어오는 대검을 옆으로흘려내고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품에 파고든 검사는 오른쪽 어깨로 상대를 밀쳐냈다.
인간인지 몬스터인지 헷갈릴 정도의 거구가 부딪혀왔지만 그보다 더 큰 덩치의 상대방은 겨우 반걸음 정도만 뒤로 물러났다 다시 자세를 잡고 검사가 내지른 검을 손쉽게 받아냈다.
20대 마왕의 육신은 강력했다.
대략 백여 년 주기로 나타나는 마왕.
스무 번째 마왕의 특징은 영혼과 육체가 완벽하게 분리되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손짓 한 번에 땅과 하늘을 갈랐다고 전해지던 초대 마왕과 같은 강력함은 없었지만, 기록이 비교적 자세한 근 천 년 사이의 마왕 중에서는 상대하기는 무척이나 까다로운 편이라고 평가되었다.
일행 중 가장 튼튼하고 물리적인 충돌에 가장 익숙한 검사가 마왕의 육체를 홀로 상대하고 있었기에 용사 일행은 강력한 마왕의 영혼을 상대로 선전해나가고 있었다.
마왕이휘두른 검을 다 흘리지 못하고비스듬히 받아낸 검사는 허공에 몸이 뜨자 재빨리 왼쪽 다리로 땅을 박차고 몸을 뒤로 날렸다.
곧장 날아온 오러가 발치를 훑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에 착지한 검사는 자세를 다시 잡고 검을 고쳐들었다.
거대한 검을 받아낸 오른팔이 무리를 했는지 어깨에서 희미하게 증기가 새는 소리가 들렸다. 체내의 증기압을 체크한 검사는 당분간 더 버틸 수 있다고 판단하고 마왕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금방 덤벼들듯 검을 치켜들었던 마왕은 잠시 멈춰서있었다.
살짝옆을 보니 마법사가 마왕의 영혼을 마력장으로 옭아맨 사이 성직자가구마의 진을 펼치는 것이 보였다. 검사는 피식 웃고는 피 섞인 침을 퉤 뱉어냈다.
“영혼도 없는 놈이랑 싸우려니 재미가 없네.”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지만 허세를 듬뿍 담아 마왕의 육체에 도발을 한다. 마왕은 잠시 검을 바닥에 짚고 대꾸했다.
“피차일반. 인간도 몬스터도 아닌 놈이랑 싸우니 재미가 없구나. 그런데 왜 용사 놈은 왜 싸우지 않는 것이냐?”
투구에 가려진 마왕의 시선이 검사의 뒤쪽, 마왕의 방 입구에서 성검을 양 팔로 안은 채 덜덜 떨고 있는 꼬마에게 꽂혔다. 검사는 혀를 한 번 찬 뒤 마왕에게 말했다.
“넌 영혼이 곧 정화될 텐데 안 도우러 가도 되냐?”
용사와 마왕은 서로를 죽이기 위한 운명을 타고난다고 한다. 하지만 마왕이 등장하고 곧장 찾아낸 용사는 겨우 아홉 살.
시간이 지나 용사가 싸울 수 있을 만큼 힘을 키운 뒤 마왕과 맞붙는 것이 보통이었겠지만 어딘가의 높으신 분들이 탁상에 모여서 회의를 한 결과, 마왕의 힘이 커지기 전에 뛰어난 싸움꾼들을 모아서 파티를꾸려 마왕을 치게 되었다.
용사만이 성검을 쓸 수 있었고, 마왕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성검이 필수적이었기에 용사는 성검이 필요한 경우에만 나서고 전투는 그 일행들이 대신해왔다.
그리하여 약 일 년 만에 마왕의 부하 장군들을 모조리 작살낸 용사일행은 마침내 마왕과 맞붙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왕이 용사에 관심을 두면 안 된다. 저 녀석은 그냥 꼬맹이일 뿐이었다.
용기를 업으로 삼는 용사답게 전장에서 도망치지는 않았지만 홀로 자신을 지킬 수단이 없었다.
검술은 이제 막 검사에게 배우기 시작했고 마법도 마법사에게 혼나가며 배운 기초적인 마법만 간신히 쓸 수 있는 연약한 존재였다.
한참이나 용사를 보던 마왕은 땅에 기대었던 검을 한손으로 들어올렸다. 힘자랑 깨나 하는 역사들도 양 손으로 간신히 들 정도의 대검을 가볍게 들쳐 맨 마왕은 살짝 자세를 낮추었다.
여유를 부리는 척 마왕을 도발하던 검사는 마왕의 기색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뒤로 뛰어올라 용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왕의 거체가 화살처럼 쏘아져나갔다.
“꺄악!”
동시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성직자의 비명과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소리, 폭발하는 빛의 파편, 당황스런 표정의 마법사와 뭐라 소리치는 총사의 얼굴이 느리게 흘러갔다.
그들을 배경으로 수백 개의 해골로 이루어진 마왕의 영혼이 검사와 용사를 향해 덮쳐왔다.
콰앙
검과 검이 교차하는 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육중한 쇳덩어리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검사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검사와부딪힌 마왕의 육체가 잠시 멈춘 사이 달려든 마왕의 영혼이 검사의 몸을 관통할 기세로 파고들었다.
마왕과 충돌한 충격에 뇌가 흔들려 정신을 잃어가던 검사의 몸이 마왕의영혼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테르한!”
용사의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르한이 누구지?
아, ‘나’구나.
이 몸의 주인이구나.
바닥에 내팽개쳐진 테르한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선 용사가 떨리는 손으로 성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성검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빛이 그에게 검을 겨누던 마왕의 육체를 강타했고, 마왕의 사악한 마력으로 만들어진 무구가 순식간에 무장해제 되었다.
곧 용사 일행이 마왕의 육신을 걸레짝으로 만들어놓은 뒤 테르한에게 달려왔다.
테르한은 우그러진 갑옷이 다소 불편하기는 했지만 큰 문제없이 바닥에 앉을 정도로 멀쩡했다.
“마왕의 영혼은?”
마법사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성직자가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곧 큰 눈을 깜빡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사라졌어요.”
“뭐라고?”
마법사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다그쳤지만 성직자가 탐색의 진 몇 번이나 다시 펼쳐도 마왕의 영혼이 적어도 이 근방에서는 사라졌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마왕의 영혼은 마지막에 테르한에게 부딪혔지.”
눈이 좋은 총사가 살며시 운을 띄우자 성직자는 잠시 테르한을 살펴보더니 테르한의 이마에 손을 얹고 신성력을 집중시켰다.
한참이 시간이 흐른 뒤 성직자는 이를 악물었다.
“테르한의 영혼에 마왕의 낙인이 새겨졌어요.”
“…….”
일행은 침묵했다. 마왕의 낙인은 영혼이 마왕에게 잠식당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징표였다.
지난 열아홉 번의 마왕 중 두 번은 마왕의 낙인이 새겨진 인간을 먼저 찾아 ‘정화’하여 아무런 피해 없이 마왕의 강림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정화는 영혼을 강제로 귀천시키는 행위로 마왕과 섞여버린 영혼은 같이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정화’는 누군가가 받아들이기 다소 어려운 것이었다.
용사가 테르한의 앞을 막아섰다.용사에게 그는 동료이자 스승이자 생명의 은인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마왕을 멸하기 위해 모인 용사 일행은 굳은 얼굴로 용사를 밀어냈다. 바닥에 앉아있던 테르한은 살짝 고개를 들어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소하듯 말했다.
“한 눈에 알아보긴 했으나 정말 터무니없는 몸이로군. 인간과 골렘, 호문클로스까지 섞여있는 키메라라니. 인간들은 갈수록 끔찍한 것을 만들어내는구나.”
평소의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말투가 아닌 거만하고 인간을 얕잡아보는 말투. 이미 그가 빠르게 마왕에게 잠식당하고 있다고 판단한 성직자는 정화의 진을 펼쳤고, 테르한-마왕은 그저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용사가 울음을터트리며 성직자에게 매달렸지만 마법사와 총사가 그를 붙들어 맸다. 잠시 후 정화의 진이 완성되는 것을 보며 테르한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