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제 2 장. 마력각성 - 5
- 11 -
“가히 세계를 평정할 따귀였다. 이 정도면 마왕조차 한 방에 보낼 수 있겠어.”
황자는 사용인이 가져다준 얼음주머니를 왼뺨에 올린 채 부정확한 발음으로 평가를 내렸다. 당사자인 공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다과를 섭취하고 있었다.
‘주먹으로 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이자식아.’
약 십분 전, 부어오른 왼뺨을 감싸 쥔 채 황자가 방을 나오자 복도에서 긴장한 상태로 대기하던 기사들은 전원 움찔했다.
엘레나가 치료해주겠다며 따라왔지만 황자는 ‘훈장’이라고 기세 좋게 말했다. 그러다 바로 뒤에 나온 하늘색 머리의 소녀가 눈을 흘기자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 중 공녀가 머무는 건물에서 경비를 선 적이 있던 기사가 그녀를알아보았고 그녀의 신분이 밝혀지자 황궁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기사들은 대략적인 상황파악을 끝냈다.
별 일 없이 상황이 종료되자 그들은 곧 기사단으로 복귀했다.
“내가 리에를 여기로 데려온 것은 마왕의 낙인을 확인하려고 했던 것도 있었지만, 자세한 소개를 해주기 위해서 그런 것도 있었어. 사실 너에게 마왕의 낙인이 없을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거든.”
“그건 어째서죠?”
“비-밀.”
얄밉게 혀를 내민 황자를 향해 공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는 살짝 몸을움츠렸다.
공녀를 응접실로 안내한 황자는 이 시설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 용사·마왕 연구소는 이름이 여러 번 바뀌긴 했어도 역사가 깊은 연구기관이었다. 성검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초대 용사가 설립한 기관으로 성검에게서 알아낸 정보를 기반으로 용사와 마왕에 대한 각종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제국과 그 제후국들의 내로라하는 지성인들 중 용사, 마왕에 대한 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이곳 소속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대략적인 설명을 끝낸 황자는 얼음주머니를 문지르며 근엄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이번 대의 ‘용사’이자 현재 이곳의 총 책임자라는 말이지.”
“이번 대의 용사라고요? 용사는 아, 마왕을 물리친 용사가 따로 있지 않나요?”
하마터면 거의 대외비 취급받고 있던 용사의 본명을 말해버릴 뻔했다.
테르한은 분열을 물리친 용사 아펠과 동료이자 사제지간으로 1년을 넘게 같이 생활해왔다. 그런데 황자가 뻔뻔하게 자신을 용사라고 칭하니 어이가 없었다.
“맞아. 엘레나 성직자님이 일행으로 있던 용사는 스무 번째 마왕을 물리치고 지금 돌아오는 길이야. 엘레나 성직자님은 황실의 특별 요청으로 빨리 오셨지만 나머지 일행이 제도에 도착하려면 모레는 되어야 한대. 내가 나를 용사라고 한 이유는 차차 알게 될 거야.”
어느새 황자의 부어올랐던 뺨은 불긋한 손자국만 남아있었다. 황자가탁자에 놓여있던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국을 확인하고 있자 괜히 신경이 쓰인 공녀는 황자에게 제안을 했다.
“치료해 드릴까요? 치유 마법은아니지만 마력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약간 익혔어요.”
“응? 아니, 괜찮아. 아까 말했잖아? ‘훈장’이라고.”
“제가 불편한데…….”
순간적인 분노로 싸대기를 날리긴 했지만 엄연히 황실 모독죄가 성립할 수 있었다.
황자의 의도는 어찌 보면 공공의 이익을 위한것이었고, 공녀가 날린 따귀는 개인적인 복수였으니 명분조차 황자가 가지고 있었다.
“그래. 불편하라고 놔두는 거야.”
“네?”
황자가 씨익 웃었다. 공녀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난 지금부터 아버님을 알현하러 갈 예정이거든. 이 자국을 최대한 보존해서.”
“뭐라고요?”
“아버지 황제께선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아들아, 얼굴 꼬락서니가 그게 무어냐?’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할 거야. ‘제즈릭 공녀에게 따귀를 맞았습니다.’라고.”
“…….”
공녀는 주먹을 쥐었다. 자제하기 힘든 분노가 마력으로 바뀌려는 찰나, 공녀의 눈치를 보던 황자가 재빨리 말을 꺼냈다.
“만약 리에가 이 연구소로 들어와서 앞으로 세상을 집어삼킬 마왕을 막는 핵심전력이 되어준다면, 이번 일은 전부 내 잘못으로 해둘게.”
공녀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아까부터 침묵하던 분열이 의견을 말했다.
- 나쁘지 않다. 오히려 이쪽에서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군. 다만 저 황자놈은 그대를 마법사로 생각할 텐데 그것만큼은 부정해두어라. 파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그 비밀을 넌지시 알려주어 마법이 쓸모없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 알았어. 일단 마법은 익히지 못한다는 설정으로.
- 내가 도와주지. 내친김에 그대가 마법적인 지식을 익히지 못하도록 하겠네. 그 편이 속이기도 쉽고 수련하는 데 방해도 되지 않을 거다.
- 그런 게 가능해?
- 물론. 마법은 시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대의 기억이라는 도서관에서 마법에 관련된 책들을 몰래 숨겨두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
곰곰이 생각하는 척 하며 분열과 대화를 마친 공녀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는 만족해하며 수첩을 꺼내들었다.
“일단 마력각성자는 찾았고…….”
“잠시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응? 무슨 일이지?”
공녀는 살짝 입술을 축였다. 거짓말을 하려면 입에 침이라도 바르라고 하지않던가.
“전 마법을 익힐 수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지금까지 마법적으로 제약을 많이 받아와서…….”
공녀는 말하는 도중 살짝 입을 가리고 헛구역질이 나온다는 표정을 했다.
공녀가 연기하고 있는 것은 ‘마력 탈진증을 고치기 위한 마법이 몸에 지나친 제약을 걸어서 마법에 트라우마가 생겨 익힐 수 없는 가녀린 소녀’였다.
공녀가 혼신의 연기를 펼쳤지만 황자는 수첩만 들여다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아, 그거 때문에? 그래, 뭐. 마법 따위 알게 뭐람. 마법 같은 거 익힐 필요 없어요, 아리에 양. 걱정 마. 요즘 세상이 좋아져서 마법 같은 거 몰라도 살만해.”
“어…….”
추가적인 변명거리를 말하려던 공녀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태초의 마왕은 마법의 창시자라고 알려져 있거든? 그런 놈에게 마법은 안 통하겠지. 네가 마법사 역할을 할 필요는 없어.”
- 허어. 저 황자놈은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아니, 내가 인간을 얕보고 있었나보군. 하긴. 모든 인간들이 그대 같지는 않겠지.
- 그게 무슨 뜻이야?
- 아무것도 아니다.
공녀는 목을 가다듬었다. 황자가 자신에게 원하는역할이 마법사가 아니라면 원래의 계획대로 마력을 다루는 수련을 할 명분이 생긴다.
“그렇다면 저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죠?”
황자는 수첩을 닫고 공녀와 눈을 마주쳤다.
“최대한 강해져라.”
황자의 눈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으나 황자는 어린 나이에 마왕과 맞서는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사상 최강, 최악의 마왕이 강림할 예정이다.
아리에 제즈릭 공녀는 그가 ‘핵심전력’이라고 말한 마력각성자였다.
황자와눈싸움을 하던 공녀는 입꼬리를 살짝올려 미소를 지었다.
“분부대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공녀는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러모로 지친 모양이었다.
최고급 마차는 안정적인 승차감을 선사했지만 마차가 모퉁이를 돌때마다 공녀의 몸이 이리저리 기우는 것은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황자는 조용히 공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허공에서 방황하던공녀의 머리가 황자의 팔뚝에 닿자 공녀는 살짝 눈을 뜨는가 싶더니 도로 잠에 빠졌다.
황자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기울여 공녀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잘 부탁해. 아리에.”
‘네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 자리에 있는 공녀는 전에 만났던 다 죽어가던 소녀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나 영혼적으로나.
실수로 황궁 한 구석에 틀어박혀있던 공녀가 알 리 없는 정보를 말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영혼의 성장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엘레나가 무슨 의도로 그 사실을 숨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공녀는 마왕의 낙인은 찍혀있지 않은 마력각성자였다.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마차가 멈췄다. 황자는 공녀의 머리를 살며시 등받이에 기대놓고 맞은편으로 돌아갔다.
노크소리에 공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입가를 소매로 슥 문질렀다. 다행히 침을 질질 흘리는 추태는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잘 잤니?”
황자가 웃으며 말을 건네자 공녀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방심해선 안 되는 상대에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한 반성을 짧게끝낸 공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마차가 아주 좋네요. 너무 편해서 그만.”
“하핫. 하나 선물해줄까?”
다시 한 번 노크소리가 들려왔고, 공녀는 마차 손잡이를 돌리며 문을 열었다.
“황공하오나 사양할게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공녀는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마차 옆에 서있던시밀레가 공녀의 행동을 나무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실랑이를 벌이던 그들은 황자에게 인사를 한 뒤 함께 건물로 들어갔다.
공녀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황자는 사람을 불렀다. 호위를 하던 기사 중 한 사람이 열려있는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 연구소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
황자는 문을 닫고 창문을 열었다.
“폐하를 알현하겠다.”
“알겠습니다. 중앙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잠시 후 마차가 출발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봄바람을 즐기며 황자는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자신과 아리에가 있었다.
황자는 그 점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정말 별 일 없으셨어요? 조금 늦으신 것 같은데.”
“별 일 없었다니까. 그냥 황궁 한 바퀴 돌고 황자전하가 일하는 곳 둘러보고 오느라고 시간이 좀 걸린 거야.”
거짓말은 아니었기에 공녀는 당당했다. 정화당할 뻔했다는 말은 굳이 꺼낼 필요가 없었다.
“황자전하가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아직 열네 살이신데 일을 하신다고요? 교육을 받으시는 게 아니라?”
시밀레는 들어오자마자 거의 이 건물에서 혼자만 일을 해서 그런지 황궁내 소문에 다소 어두웠다. 그래서 황자가 열 살 때 무렵부터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테르한은 제국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 나온 잡담에서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었다.
1황자는 모종의 사건 이후로 황태자의 직위를 동생에게 넘겼으며 아무런 교육조차 받지 않는다. 설명만 들으면 1황자가 황제의 눈 밖으로 났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는 1황자가 남들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었다.
- 그 사건이라는 것, 아마 성검과 관련이 있겠군.
- 그렇겠지. 자기 자신을 용사라고 했으니 성검이 1황자를 용사로 선택한 모양이네. 그런데 용사가 한 시기에 두 명 이상 존재할 수 있나?
아펠은 분명히 용사였다.
성검의 힘을 행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아왔고 분열의 육체는 아펠이 사용한 성검의 힘 때문에 파괴되었으니 아펠 또한 용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나는 모른다. 그건 인간인 그대가 더 잘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용사의 동료였지 않은가.
- 나도 몰라. 나중에 황자가 설명해주겠지.
분열과 대화를 나누던 중 방에 도착했다. 분열은 별 다른 말이 없었고 공녀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언제나 느껴지던 영혼의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 어?
- 방에 걸려있던 마법들이 풀렸군.
황제가 손을 쓴 모양이었다.
방 안에 있어도 분열과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들이 안 좋아졌다.
일단 자동적으로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마법이 건물 전체에서 사라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 아직 단련은 시작도 안했는데!
- 어쩔 수 없지. 그대는 고생을 할 팔자인가 보군.
손발을 대충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공녀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벌써부터 무기력감이 몰려왔다.
의욕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공녀의 몸은 워낙 지치기 쉬운 편이었다. 아까 마차에서 잠깐 눈을 붙인 정도로는 오늘의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해소되지 않았다.
- 어이. 일어나게나. 벌써부터 이 모양이면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인가?
- 지금 말할, 아니 생각할 힘도 없으니까 이따가 저녁 먹고 얘기하자.
공녀는 그대로 잠들었다. 육체를 공유하는 분열 역시 잠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