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화 〉제 1 장. 황궁의 불편한 손님 - 3 (4/82)



〈 4화 〉제 1 장. 황궁의 불편한 손님 - 3



- 4 -

공녀의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열심히 먹고 자고 스트레칭하고 시밀레의 도움을 받아 조금 부끄러운 화장실 다녀오기까지 마친 공녀는 깨어난 지 사흘 만에 부축 없이 방안을 천천히 돌아다닐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결사적으로 미뤄왔던 목욕시간이 되었다.

“후우…….”

그동안 여자의 몸을 본 적도 없거니와, 손을잡아본 여성도 동료들을 제외하면 엄마가 전부였던 테르한은 얇은 원피스 형태의 속옷만을 걸친 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빼빼 마른 어린아이의 몸이었지만 엄연한 여성의 몸. 이 몸으로 목욕을 한다는 것은 한때 기사도 정신을 추구하던 이에게는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이건 어린 여자아이의 몸을 보는 게 아니다. 그래. 여동생을 목욕시켜주는 거라고 생각하자. 여동생은 없었지만.’

자기합리화를 끝낸 테르한은 차분히 속옷을 벗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아무렇지 않아 안심하며 욕조에 들어갔다. 애초에 공녀의 기억 중에는 목욕을 한 기억이 수도 없이 있었다. 테르한은 그것을 기억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목욕을 즐기던 공녀는 시밀레가 수건 한 장만 걸치고 욕실로 들어오자 고개를 거의 물에 처박듯 숙였다.

“시, 시밀레!  들어오는 거야?”

“네? 그야 공녀님 목욕 시중을 들러…….”

시밀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녀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냥 나 혼자 목욕할게.”

“무슨 소리세요, 공녀님. 저번에 욕조에서 탈진하셨으면서.”

공녀는 평소에도 혼자 목욕을 하곤 했지만 한  전쯤에 욕조에서 탈진을 하는 바람에 반쯤 익사할 뻔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시밀레는 같이 목욕을 하거나 공녀가 목욕하는 내내 시중을 들곤 하였다.

“지금은  괜찮아!”

공녀가 소리치는 일은 처음이라 시밀레는 살짝 당황했지만 곧 공녀가 괜스레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 건물은 더운 물이 귀해서 같이 하는 편이 효율적이에요. 자, 씻겨드릴게요.”

물론 황궁에는 사용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목욕탕이 별도의 건물에 따로 있었고 보통 목욕 때에는 모시는 주인의 수발을 들 뿐이지만, 공녀와 시밀레만 있는  건물에서 그런 것을 따질 필요는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와 욕조 옆에 선 시밀레는 욕조의 가장자리에 수건을 깔았다. 공녀가 하는  없이 그곳에 앉자 시밀레는 병에 담긴 향기가 나는 액체를 공녀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 꼼꼼히 바르기 시작했다.

“내일부터는 건물 밖까지 외출하셔도   같아요. 가고 싶으신 곳은 있으신가요?”

머리를 감겨주는 시밀레의 손길에 몸을 부르르 떨던 공녀는 그녀의 말에 잠깐 고민을 했다.

이제 걷다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일은 없었다. 작아진 몸에도 어느 정도 적응하여 거리감이나 보폭을 재는 것도 익숙해졌다. 이쯤이면 다른 이들과 만나도 추태를 부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

“황후마마께 문안인사를 드려도 될까?”

시밀레는 말없이 공녀의 머리에 물을 부었다. 공녀가 머리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내자 옅은 하늘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물론이죠. 황후마마께서 공녀님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하니까 찾아뵈면 기뻐하실 거예요.”

아리에의 기억으로는 황후와 만난 적은 딱 두 번. 매번 만날 때마다 걱정 어린 시선을 받은 어린 공녀는 잔뜩 위축되곤 하였다. 공작가에서 그러한 시선은실망을 뜻했으니까.

“크실라 시녀는 언제 와?”

“내일 아침에 온다고 해요.”

시밀레는 다시 한 번 공녀의 머리에 물을 부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기분 좋은 나른함에 공녀는 몸을 한껏 이완시켰다.

“크실라 시녀 편으로 황후마마께 문안인사를 올리겠다고 전할게.”

“알겠습니다. 자, 이제 몸을 씻겨드릴게요.”

“어? 잠깐만.”

“안돼요. 일주일간 못 씻으셨고 땀도 많이 흘리셨잖아요.”

“내가, 내가 할게!”

다른 사람이 봤다면 무엇이든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고집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광경이었겠지만 공녀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욕조에서 옥신각신하던 공녀와 시밀레는 간신히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시밀레가 욕실 뒷정리를 하는 동안 공녀는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아직 자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성장이 억눌려있던 것인지 먹어도 배고프고 자도 졸렸기에 일치감치 잠들기로  것이었다.

공녀가 눈을 감고 누워서 잠에 빠질 때 즈음 문득 머릿속에서 이상한 단어가 계속 떠올랐다.

- 마왕, 마왕, 마왕

마왕? 그러고 보니 공녀로 돌아온 뒤 용사 일행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애초에 깨어나고 만난 인물이 크실라, 시밀레, 의사가 전부여서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사람이 없었다. 자신 또한 낯설면서 익숙한 환경에 적응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기도 했다.

- 마왕, 마왕, 밖으로, 밖으로

머릿속의 단어가 바뀌었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지만 단어들의 나열은 계속되었다. 밖으로, 방 밖으로, 빨리, 이런 단어들이 계속 이어지자 정신이 어지러워진 공녀는 마침 청소를 마친 시밀레와 함께 방 밖으로나왔다.

“곧 주무셔야하니까 너무 멀리는 못가요.”

“알았어.”

방문을 빠져나오자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가 보였다. 곳곳에 마력으로 된 광원이 주위를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 빨리  밖으로 나와서 얘기를 들어라.

머릿속의 단어가 마침내 한 문장이 되어 말을 걸었다. 공녀가 놀랄 새도 없이 말이 이어졌다.

나온 모양이군. 검사여. 아니, 지금은 공녀라고 불러야 하는가?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자신의, 공녀 아리에의 목소리였다. 시밀레의 손을 잡고 천천히 복도를 거닐며 공녀는 머릿속에 질문을 떠올렸다.

- 누구?

공녀의 질문에 상대방은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

- 최후를 같이 맞이한 자를 못 알아보다니, 실망이구나. 검사여. 나름 그대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거늘.

- 마왕?

애초에 마왕이라는 단어부터 말했고, 공녀를검사라고 부른 시점에서 알아봤어야 했다. 며칠 공녀의 몸으로 지내느라 감이 둔해진 모양이었다.

처음에 말했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마왕이며 이름은 분열이니라.

테르한은 이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곳곳이 비어있는 치아의 공백만 느껴질 뿐이었다.

- 아직 살아있었나?

허어. 나와 그대의 영혼이 섞인 것조차 모르고 있었나?

그게 무슨…….

순간 테르한의 머릿속에 저번 생애의 마지막 장면이 천천히 재생되었다. 마왕의 육체를 온몸으로 막아낸 뒤 곧장 자신에게 파고든 마왕의 영혼.

- 무슨 의도로 내 영혼과 합친 거지? 흡수하거나 날려버리는  네놈의 수법 아닌가?

- 의도는 무슨. 그저 그대의 몸이 특이해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누군지 몰라도 심한 장난질을 해놨더군.

테르한은 과거를 떠올렸다. 어떤 미친 연금술사가 골렘과 호문클로스, 인간을 섞는 연구를 했고, 마침 뛰어난 육체의 인간이 반신불수가 되었다.

금단의 마법과 연금술로 인간의 영혼에 골렘의 핵과 호문클로스의 인공영혼을 융합시킨 결과 불안정한 영혼의 집합체가 되어버린 테르한은, 분열의 표현에 의하면 영혼을 담는 그릇이 지나치게 커서 마왕의 영혼까지 붙잡아버렸다고 한다.

- 용사 일행 녀석들 때문에 영혼이 약해져 있었고, 그대의 정체를 아는 육체의 기억은 아직 공유되기 전이었다. 그대가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그대와 용사 놈의 영혼까지 통째로 날려버릴  있었을 텐데.

- 지난 이야기는 됐어. 너는 결국 진거야. 그런데 네놈은 왜 나를 부른 거지?

공녀는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내일 황후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준비할 것이 많았다.

 육체는 소멸했고 영혼은 그대의 영혼과 함께 정화 당했다. 하지만 순수한 마왕의 영혼이 아니었으니  빌어먹을 정화의 진도 완벽하게 먹히지는 않았지. 그래서 차기 마왕이 될  있는 육체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차기 마왕?

공녀는 깜짝 놀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시밀레가 이상함을 느껴 그녀를 쳐다보자 공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고 계속 걸어갔다. 마침내 정원으로 나온 그들은 잠시 벤치에 앉아 쉬기로 했다.

- 그래. 내가 스무 번째, 마지막 마왕이었으니 다음번 마왕은 다시 파멸의 차례인 것이다. 아, 파멸은 인간들 사이에서는 초대 마왕이라고 불리는 모양이지만.

분열의 말에 공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 초대 마왕이다시 부활한다고?

초대 마왕, 태초의 마왕. 부르는 이름은 많았지만  그대로 1600여 년 전에 최초로 등장한 마왕이며 각종 기록에 의하면 인류는 물론 각종 종족들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마왕이었다. 심지어 자신을 섬기는 마족조차 예외는 없었다고 한다. 그런 놈이 부활한다니?

- 인간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을 테지. 어찌되었든 파멸은 정신력이 약하고 높은 마력을 가진 이를 육체로 삼는다. 그 육체와 완벽하게 동화가 된 뒤 정신적인 파멸을 겪게 하여 영혼을 집어삼키고 모든 것을 이름 그대로 파멸로 이끌어나가는 녀석이다.

분열은 치가 떨린다는 듯 말했다. 궁금증을 느낀 공녀는 분열에게 질문했다.

- 너는 파멸과 같은 마왕 아닌가?  이런 정보를 알려주는 거지?

- 설명하자면 길다. 간단히 말하자면, 파멸과 나는 상극에 있는 마왕이다. 모든 것을 파괴시키려는 그와 조화를 꿈꾸는 나는 서로를 증오하고 있다.

-마왕인데 조화를 꿈꾼다고?

공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반문했다.

- 그래. 원래는 수년에 걸쳐서 다른 종족들에게 우호적인 신호를 보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의 행동이 지나치게 빨랐지. 나는 마냥 목을 바칠 수 없기에 저항을 했을 뿐이다. 내가 죽으면 다음은 파멸의 차례였기에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했지. 결국 실패했지만.

- 그래서 결국 나를 부른 이유는 뭐야? 파멸 대신 이 몸을 차지했으니까 된  아니야?

- 그게 다가 아니다. 언젠가 파멸은 다른 몸을 차지해서 부활할 것이다. 그때까지 파멸의 영혼이 낙인찍힌 육체를 찾아 정화를 하던지, 못 찾으면 최소한 대비는 해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야말로 세상이 멸망할 것이다.

- 세상을 구하려면 마왕의 낙인이 새겨진 녀석을 찾으라는 것이군.

공녀는 잠시 생각했다. 분열의말을 전부 믿어야 하나? 계략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 설마. 내가 곧 그대인데 거짓말을 해서 무엇 하겠는가.

분열은 공녀의 기억을 읽고 있었다. 자신도 분열의 생각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해봤지만 불가능했다.

-  아직 네가 내 영혼과 합쳐졌다는  잘  닿지 않는데. 지금도 머릿속에서 따로 이야기하고 있고. 네 기억은 공녀와는 달리 읽을 수 없어. 게다가 방 안에 있으면 말도 제대로 못 걸잖아.

말할수록 분열이 의심스러워졌다.

- 내가 누군지 잊었는가. 나는 분열. 기억이나 의식, 영혼이 몸을 따라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방은 강력한 결계로 보호되고 있어 우리의 영혼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밀접해지지.

분열은 공녀를 어르듯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 우리는 쌍두사와 비슷하다. 별개의 생각과 행동을 할지언정 나아가는 방향은 같아. 몸을 이끌어가는 머리는 그대의 영혼이고,나의 영혼은 옆에 붙어있는 머리와 같지. 둘  하나가 죽으면 같이 죽는다. 한쪽 머리를 떼어내도 죽는다.

 배를 탔다는 말이군.

- 그래. 허나 그 방은 우리의 머리를 강제로 붙여버려서 서로를 보기 힘들게 만들지. 그러니 가끔은  이야기를 들으러 밖으로 나와 주었으면 하는군.

마지막 말이 왠지 외로움을 타는것처럼 느껴져서 공녀는정신적인 웃음을 지었다. 분열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 그래. 어차피 내일부터는  밖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 거야.

그렇군. 그럼 내일부터 파멸의 영혼을 찾아볼 텐가?

분열의 말에 공녀는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시밀레가 슬슬 들어가자고 하며 공녀를 일으켜 세웠다. 공녀는 그녀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 다음번 마왕이 부활하려면 100년쯤 걸리는 거 아니었어?

- 무슨 소리인가, 그대여. 내 소멸이 빨랐으니 부활도 빨라지는 것은 당연지사.

- 처음 듣는 얘기인데.

- 흠. 인간들의 지식은 가늠하기 힘들군.

분열은 잠시 공녀와 테르한의 지식수준을 대강 살펴본 뒤 최대한 알아듣기 쉬운 단어를 골랐다.

- 마왕이 빨리 처치 당하면 다음번 마왕도 빨리 나타난다. 마왕의 낙인이 찍힌 영혼을 그대로 정화해버리면 아예 한두 해 안에 다음번 마왕이 등장하지. 멍청한 망각과 오만방자한 탐닉은 자기 자신을 숨겨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낙인을 들키고 말았다. 뭐, 각종 탐지술법들이 발전한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그 뒤에 은닉과 불행이 거의 1년 안에 세상에모습을 드러냈을 거다. 비슷한 이유로 내가 나온 지 1년 만에 정화되었으니 빠르면 10년 안에 파멸이 나타날 터.

- 큰일이네.

큰일이지.

공녀는 한숨이 절로나왔다. 뜻하지 않게 살아가게  두 번째 인생에서도 목표는 마왕의 퇴치.

- 그래도 그때에 비해 1600년이 넘게 지났는데 이번에는 잘 넘길  있지 않을까? 마법도, 과학도 발전했으니까.

이야기하는 사이에 방에 다다랐다. 시밀레는 방문을 열고 공녀의 등을살짝 밀었다.

- 그 이야기는 다음번에 하도록 하지. 그럼.

방 안으로 들어오자 분열의 목소리가 끊겼다. 대신 공녀는 영혼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영혼을 느끼는 마법이나 신성력은 갖고 있지 않았기에 기분 탓이었겠지만.

“안녕히 주무세요. 무슨  있으면 이따가 밖의 경비를 설 케이선 경에게 말씀하셔서 불러주세요.”

“알았어. 시밀레도  자.”

공녀에게꾸벅 인사를 한 시밀레가 방을 나서자 공녀는 혼자가 되었다. 거울 앞에 선 공녀는 거울에 비친 소녀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앙상했던 얼굴은 며칠 사이에 살이 올라 가냘픈 소녀 정도의 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테르한과 아리에의 성격상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기 힘들어 안면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미소를 지어보았다. 어색하고 어설픈 미소에 낙담한 공녀는 침대로 돌아가 자리에 누웠다.

‘내일 잘 할  있을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황후를 만나면 악효과만 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병세가 호전되었는데도 지금까지 도와준 은인을 무시하는 태도로 비추어질 것이다. 그리고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겠지.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한 공녀는 서서히 잠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