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제 1 장. 황궁의 불편한 손님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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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한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한밤중이었다. 그는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에 누워있었다. 커다란 창문 너머에는 구름에 가려진 달이 으스름히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몸을일으키려다 현기증을 느낀 그는 쓰러지듯 도로 자리에 누웠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푹신한 침구의 느낌이 낯설었다.
‘여기는 어디지?’
테르한은 마왕의 육체와 영혼을 정면으로 받아낸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 뒤로 기절한 모양이었다.
‘마왕은 물리쳤나보군.’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강하게 느껴지는 현기증과 비명을 지르는 허리근육이 그를 다시 침대에 눕게 만들었다.
몇 년 만에 느끼는 근육통이던가. 사로고 몸의 절반을 잃고 골렘과 호문클로스가 반쯤 섞인 몸이 된 이후로는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이었다.
“어……?”
언제나 몸 안쪽에서 들리던 마력 동력기관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이상한 일이 있었다.
“아, 아. 어?”
몸이 전체적으로 나른했지만 목이 쉬어있는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이 얇고 가느다란 목소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테르한은 자신의 목에 손을 가져다댔다. 가늘고 보드라운, 굴곡 하나없는 매끄러운 목. 반 정도 기계로 이루어져있던 자신의 목은 결코 아니었으며 평범한 성인 남성에게 느껴져야 할 목젖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구름의 틈새로 빠져나온 달이 침대를 비추자, 침대 위에 흐트러져있는 푸른 머리카락이 달빛을 머금고 은은한 빛을 반사했다. 목에서 손을 뗀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앙상한 아이의 작은 손.
‘설마?’
현기증과 근육통을 무시하고 몸을 일으킨 테르한은 곧장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침대에 걸터앉은 상태에서 땅에 발이 닿지 않았다는 것에서 공포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침대에서 맞은편 벽 어두운 조명 아래에 있는 거울이 너무 멀어 보였다.
깨질 것 같은 머리, 휘청거리는 다리, 질질 끌리는 옷과 사투를 벌이며 간신히 거울 앞에 선 테르한은 흰색에 가까운 하늘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깡마른 여자아이가 잔뜩 인상을 쓴 채 반짝이는 붉은색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보았다.
털썩
테르한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과 머릿속을 두드리는 것 같은 고통에 자리에서 쓰러졌고,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곧 방문이 열리고 시녀복을 입은 소녀와 무장을 갖춘 기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공녀님!”
시녀가 거울 앞에 쓰러진 공녀를 안아들었다. 살짝 열이 오른 공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댄 뒤 시녀는 익숙한 듯 물수건을 공녀의 이마에 올렸다. 잠자코 지켜보던 기사는 조심스레 공녀를 안아 올려 침대 위에 뉘었다.
잠시 후 기절하듯 잠든 공녀를 내려다보던 시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만에 깨어나셨는데 또 기절하셨어요. 이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죠?”
“어찌 할 방법은 없지. 어차피 공작가에서도…….”
기사는 말을 멈추고 잠시 공녀의 안색을 살폈다. 악몽이라도 꾸는 듯소녀는 눈을 감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기사는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어갔다.
“공작가에서도 버려진 분 아닌가. 세상 어떤 귀족이 열 살도 안 되는 딸을 볼모로 보내겠나?”
시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공녀를 동정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신분의 차이를 생각하면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기사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동정의 눈길이라도 주는 시녀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수많은 귀족들과 제후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체노스트라 제국. 그 중에서도 개국공신 가문 중 하나인 제즈릭 공작가는 대대로 귀족파의 수장으로 군림하는 가문이었다.
그런 대단한 공작가의 딸인 공녀는 열 살의 나이에 황궁 구석에 마련된 조그마한 손님용 건물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갈수록 영지를 가진 지방귀족들의 세력이 커지고 황실을 견제하게 되자 강력한 황권을 추구하던 젊은 황제는 귀족들을 압박하여 귀족 자녀들의 교육을 한다는 명목 하에 최소 한 명 이상의 자녀들을 제도에 머물도록 요구했다.
당연히 많은 반발이 있었고, 적지 않은 충돌이 있었다.
결국 황제의 뜻에 굴복하게 된 귀족들과 제후들은 온갖 꼼수를 쓰기 시작했고, 첩의 아이나 분가의 아이, 심지어는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서민의 아이를 서류상으로 입양한 뒤 보내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 귀족파의 수장인 제즈릭 공작가에서는 태어났을 때부터 희귀병인 마력탈진증을 앓고 있던 딸을 제도에 보냈다.
허약한 몸과 가문에서 버림받아 언제 망가질지 모르는 정신상태, 몸이 다 받아들이지 못해 폭주가능성이 있는 마력덩어리를 떠맡게 된 황제는 볼모 대신 짐 덩어리를 받았다고 혀를 찼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가 벌어져도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도록 황궁 내에서도 특히 오래되어 비어있는 건물에 머물도록 했다.
“그래도 마력탈진증은 나으셨다고 하니, 마력 폭주에 의한 사고는 걱정 안 해도 되지 않겠지. 허나 공작가에서 다시 공녀님을 찾을지도 의문이군.”
마력탈진증은 과도한 마력을 육체에 전부 담아낼 수 없어 마력이 몸에 갈무리되지 못하고 줄줄 흘러나오는 증상이었는데, 마법사 여러 명이 육체가 성장할 때까지 마력의 안정화를 돕지 않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왔다.
그리고 마법사 여러 명을 적게는 수 년, 많게는 십 수 년 동안 아이의 치료에만 동원하는 것은 그 아이가 황태자라도 되지 않는 이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어지간한 귀족들은 고용조차 힘든 마법사를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을 동원하여 사람의 치료에 매달리게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지어 강대한 공작가문에서 치료를 포기할 정도로.
미약하지만 끈질긴 생명력 덕분인지, 몸에 걸려있는 생명 유지의 마법 덕분인지 공녀는 십 년이나 살아남았다. 그리고 용사일행이 마왕을 물리친 그날부터 기절하듯 잠들었다.
공녀의 전담의사로 지정되었던 마법사 겸 의사가 마침 멀리 출장을 가있던 터라 다른 의사들이 몇 명 오간 뒤 알 수 없는 증상이라는 답변만 했다.
강대한 귀족의 자식이 덜컥 죽어버릴 까봐 그제야 걱정이 된 황제는 마법사들까지 동원했고, 마력탈진증을 앓고 있는 공녀를 몇 번 만나보았던 마법사가 그녀의 증세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력탈진증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일은 기록상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그녀에 대한 취급이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공녀가 기절하고 사흘이 지나서 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거울 앞에서 쓰러져있는 공녀를 발견한 시녀와 기사는 공녀의 건강이 여느 때보다도 좋지 않다고 여겼다. 지나치게 마른 공녀의 몸은 빈민가에 사는 아이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시밀레 양이 수고 좀 해주게. 아침이 되는대로 의사랑 추가 일손을 부르겠네.”
“네. 알겠습니다.”
기사가 방을 나가자 시밀레는 방 안에 준비되어있던 물통에 천을 적셔 뜨거운 공녀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다소 표정이 누그러진 공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죽은 듯이 잠들어있었다.
공녀는 마법의 힘을 빌려 간신히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지만 이 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면 황궁 안에서 영양실조로 죽은 첫 번째 인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를 모시는 사람들은 최소 해고에 자칫 잘못하면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
딸을내팽개친 공작가와 내심 공녀가 자연스레 사망하길 바라는 황가 모두가 사용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것이다.
시밀레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다른 사용인들은 갖은 수를 써서 다른 곳으로 근무지를 옮기거나 일을 그만 둔 뒤였다.
이제 막 황궁의 시녀가 되어 가족들의 부양을 할 수 있게 된 소녀는 다른 곳으로 근무처를 옮길 뒷배도 없었고, 일을 그만 둘 수도 없이 그저 공녀가 최대한 오래 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아침이 되자 의사가 공녀를 진단하더니 가벼운 탈진이라고 말하고는 급히 떠나갔다. 이곳에 오래 있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어나시면 드실 수 있도록 식사를 준비할게. 공녀님께서 깨어나시면 식사를 올려드릴 테니, 어서 들어가서 쉬렴.”
“네, 감사합니다.”
기사가 불러준 나이 지긋한 시녀가 전후사정을 듣고 배려해준 덕분에 시밀레는 밤새 공녀를 간호하느라 지쳐있던 몸을 간신히 숙소에 들일 수 있었다.
공녀는 깊은 수렁에 잠겨 가라앉는 악몽에 허우적거리다 문뜩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어 가벼운 불쾌감이 들었다.
어제와 같은 현기증이나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근육통은 여전해서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옆으로 반 바퀴몸을 굴려 방 안을 살펴보았다.
“깨어나셨군요. 공녀님. 식사를 가져다드릴까요?”
나이 지긋한 시녀는 공녀가머무는 오래된 손님용 건물에서 멀지 않은 황후의 궁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버려진 공녀를 불쌍히 안쓰럽게 여긴 황후가 일손을 거들도록 허락해주어 종종 공녀의 수발을 들고는 하였다.
간혹 하루 종일 잠들어있는 때가 있는 공녀는 눈을 뜨면 일단 먹을 것을 찾는다. 온몸에 멀쩡한 구석이 없는 공녀답게 소화기관도 그다지 신통치 않았지만 억척스러울 정도의 생존본능으로 음식을 꾸역꾸역 뱃속에 밀어 넣곤 하였던 것이다.
식사 얘기가 나오자 공녀는 여느 때처럼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시녀는 황후궁에서 빌려온 보온 접시에 담겨있는 죽과 스프를 낮은 식탁에 담아 침대에 올려놓았다. 커다란 베개를 쿠션삼아 몸을 일으킨 공녀는 시녀의 눈치를 살짝 살피며 숟가락을 들었다.
공녀는 지금 혼란스러웠다.
용사의 동료, 검사 테르한은 눈앞의 시녀가 누군지 알 리 없었다. 비록 수년전에는 기사단 입단이 예정된 촉망받는 인재였다고는 하나 황궁은 생도시절 기사들 심부름을 하며 두어 번 와본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오가면서 마주쳤을 확률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저 시녀의 이름은 크실라, 황후마마의 시녀로 그녀의 암묵적인 지시 하에 가끔 공녀의 수발을 들어준다는 것은 누구의 기억일까.
손으로는 쉴 새 없이 죽을 입으로 퍼 나르면서 공녀는 점점 기억을 더듬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몸의 주인은 그 유명한 제즈릭 공작의 딸인 아리에. 공작가에서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햇빛이 들지 않는 차갑고 어두운 방. 그곳에 드나들던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들. 하루 종일 앉아있던 차가운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 이 몸에 걸려있는 수많은 억제의 마법들.
“콜록콜록”
자신의 몸에 걸려있는 셀 수 없는 마법들을 떠올리자 공녀는 헛구역질이 일어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크실라가 익숙한 듯 공녀의 등을 살살 문질러주었고 약간 부끄러워진 공녀는 어느새 다 비워진 그릇을 살짝 밀어내고 등을베개에 기대었다.
“오늘은 그만 드시나요?”
크실라의 말에 평소의 공녀가 어땠는지 떠올랐다. 공녀는 하루 이상 일어나지 못했을 경우에는 소화가 잘되는 죽이나 스프를 억지로 세 접시 이상을 비웠던 것이었다. 식탐이 아니라 그저 살고자하는 집념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양이 모자란 느낌이었다.
“한 접시 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접시를 내미는 공녀에게 죽을 한 접시 더 퍼준 시녀는 더 필요하면 말하라고 하고는 침대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시작했다. 공녀는 죽을 후후 불어가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나는 테르한. 기사도 용병도 아닌 놈.’
사고를 당해 몸의 절반이 날아간 기사단 생도는 어떤 연금술사의 흥미를 끌어 골렘과 호문클로스로 육체의 일부를 교체하여 살아났다. 하지만 연금술사의 끔찍한 실험을 견디지 못해 도망친 뒤 용병생활을 전전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용사의 일행에 합류하여 전위로서 마왕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아마 죽은 모양이다.
‘그리고 동시에아리에 제즈릭. 버림받은 공녀이자 황궁의 불편한 손님. 언제 터질지 모르는 마력폭탄.’
오래전에 읽었던 책처럼 아리에 공녀의 기억이 머릿속에 갈무리되어있었다. 그녀의 기억이나 느끼는 감정, 생각은 빛바랜 그림 같았지만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다.
이제 막 열 살이 된 공녀는 비록 몸이 약하고 자신의 마력을 제어할 능력은 없었지만 총명하고 눈치가 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그 원인, 주변의 평판 등을 온전히 파악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평범한 열 살짜리 어린아이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테르한은 자신이 열 살 때 동네 아이들이랑 나무막대기로 검 싸움을 하고 돌아다녔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공녀의 육체에 테르한의 영혼이 들어가서 둘의 기억을 모두 갖게 된 것인가?’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는 것보다는 일단 상황파악이 먼저였다.
테르한의 눈에 숟가락을 들고 있는 팔이 보였다. 예전의 자신이 살짝 쥐면 그대로 부러질 것 같은 얇은 팔이었다.
숟가락을 쥐기만 하고 있는데도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손아귀의 힘을 살짝 빼자 숟가락이 떨어질 것 같아 아예 숟가락을 잠시 내려놓았다.
테르한은 내친김에 온몸에 신경을 기울여보았다. 거슬릴 정도의 허리 통증과 죽 두 그릇을 먹었지만 여전히 주려있는 배, 이제는 찾을 방도가 없는 자신의 분신을 제외하면 의외로 멀쩡해서, 항상 몸이 무겁고 침대 밖으로 벗어나기 힘들었던 공녀의 기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공녀가 현재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원인이었던 제어할 수 없는 마력은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한때 간단한 마법을 배운 적이 있는 테르한은 공녀의 몸에서 마력이 일절 느껴지지 않는 점에 당황했다.
신체가 개조된 뒤 모든 마력을 내부 동력기관에 사용하느라 마력을 느끼지 못했던 기간이 제법 되는지라 방금까지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었다.
마력폭탄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공녀의 몸에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 자신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공녀의 마지막 기억은 갑자기 시작된 마력 폭주에 의한 발작 때문에 허리가 확 꺾이고 괴로움에 굴러다니다가 그대로 침대에서 떨어진 기억이었다.
허리의 통증은 그때 생긴 것이었나.
공녀는 어느새 비어버린 그릇을 시녀에게 내밀었다. 시녀는 눈으로 물었고, 공녀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세 번째 접시를 받아는 공녀는 은은히 느껴지는 행복감에 살짝 당황했다.
겨우 죽 한 그릇, 아니 세 그릇에 행복을 느끼다니. 이것은 테르한의 감정일까, 아리에의 감정일까. 답을 내리기 힘든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