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제 2 장. 마력각성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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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점심식사로는 다소 간소하게 2인분을 먹어치운 공녀는 방 한 가운데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꼬아 근육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지만 테르한이었을 시절에는 정신을 집중할 일이 있었으면 항상 해오던 자세라 마음은 되레 평안했다.
‘우선 마력을 느낀다.’
절대다수의 마법 사용자들처럼 지금까지는 체내에 쌓은 마력으로 신체강화마법을 사용해왔던 테르한에게는 체내가 아닌 대기 중에 퍼져있는 마력을 잡아내는 일은 뜬구름 잡기만큼 어려웠다.
마치 해파리처럼 투명한 몸으로 수중에 떠있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을 들락날락하는 마력은 쉬이 잡히지 않았고 간신히 붙들어 제어하려고 하면 쉽게 흩어져버렸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 분열! 마력을 각성한 사람은 마력을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 그대는 가끔 내 도움 없이 스스로 해 보는 게 어떤가?
- 시간이 없잖아.
-남이 떠먹여준 실력은 결국 제일 중요한 순간에 발목을 잡게 될 것이거늘.
- 우리가 남이야?
- 에휴. 내가 말을 말지. 일단 방으로 다시 들어가 봐라.
분열의 말대로 창문에서 머리를 거두어들인 공녀는 약간 쌀쌀한 봄바람에 감기라도 걸릴세라 창문을 단단히 닫아두었다.
재차 가부좌를 틀고 앉은 공녀는 머릿속에 어떠한 ‘개념’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분열의 지식이 일부, 공녀에게로 흡수되었다.
마력과 육체, 영혼을 별개로 보는 것은 일반인의 시각. 마력을 깨우친 자라면 그 모든 것의 경계에 의미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마력을 공기처럼 호흡하며 내뱉는다. 마력은 혈액이며 육신이며 정신과 근본이 같다. 그것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것은 나와 하나이기에,
공녀는 살짝 눈을 떴다. 풍성한 속눈썹이 스쳐 눈꺼풀이 간지러웠지만 거슬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직 깨달은 자의 환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력을 움직인다. 아니, 정확히는 마력‘이’ 움직인다. 지금껏 중요한 것은 의지라고 말하는 자들을 내심 비웃던 테르한이었으나 이제부터는 그럴 수도 없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마력을 실제로 다루고 있으니.
마력을 움직인다고 어떠한 현상이 곧장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마력에 특정한 속성을 부여하여 알맞은 이미지로 적절한 양을 적용해야 비로소 마법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신경 쓰지 않는 척 했지만 사실 아까 전부터 약간 거슬렸던 속눈썹을 바람을 머금은 마력으로 살짝 쓸어 올렸다.
하지만 아직 마력을 움직이는 것이 어색해서 눈꺼풀이 통째로 딸려 올라갈 뻔했다.
분열의 조소가 들리는 듯 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방향의 지시가 쉬운 손으로 마력을 움직여보기로 했다.
한동안 손의 연장선처럼 마력을 움직이며 조금씩 그 범위를 넓혀갔다. 실제 수족만큼 마음대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거울 근처에 장식되어있는 꽃의 잎사귀를 바람으로 살짝 건드리는 데 성공한 공녀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닫았던 창문을 다시 연 공녀는 근육 하나 없이 매끈한 팔을 들어 손가락을 권총 모양으로 만들고는 창밖을 조준했다.
용사 일행 중 한 명이었던 총사가 자주 취하던 제스처를 따라 손가락 권총으로 쏘는 시늉을 하며 마력을 모아 바람의 속성으로 바꾼 뒤 앞으로 쏘아 보냈다.
퍼엉
마력과 함께 한껏 압축되었던 공기가 터져나갔다. 창문에서 한참 떨어져있는 나뭇가지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공녀의 팔이 뒤로 한껏 젖혀지다 못해 어깨뼈에서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려왔다.
팔이 빠질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간신히 참은 공녀는 가냘픈 신음을 흘리며 창틀에 머리를 기댔다.
- 살, 살려줘.
- ……그대는 혹시 바보인가?
변명할 수 없었기에 공녀는 침묵했다. 한숨을 내쉰 분열은 마력으로 치료를 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공유했다.
- 저번에 그대를 진찰했던 의사가 사용했던 방법의 원류라 할 수 있지.
- 한 번 해볼게.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살벌한 고통이 어깨를 엄습했다. 최대한 편한 자세로 누운 공녀는 마력을 조심스레 어깨에 집중했다.
마력의 성질을 치유와 재생으로 변환시키는 것에 대한 지식은 분열의 지식을 흡수하여 알고는 있었으나 실제로 시행하는 것은 어려웠다.
어깨뼈가 부서진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뼈마디를 콕콕 찌르는 느낌에 정신집중이 어려웠지만 이를 꽉 문 채 식은땀을 흘려가며 간신히 마력의 성질을 변화시켜냈다.
공기와는 다른 청량하면서도 무거운 흐름이 다친 부위에 스며들며 탈골되었던 뼈가 원상복구 되어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느끼는 것은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경험해볼만한 일이었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리자 공녀는 멀쩡한 왼팔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시밀레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와 소리를 죽여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시밀레는 잠시 공녀의 고른 숨소리를 듣다가 열려있던 창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자는 척 하던 공녀는 시밀레가 나가자 이불 속에서 오른쪽 어깨를 살짝 움직여보았다. 약간의 근육통을 제외하면 이상 없이 나은 모양이었다.
살짝 이불을 빠져나온 공녀는 창문을 다시 살짝 열고 머리를 기댔다.
- 마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대강은 알았어. 그런데…….
-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그대가 품은 의문은 당연한 것이지.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그대의 생각이 맞으니까.
공녀는 대기 중의 마력을 움직여 일일이 속성을 바꾸고 적용하는 것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 가늠하기 어렵고 효과가 미미하다는 것을 알았다.
예컨대 평범하게 마법을 익혔으면 제법 간단하게 방금까지 공녀가 힘들여 해낸 일을 할 수 있었고, 마력을 방출하다가 다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체내에 쌓인 마력이 반작용을 저절로 상쇄시키기 때문이었다.
- 너는 내가…… 우리가 마법을 익힐 필요가 없다고 했지.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마력을 모으고 속성을 바꿔서 적용시키는 그 일련의 행위 자체가 마법을 형성하는 과정이잖아. 그러면 그게 마법을 익히는 거랑 다른 게 뭐야? 게다가 마법은 수천 년 동안 온갖 종족들의 연구를 통해 그 방법을 효율적으로 다듬은 거잖아.
- 정석적인 답안이군. 하지만 마법의 근원이 되는 힘을 다루는 것과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다르다. 세간에서 사용하는 ‘마법’은 말하자면 정해진 시문을 읊는 것. 마력을 다루는 힘은 스스로 글자를 조합해 글이나 시를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공녀는 분열의 설명이 약간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여전히 마법을 익힐 필요가 없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분열의 설명이 이어졌다.
- 우리는 최대한 마법을 배제한 채로 강해져야한다. 다만 생활용 마법들은 얼마든지 익혀도 좋다. 하지만 전투 상황에서 사용하는 마법들은 일체 익힐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분열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공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이유를 알 수 있을까? 굳이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가는 꼴인데.
- 바로 그거라네. 쉬운 길.
- 응?
- 우리의 상대가 누군지 까먹은 것은 아니겠지?
- 파멸.
분열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 고개가 끄덕여져서 당황한 공녀는 창틀에서 머리를 떼었다.
- 그래. 파멸은 폭풍우나 지진 같은 자연재해다. 길 따위는 금방 지워져버리지. 마차를 타고 잘 닦여진 길을 가면 걸어가는 것보다 빠르고 편하지만 그 길이 재해로 무너지고 진흙탕으로 변했다고 생각해봐라. 마법을 쓰지 않고 마력을 다루는것은 그때를 대비해서 산길이나 진흙탕, 사막도 다닐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라.
분열의 말에 공녀는 머리를 굴렸다.
마법을 마차와 길에 비유한 것이니 파멸이 길을 파괴한다는 것은 파멸이 무슨 수를 써서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한다는 뜻일 것이다.
공녀는 그 추측에서 상상하기도 싫은 결론을 내렸다.
- 그러니까 네 말은, 파멸한테는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거야?
- 이제제법 말을 알아듣는군.
-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했어야지! 엄청 심각한 문제 아니야?
- 이봐. 나는 이래봬도마왕이라고? 마왕이 다른 마왕의 비밀을 언급할 때는 은유와 비유로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 표현하는 것이 매너란 말이다.
쯧쯧 거리며 혀까지 차는 분열에게 기가 막혀 말문까지 막힌 공녀는 창문을 닫고 침대에 웅크렸다.
마왕끼리의 매너같은 것도 있었나.
아니, 그것보다는 파멸에게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귀중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정보를 손에 넣은 것이 중요했다. 정보의 진위여부는 굳이 판단하지 않았다. 분열이 가진 확신이 영혼의 단위로 공유되고 있었다.
그저 납득할만한 설명이 필요했을 뿐.
‘마법이 통하지도 않고 하늘과 땅을 가른다는 마왕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건가?’
테르한은 용사 일행으로써 마족의 군대와 장군들을 물리쳤으며 마왕을 상대로 장시간 실력을 겨룰 정도로 인간계에서 손꼽히는 강인한전사였다.
제국 기사단의 촉망받는 생도였던 그는 당시에도 어지간한 귀족 휘하의 기사와 겨루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고, 사고로 몸의 절반을 잃었지만 개조 수술을 받은 뒤 인간으로는 범접하기 힘든 신체를 가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한정된 인원만이 선택받는 용사의 일행이 될 수 있었다.
그랬던 그였지만 파멸과는 어떠한 전투를 해야 할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하늘과 땅을 가른다는 표현이 엄청난 힘에 대한 과장일까, 아니면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 마법 또는 능력을 가졌다는 뜻일까.
어느 쪽이 되었든 고대의 수많은 종족들을 몰살시키고 수십 개의 나라를 지도상에서 지웠으며 대륙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양분하는 거대한 협곡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최초의 마왕, 파멸은 도저히 상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고 있자니 이마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창문을 열고 바깥바람을 쐬며 공녀는 버릇처럼 창틀에 턱을 괴었다.
“내 능력으로는 못 막을 거 같은데. 그냥 포기할까.”
- !!
공녀의 자조적인 말에 분열은 당황했다. 마왕이었던 분열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공녀의 생각을 읽은 분열은 그가 진심으로 포기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은연중에 파멸이고 나발이고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여차하면 내가 직접 나서야 할 수도 있겠군.’
분열은 일단 테르한을 구슬리며 시간을 벌기로 했다. 현재 그들의 영혼이 테르한의 거대한 영혼그릇을 기초로 섞여있는 만큼 지금 당장 그에게서 몸의 지배권을 가져오기는 힘들었다.
아리에의 영혼이 성장해서 적당한 영혼그릇을 갖추는 동안 섞여있는 영혼을 분리하는 방법을 찾아야했다. 테르한이 계속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그의 영혼을 이 몸에서 배제해야 할 수도 있다.
‘마력각성을 한 신체는 잘 단련하고 몇 가지 조건이갖추어지면 파멸조차 막을 수 있다. 이 몸을 놀게 놔둘수는 없지.’
생각을 정리한 분열은 아직도 늘어져있는 공녀를 독려했다.
- 그런 소리 말게. 지금 당장 파멸을 막으라는 것도 아니니, 일단 강해지는 것부터 생각하는 것이 어떤가? 그대는 검의 길을 걸었던 몸이니 흥미가 없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 마력의 운용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이 몸으로도 충분히 검의 극의를 볼 수 있다네.
- 음…….
분열의 말대로 테르한은강해지는것에 흥미가 있었다. 게다가 몸이 약했던 아리에 역시 강한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있었기에 공녀는 분열의 제의에 속는 척 넘어가주기로 했다.
- 그러면 네가 쓰던 검술, 가르쳐 줄 수 있어?
- 내 검술? 아, 내 ‘육체’의 검술 말이지. 흐음. 안 될 것 없지. 실제로 몸을 움직여본 적은 없지만 설명할 수는 있다.
- 아, 너 분열의 영혼이었지.
공녀에게서 약간의 실망감이 느껴져 분열은 순간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자신이 마왕이었을 시절에는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분열의 마왕답게 자신의 영혼과 정신은 테르한, 아리에와 철저히 분리해왔지만 인간의 몸으로 지내는 동안 그들의 감정에 휩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너무 감정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철저히 뒤에서 숨어있어야 하는 입장. 혹여나 내가 이 몸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
공녀는 일생동안 공작의 성과 황궁에만 갇혀 지내서 마땅히 몸을 위탁할만한 곳도 없었다.
공녀의 몸에 자리 잡고 있는 영혼이 이상하다는 것이 들킨다면 황실은 물론 공작가에서도버려질 테고, 공녀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분열은 정화의 진에 영혼이 정화되어 공녀의 몸에는 마왕의 낙인은 찍혀있지 않지만 영혼계열 마법을 익힌 뛰어난 마법사나 고위 성직자들이라면 공녀의 몸 안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은 철저히 뒤에 숨어있어야 한다.
- 내가 직접 검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육체와 기억 공유는 철저히 해왔다. 검을 주면 잠시 몸을 빌려 검술을 시연할 수는 있겠지.
- 음. 그러면 일단 몸부터 만들어야겠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공녀에게 검을 빌려줄 리 없으니.
- 그래. 그러니까 우선 많이 먹고 움직여라. 그리고 음식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신체를 강화하는 방법도 가르쳐줄테니, 그대가 직접 해봐라.
- 알겠어. 일단 강해지면 손해 볼 일은 없으니까.
고개를 주억거리던 공녀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생각했다.
- 아참, 설마 파멸을 나 혼자 막으라는 것은 아니겠지? 혼자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올 거 같은데.
- 파멸은 혼자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몸을 단련하면서 유망한 인재들을 모으고 그들을 어떻게는 납득시켜 마법 대신 마력을 다루는 방법을 익히게 한다. 일단 기본적인 목표는 그것이다.
공녀는 수긍했다. 싱숭생숭했던 마음을 다잡고 다시 마력을 다루는 연습을 하기 위해 창문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공녀의 눈에 낯선 누군가가 들어왔다.
‘소년?’
조그마한 이 건물의 볼품없는 정원에는 길쭉하기만 한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있었다. 그 나무의 그림자에 몸을 반쯤 숨긴 소년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공녀와 시선이마주치자 소년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나무그늘에서 나와 건물의 정문으로 향했다.
- 안 좋은 느낌이 드는군.
분열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