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제 2 장. 마력각성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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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건물로 들어선 마차의 주위에는 기사들이 도열해있었다.
테르한의 기억에 남아있는 얼굴들도 군데군데 보였는데 하나같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황자에게 끌려가는 공녀를 보고 있었다.
‘황자전하는 또 무슨 일을 저지르는 거지?’
‘저 꼬마아가씨는 누구야?’
곳곳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황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건물로 들어섰다.
정신없이 황자에게 끌려가던 공녀는 문 옆에 ‘용사·마왕 연구소’라고 새겨진 문패를 확인했다. 방금 용사와 마왕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건물이 그에 관한 건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 제기랄, 인간 놈들. 이런 시설을 준비하고 있었군.
분열은 ‘정화의 진’이 어디에서 개발되었는지 알아차렸다.
그 위험성을 모르는 인간들이 지금까지 정화의 진으로만 물리친 마왕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그 숫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두 명 이상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황자가 건물로 들어서자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가볍게 손만 들어 인사한 황자는 건물의 1층 깊숙한 곳에 있는 방으로 공녀를 데리고 갔다.
방문 앞에는 말끔한 인상의 청년이 대기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황자전하.”
“그래. 밖에 있는 기사들 들어오라고 해. 방 밖에서 잘 대기시켜. 그리고 옆방의 성직자님도 불러와줘.”
“예.”
대답을 마치고 바로 옆방에 노크를 하는 그를 뒤로 한 채 황자는 공녀를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정신없지?”
“이게 대체, 무슨 짓, 인가요?”
공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황자가 빠른 걸음으로 억지로 잡아끈 덕분에 보폭이 짧은공녀에게는 가벼운 달리기가 되어버렸고, 지금의 몸 상태로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미안. 하지만 중요한 일이라.”
황자는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눈은 공녀를 낱낱이 파헤치려는 듯 그녀의 두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순간 마력의 흐름과 함께 공녀의 몸을 감싸는 마력의 장막이 느껴졌다. 공녀는 본능적으로 마력을 밀어냈다.
“내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군. 역시 이런 건 전문가가 해야지.”
황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오는 사람을 본 공녀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엘레나’
용사의 일행이었던 성직자였다.
분열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테르한의 육체에 정화의 진을 사용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자신을 죽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테르한은 그녀를 원망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심지어 자신에게 마왕의 낙인이 찍혔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좋아했었지만.’
고결하고 아름다운 그녀를 마음에 품은 적도 있었지만 인간이라 부르기 힘든 자신에겐 과분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이전의 육체에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를 본 순간 설레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용사와 마왕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리에라면 이 분도 좋아할 수 있을 거야. 소개하지. 용사의 일행으로 얼마 전에 마왕을 물리친 성직자 엘레나 님이야. 다른 사람들은 아직 도착 못했지만 특별히 빨리 와주셨어.”
엘레나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왕의 낙인이 찍혀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발견되었다는 전갈을 듣고 다른 일행들보다 서둘러서 귀환했다.
인근에 있는 강력한 마의 기운을 탐색하는 탐색의 진이나 영혼을 통째로 정화시켜버리는 정화의 진은 그 구현 방식이 까다롭긴 해도 고위 성직자들이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었지만, 마왕의 낙인을 알아보는 것은 선천적으로 마(魔)의 기운에 민감한 사람만이 가지는 능력이었다.
애초에 어린 나이의 중급 성직자인 엘레나가 용사의 일행이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당장 엘레나를 제외하면 누가 그런 능력을가지고 있는지 알려진 바가없어 황궁에서는 공녀가 마력을 각성하자 급히 엘레나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제즈릭 공녀님. 최근 마력을 각성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엘레나와 1년간 같이 행동했던 테르한은 그녀의 표정과 말투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한없이 진지하고 심각했다.
“네. 며칠 전에…….”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공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엘레나가 빠르게 다가왔다. 그녀는 공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정신을 집중했다. 신성한 기운이 머리를 통해 들어와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결과는 어떻소?”
“마왕의 낙인은 없습니다.”
황자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렇다면 공녀는 스스로 마력 탈진증을 고치고 마력을 각성했단 말이오?”
“그게…….”
엘레나는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누군가가 공녀의 영혼과 섞여있다고.
마왕은 아니었다. 정갈하고 단련된 영혼이 여리고 부서질 것 같은 영혼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익숙함이 느껴졌다.
‘그럴 리 없지.’
그는 자신의 손으로 정화했다.
정화란 영혼을 죽이는 술법이지 다른 곳으로 보내는 술법이 아니었다.
일행이었던 그의 영혼을 정화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슬프고 힘들었던 탓에 비슷한 영혼이 보이자 조금 착각한 것이리라.
“흐음. 성직자님이 대답하기 힘든 일이오? 가령…….”
“마왕의 낙인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약간 불확실한 부분이 있어서.”
황자의 주문은 ‘마왕의 낙인이 찍혀있는지 여부의 판별’이었기 때문에 엘레나가 전부 대답해야할 필요는 없었다.
“공녀님이 마력을 각성한 이유는 영혼이 안정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마력 탈진증은 희귀하긴 하지만 극히 드문 병은 아니었으나, 어렸을 적에 걸린 사람들은 두 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대부분 합병증으로 사망하기에 세간에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마력 탈진증이 나아서 마력을 각성했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성인이 되기 조금 전에 증상이 발현되어 짧은 기간 동안 병에 걸렸다가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레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아닌 경우는 거의 다 마왕의 낙인이 찍힌 자들이었지.’
날 때부터 마력 탈진증을 앓아오다가 어렸을 때 치료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슈펜하겐 왕가 마지막 왕의 둘째 왕자, 여덟번째 마왕 ‘복수’. 마왕이 되자 자신의 손으로 왕국을 직접 끝내버렸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열세 번째 마왕 ‘망각’은 마력을 각성한 8살짜리 수인족 소녀의 몸에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정화되어 다음 마왕 ‘은닉’을 바로 불러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비교적 최근. 56년 전 등장한 열아홉 번째 마왕 ‘원죄’ 역시 어렸을 때 마력을 각성했다고 알려진 케이스였다.
따라서 아리에 제즈릭 공녀가 마왕의 낙인을 지니고 있지도 모른다는 황자의 추론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공녀의 영혼에 씌워진 것은 그가 예상하던 파멸이 아닌 분열이었고 마력 탈진증이 나은 것은 테르한의 영혼 덕분이긴 했지만.
“상정한 가장 좋은 결과는 아니지만 그 다음으로 좋은 결과로군. 파멸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상대할 핵심 전력이 될 사람을 찾았으니.”
만족스럽게 말을 마친 황자는 공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챘다. 황자는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쏘아보는 공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봤지만 그녀의 화를 돋울 뿐이었다.
“황자전하.”
“그래, 리에.”
“제가 마력을 각성했다는 것은 어떻게아셨죠?
“뭐, 간단한 정보 조사지.리에의 주치의는 이쪽과도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으니.”
“그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아셨죠?”
“그것 역시 간단한 정보 조사지. 리에가 무슨 동화책을 가장 많이 읽는지는 공작가에서 그다지 비밀도 아니었다고?”
공녀는 이를 악물었다. 저 능글맞은얼굴에 진심으로 주먹을 꽂아주고 싶었다.
“만약 저에게 마왕의 낙인이 있었다면…….”
“정화의 진으로 리에의 영혼을 정화시켰겠지?”
황자의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열 살짜리 꼬마에게 친근한척하며 ‘네 영혼에 이상이 있었으면 바로 없애버렸을 거란다’라는 말을 태연하게 하는 작자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저를 납치해놓고 여차하면 없애버릴 계획을 짜신 것에 대해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공녀의 말에 황자는 양팔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없다.”
“진심으로?”
“물론. 세계를 위해서니까.”
후우. 공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에서 사과조차 하지 않는, 상식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그럼 황후마마님께 이 일을 알려도 되겠지요?”
그제야 황자가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으음……. 혹시원하는 거 있어?”
황자도 아직 어려서 그런지, 황후 얘기가 나오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공녀는 황자와 엘레나가 감탄할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 대만 때릴게요.”
마력을 가득 실은 공녀의 손바닥이 황자의 안면에 작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