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제 1 장. 황궁의 불편한 손님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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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는 황태자에게 제법 긴 설교를 하였다.
오늘 처음 만난 또래의 소녀 앞에서 경애하는 어머니에게 혼나는 일은 썩 유쾌하지 않았기에 황태자는 입을 꾹 다물었고, 결국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은 공녀의 몫이 되었다.
“……그래서 태자전하께서 왜 제가 황후마마와 검술 대련을 했냐고 질문하신 건지 여쭤볼 참이었어요.”
공녀의 설명에 황후는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꾹 눌러 담고 대뜸 공녀의 팔을 잡았다.
“얘 팔 좀 보렴. 검은커녕 숟가락도 들기 힘들어 보이지 않니?”
황후가 공녀의 빼빼마른 팔을 붙들어 황태자의 눈앞에 들이밀자 그는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제즈릭 공녀는 병세가 깊어 황후궁 옆에 있는 낡은 건물에서 요양하고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태연히 과자를 먹고 있는 공녀를 보고 판단력이 흐려진 모양이었다.
“내 생각이 짧았군. 무례를 사과드리지.”
“언제까지 그 웃기는말투를 계속 할 거니?”
“……미안해.”
황후의 말을 고분고분히 듣는 황태자는 딱 그 나이대의 아이다웠기에 공녀는 어른답게관용을 베풀기로 했다.
“아니에요. 용서해드릴게요, 태자전하.”
결국 황태자의 행동을 일러바치고 사과까지 받아낸 공녀는 의기양양해졌고 승리자의 미소를 짓는 공녀를 본 황태자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너…….”
공녀는 모른 체하며 딴청을 피웠고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가 휘둘리는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보던 황후는 공녀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로 했다.
“태자와 내기를 했지. 나하고 검술 대련을 해서 성과가 보일 때마다 그 과자를 주기로 했거든.”
“아.”
황태자는 아마 과자를 좋아하던가, 검술을 좋아하던가, 아니면 둘 다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 뒤로 공녀와 황후는 한동안 담소를 이어갔고, 황태자는 중간 중간 대답이나 맞장구를 치며 조금씩 공녀의 눈치를 살폈다. 황태자의 시선을 느낀 공녀는 황태자가 황후와 독대를 하고 싶어 눈치를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슬슬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돌아가기 전에 앞으로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서 황태자를 놀린 대가를 지불하기로 했다.
공녀는 품 안에 있던 주머니를 뒤져 천에 감싸진 무언가를 꺼냈다.
천을 풀자 과자한 덩어리가 나왔고, 방으로 돌아가서 먹으려고 챙겨둔 과자를 반으로 쪼개 황태자의 손에 하나 쥐어준 공녀는 남은 반쪽을 다시 정성스럽게 포장해 주머니에 집어넣은뒤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에게 인사했다.
“황후마마. 황공하오나 소녀의 몸이 좋지 않아 이만 물러나도 될까요?”
손님 접대용 과자를 포장해가는 귀엽지만 다소 무례해보일 수 있는 행동을 지적해야할지 고민하던 황후는 공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구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몸조리 잘 하렴.”
“감사합니다.”
실제로 공녀의 몸은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겨우 5분 남짓 걷고 한 시간 정도 앉아서 이야기만 했는데도 육체적, 정신적 피로로 온몸이 축 쳐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얼른 재활훈련을 해서 일반인 수준까지는 되어야 무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황후마마, 태자전하.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공녀가 인사를 건네자 자신의 손에 쥐어진 과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황태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후와 함께 공녀를 배웅했다. 공녀가 떠난 뒤 자기도 모르게 과자를 베어 문 황태자는 검술 대련에서 성과를 기대한다는 황후의 말에 낭패한 기분이 들었다.
“피곤해.”
방으로 돌아온 공녀는 저도 모르게 투정을 부리면서도 얌전히 시밀레가 옷을 갈아입혀주는 것이 끝날때까지 기다렸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공녀의 몸에 완전히 적응한 테르한은 이대로 공녀로써 평생 살아야하는지 걱정이 되면서 동시에 소름끼치는 생각이 들었다.
‘나하고 분열이 이 몸에 들어오면서 아리에의 영혼은 소멸한 건가?’
물론 자신이 아리에였던 시절의 기억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영혼 또한 남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리에의 영혼이 갑작스레 몸으로 들어와 버린 테르한과 분열의 영혼에 짓눌려 소멸했거나 튕겨져 나가버리기라도 했다면?
- 부정. 부정. 부정.
분열이 짧은 단어로 신호를 보내왔다. 자신보다 이 몸에 깃든 영혼의 상태를 더 잘 알고 있는 분열의 대답에 테르한은다소 안심했다.
분열과 오늘 있던 일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상담하고자 했지만 시밀레가 점심 준비를 하러 가서 언제 올지 몰라 자리를 비울 틈이 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침대 옆의창문을 열고 머리를 밖으로내밀어보았다.
- 이런 방법이 있었군.
무사히 분열의 의지를 수신한 공녀는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 아까 그 말은 아리에의 영혼이아직 이 몸에 있다는 말이야?
- 흐음. 그대는 아직 자신의 영혼과 몸에 대해 전부 파악하지는 못한 모양이군.
- 무슨 뜻이지?
- 그대는 마왕과 대적한 용맹한 검사 테르한이자, 체노스트라 제국 제즈릭 공작가의 여식 아리에 제즈릭. 그리고 위대한 마신의 일부이자 완성하는 자,
- 분열.
- 그래. 나 분열까지. 모든 영혼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섞여있다네.
분열의 말에 자신이 공녀의 삶에 익숙하게 적응하는 것이 이해가 갔다.
- 전에 네가 그랬지. 너는 분열의 마왕이기에 기억이나의식이 몸을 따라가지않는다고. 그런 식으로 테르한과 아리에는 분리할 수 없는 거야?
- 그건 내가 분열의 마왕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예컨대 ‘나’는 지금 여러 명의 자아를 인식하고 있는 상태이고, 그 인격 중 하나는 검사의 기억을 가진 소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왕 분열이지. 어찌 보면 다중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 잠깐. 검사의 기억을 가진 소녀라고? 소녀의 기억이 남아있는 몸에 들어온 검사가 아니라?
- 그게 그거지. 어차피 둘의영혼은 섞여있다고 계속 말하지 않았나.
분열은 집요하게 묻는 공녀에게 짜증을 부리듯 말했다. 테르한에게는 중요한 문제였지만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자유롭고 개개의 존재가 각자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분열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공녀는 창틀에 팔을 괴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머리는 가벼웠지만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팔 근육은 그마저도 버티기 힘들어했다. 하는 수 없이 창틀에 머리를기대고 엎드린 공녀는 분열에게 질문했다.
- 그렇다면, 언젠가-
- 언젠가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쉽겠지만 포기하는 수밖에. 게다가 그대의 몸은 이미 땅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그대가 더 잘 알지 않는가?
공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열의 말마따나 테르한의 원래 몸은 잘 해봐야 땅에 묻혔을 것이고, 심하면 방치되어 썩어가고 있거나, 어쩌면 마법사가 깔끔하게 화장을 지냈을지도 모른다.
분열과 싸웠던 마왕성에서 제일 가까운 인간의 영지까지는 말을 타고도 열흘이 넘게 걸린다. 원래는 말도 몇필 준비했고 마법사는 원반 비슷한 물체를 타고 다녔으나 마왕군과의 전투에서 모두 달아나거나 죽고 부서져버렸으니 용사일행이 테르한의 시체를 끌고 귀환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근처에서 마왕군과 전투 중이던 군사들도 용사 일행이 마왕성에 침투할 때까지 시선을 끌어준 뒤 모두 회군한다 했으니 테르한의 몸뚱이가 회수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다. 공녀는 착잡한 마음을 추슬렀다.
- 내가 나 자신을 아리에보다는 테르한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아리에의 영혼이 더 약해서 그런 건가?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검사였던 그대의 영혼은 그대의 기억 속에 있는 어느 미치광이 연금술사에 의해 용량이 수십 배는 늘어나버렸다네. 그래서 내가 뜻하지 않게 그대의 영혼을 육체에서 밀어내려다 잡혀버리고 만 것이고.
- 그 망할 연금술사…….
- 뭐, 덕분에 자네의 영혼은 아직까지 남아있지 않았나. 어쨌든 그와 비슷하게 아리에의 영혼 역시 그대의 영혼의 그릇 깊숙한 곳에 빠져 지금은 바닥에 가라앉은 상태라네. 이 몸이 성장할수록 아리에의 영혼도 성장하고, 결국은 그릇을 채워 그대와 완전히 동화되어 구별할 수 없게 되는 날이 오겠지.
“휴우.”
공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공녀의 몸으로 들어온 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이미 아리에의 기억과 테르한의 기억이 혼재되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아리에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소녀의 행동과 사고방식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아리에였고 공녀가 테르한의 행동을 취할 수는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 무얼 그리 얽매이는가? 파멸을 막지 못하면 어차피 모든 게 끝나는데.
- ……그렇군.
자신이 아리에건, 테르한이건 결국 파멸은 오게 된다. 인류가 파멸의 마왕에 얼마나 대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자신이 움직여야 할 가능성이 큰 이상, 정체성을 찾는 일 따윈 나중으로 미뤄도 될 것이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공녀는 창문에 기대었던 머리를 들었다. 창문을 닫자 분열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 단어도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할 말은 다 마친 모양이었다. 공녀는 머리를 가볍게 정돈하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올렸다.
“공녀님. 식사하셔야죠.”
시밀레는 침대에 누워있는 공녀를 조심스레 일으켜 세웠다. 노곤한 팔을 들어 식사를 하다가 손아귀에 힘이 빠져 숟가락을 떨어트린 공녀는 시밀레의 도움으로 간신히 식사를 마쳤다.
‘몸은 이제 정상이 된 게 아닌가?’
- 방 안. 정상. 방 안. 정상.
마왕의 단어에서 의미를 유추한 공녀는 되물었다.
- 방 안에서만 정상이라고? 잠깐 나갔다 온 걸로 힘이 다 빠진 건가?
- 긍정. 긍정.
그제야 공녀를 살아있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 공작이 황제의 허가 하에 황궁 내 건물인 이곳에 대대적인 마법적 장치를 해놓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건물에 머무는 사람의 기력을 회복시키고 급격한 건강상태의 변화를 막는 마법과 모든 식기에 걸려있는 해독의 마법, 마력탈진증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마력을 자연스레 흐트러뜨리는 마법까지.
모두 다 공녀가 공작의 성에서 살 때부터 따라다니던 것들이다.
마법들 덕분에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테르한이 알기로는 애초에황궁에는 마법연구시설이나 훈련장 같은 특정 장소를 제외하면 공간에 대한 마법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고위 공간마법사가 이 건물 수준으로 광범위하게 마법이 걸려있는 공간의 좌표를 특정할 수 있으면 사람 한 두 명은 쉽게 이동시킬 수 있었고, 때문에 외부 침입자를 막기 위해 공녀가 머무는 건물에 마법이 걸려있는 것 자체가 비밀로 취급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공녀의 병이 나았으니 황제는 황궁 안에 있는 이 마법적인 공간을 서둘러 없애고자 할 것이고, 그 전에 최대한 몸을 정상적인 상태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재활을 미루다가는 아까처럼숟가락도 제대로 못 드는 지경이 되어 재활훈련조차 불가능해질 수도 있었다.
‘일단은 걷기부터 해야 하나?’
다행히 영양 상태는 눈에 띌 만큼 좋아졌고, 체내 마력의 흐름이 원활하여 몸이 가벼웠다. 아까 방전되다시피 했던 공녀는 식사 후 금세 기운을 차려 당장이라도 침대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부족한 것은 근육뿐.
공녀는 잠옷이나 다름없는 얇은 옷을 벗고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밀레를 불렀다.
조금만 쉬어도 금세 괜찮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시밀레를 대동하고 건물 주위를 따라 펼쳐져있는 정원을 세 바퀴나 돈 공녀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시밀레가 안하던 짓을 하는 공녀에게 걱정의 눈빛을 보내는 것도 모른 채 알이 밴 다리를 주물 거렸다.
손아귀 힘이 부족해 근육이 풀어지기는커녕 손에 쥐가 날 지경이 되자 공녀는 한숨을 쉬었고, 공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시밀레는 다리를 정성스레 마사지 해주었다.
“공녀님. 너무 무리하시면 안돼요.”
꽃다운 소녀가 자신을 정성스레 돌봐주는 일은 테르한에겐 낯선 설렘을, 아리에에겐 익숙한 부채감을 안겨주었다.
두 개의 상반된 감각이 살짝 간지러운 느낌을 자아내어 공녀는 시밀레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고마워, 시밀레. 그리고 미안해.”
“아이 참.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앞으로 몇 바퀴 더 돌아야 돼.”
“…….”
공녀가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어제와 오늘의 식단을 떠올리는 시밀레를 뒤로 한 채 공녀는 벤치의 등받이를 짚고 일어났다. 역시 아까 먹은 과자가 이상하다고 결론 내린 시밀레는 이미 건물 모퉁이를 돌고 있는 공녀를 허겁지겁 쫓아갔다.
그 뒤로 둘은 건물 주위를 일곱 바퀴 더 돌고 공녀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건물과 방에 걸려있는 마법의 효과로도 회복이 안 될 정도로 다리가 벌벌 떨려왔다. 간단하게 씻은 공녀는 당장 내일의 근육통이 걱정이었지만 어깨를 풀고 있는 시밀레에게 차마 다리를 주물러달라고 하지는못했다.
한동안 어깨를 돌리던 시밀레는 말없이 침대를 탁탁 두드렸고, 공녀는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시밀레는 누워있는 공녀의 몸을 뒤집고 그녀의 발목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이어지는 무자비한 마사지에 공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야! 시밀레! 아파! 으읏!”
“얌전히 계세요. 내일 업힌 채로 다니고 싶지 않으시면.”
공녀가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는 용병 출신 아버지와 검사 지망생인 남동생 둘마저 두 손을 들게 만드는 시밀레의 손맛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었다.
결국 공녀는 녹초가 되어 저녁도 거르고 기절하듯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