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제 2 장. 마력각성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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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2인분을 먹은 공녀는 시밀레의 걱정하는 눈빛을 애써 무시하고 옷장에서 트레이닝복을 찾아 입고 정원에 있는 공터를 찾아갔다.
그곳은 그야말로 황궁의 제일 구석이라 할 만한데, 일반적인 담장이 아닌 거대한 성벽이 눈앞에 우뚝 솟아있었다.
“후우.”
혹시 몰라 사용인들에게는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으나 공녀가 쓰러질까봐 걱정이 된 시밀레는 멀리서 지켜보겠노라고 했다.
공녀도 딱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저 정도 거리라면 공녀가 마력을 수련하는지 달밤에 체조를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걸어오면서 체내의 음식물들을 마력으로 치환하여 온 몸으로 돌리는 연습을 계속 했다.
처음이라 그런지 분열이 하던 것보다는 당연히 효율이 떨어졌고, 그리 만족할 만큼의 마력이 쌓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침과 점심에 분열이 축적한 마력의 양이 상당해서 그것만으로도 제법 움직여야 할 판이었다.
- 준비됐어.
- 체내에 쌓인 마력을 단련할 신체 부위에 꽉 채운다는 느낌으로 움직여봐라.
우선 하체를 단련하기로 한 공녀는 발끝부터 마력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마력을 다루는 것이 능숙하지 못해 발바닥을 통해 모아놓은 마력이 통째로 빠져나갈 뻔했다. 오늘 치 마력을 간신히 지켜낸 분열은 공녀에게 힌트를 주기로했다.
- 이미지가 중요하다. 음. 그대의 기억 속이 이런 게 있군. 이걸 참고해라.
공녀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임관 시험 직전의 기숙사. 동기들과 술판을 벌이던 때였다.
기숙사에 술잔이 있을 리 만무했고 조그마한 물 컵에 술을 따르는 것 자체가 귀찮았던 그들은 각종 그릇을 동원해 술을 마시다가 결국에는 부츠에 술을 담아 마시기까지 했다.
아, 추억이여.
- 우웩, 저거 나는 안 마셨는데.
-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대의 발이 컵이고 마력이 술이다.
공녀는 다시 한 번 마력을 발끝으로 보냈다.
발을 감싸고있는 신발, 그 안쪽의 살가죽을 감지하며 경계를 그려나갔다.
발은 컵이다. 마력은 술이다. 발은 컵이다. 마력은 술이다. 마력은 술이다. 술이다…….
‘어라?’
공녀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몸에 열기가 올랐다. 세상이 한 바퀴 빙글 돌았다.
털썩
공녀는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 그대는 참으로 대단하구려. 이건 존경할 수밖에 없군.
공녀는 마력을 술기운으로 바꾸는 데 성공해버렸다.
실제로 마력이 알코올 성분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물의 기운에 가까워진 마력과 저녁에 먹었던 과일들이 소화가 덜 된 채 뱃속에 남아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거기에 근 몇 달 간 술을 입에도 못 댄 테르한의 사심이 약간 들어가자 온 몸에 꽉 차있던 마력은 술과 비슷한 속성을 띠게 되어 어린 공녀의 몸에 즉효성 취기를 유발했다.
- 그대는 어쩌면 하나의 마법을 창조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술의 마법이라. 파멸이 애주가였던가?
- 좀 조용히 해줄래? 머리 아파.
저 멀리 대기하고 있던 시밀레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시밀레가 언제부터 벽을 타고 다녔지? 벽에는 웬 풀이 자라고 있고.
- 이러다간 앞으로 외출도 못하겠군. 어쩔 수 없지.
이 와중에 멀쩡한 분열은 온 몸에 퍼져있던 술의 기운을 물의 기운으로 되돌렸다.
다시 정신을 차린 공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녀님!”
시밀레가 헐레벌떡 달려와 공녀의 양팔을 붙들었다. 공녀를 이리저리 살핀 시밀레는 그녀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균형 잡는 연습을 하다가 넘어졌어,”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시는 게 좋겠어요.”
- 어쩔 수 없지. 방에서 계속한다.
공녀는 분열과 시밀레의 말에 동시에 긍정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밀레는 공녀가 또 넘어질세라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걸어갔다.
방에 도착한 공녀는 목욕을 마친 뒤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만 잘게.”
이른 저녁이었지만 공녀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
이대로 자는 척을 해서 시밀레를 내보낸 뒤 조용히 방에서 단련을 할 셈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불편하신 데 있으면 바로 알려주세요.”
“응. 시밀레도 잘 자.”
“네.”
시밀레가 문을닫자마자 공녀는 조용히 일어났다. 침대의 모서리에 걸터앉아 땅에 닿지 않는 두 다리를 늘어뜨린 공녀는 아까 하지 못했던 다리에 마력 채우기부터 다시 시작했다.
‘물이다. 물로 채운다.’
술이 아니었다. 물이었다. 물의 기운을 띤 마력을 발끝부터 채워 넣는다. 피부를 경계로 마력이 새어나가지 않게 주의하며 조심스레 골반 바로 아래까지 마력을 채워 넣은 공녀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쳤다.
- 나쁘지 않군. 이제 그대로 육체의 단련을 해야 하는데…….
- 나도 몸의 단련은 많이 해봤어. 걱정 말라고.
소리를 내면 안 되기에 달리기나 점프는 할 수 없었지만 앉았다 일어나기 정도는 가능했다.
그렇게 달밤의 스쿼트가 시작되었다.
도중에 마력의 집중이 풀려서 그리 많이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운동은커녕 걷기도 힘들었던 몸으로 한 시간 넘게 앉았다 일어나기를 했는데도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 땀이 안 흐르니까 제대로 운동이 된 건지 모르겠네. 다리도 하나도 안 아프고.
- 지금 몸에 머무는 마력이 물의 기운을 띠고 있어서 땀이 나오는 대신 그 성분이 체내에서 정화된다. 운동이 됐는지 안 됐는지는 마력을 빼보면 알게 될 거다.
공녀는 다시 침대에걸터앉아 다리에 남아있던 마력을 서서히 몸으로 끌어올렸다. 마력의 성질이 다소 점성을 띠고 탁해진 느낌이었다.
- 한 번 쓴 마력은 외부로 방출하는 게 좋다. 겸사겸사 공격용으로 쓸 수도 있지. 아침에 그대가 바람의 마력을 창밖으로 쏜 것처럼.
- 공격용으로 마력을 쓰는 건 나중에 익힐게.
- 그래. 어차피 대단한 공격은 아니니 굳이 익힐 필요는 없다.
공녀는 조심스레 창문을 열고 마력을 천천히 방출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꿀렁거리며 손끝으로 마력이 나가는 느낌이 재미있었다.
- 이거 이 아래에 쌓이는 거 아니야?
- 아니. 마력은 바람이나 물과 같아서 그대의 성질을 짙게 품은 저것도 밖으로 나온 이상 금세 성질을 바꾸고 다른 곳으로 가겠지. 걱정할 것 없다.
마력의 방출을 마치고 창문을 닫은 공녀는 갑자기 엄습한 고통에 다리를 감싸 쥐었다.
“끄으아아……. 읍!”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해서 손으로 입을 막은 공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발버둥 쳤다.
- 예상보다 반작용이심하군. 역시 몸이 워낙 약해서…….
- 닥치고 어떻게 좀 해봐!
- 허어. 그대는 정녕 내 육체와 정면으로 맞선 검사가 맞는가?
- 나 죽는다고!
생도시절 완전 군장에 갑옷을 입고 수십 킬로미터의 산길을 뛰어서돌파했을 때도 이 정도로 다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테르한의 몸이었다면 이 정도 고통도 버틸 수 있었을 테지만 자신의 몸은 아리에 제즈릭 공녀였다. 고통을 인내하는 한도가 명확히 차이 났다.
- 몸에 남아있는 마력을 다리로 보내라.
공녀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몸에 남아있는 마력은 물론 대기 중에 퍼져있는 마력까지 끌어와 다리로 보냈다.
고통이 크게 완화되며 한숨을 돌린 것도잠시, 집중이 풀어진 사이 마력이 흐트러졌고 다리근육을 망치로 다지는 듯한 고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숨이 턱 막힌 공녀는 다시 있는 마력 없는 마력을 총 동원했고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진정되었다.
“휴우, 죽을 뻔했다.”
단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앞으로도 이런 식의 단련을 계속 해야 할까? 벌써부터 울고 싶어졌다.
- 당연히 그럴 필요는 없지.
- 뭐라고?
- 오늘은 첫 날이니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 덕분에 고통이 안 느껴지니 제한을 두지 않게 됨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 마력을 집중하고 유지하는 방법, 근육통의 대처법까지 배우지 않았는가?
공녀는 반박할 힘조차 없었다. 분열은 말을 이어갔다.
- 물의 기운은 치유와 포용. 몸에 물의 마력을 두르면 고통이 반감되고 재생하게 되지. 근육을 본격적으로 키울 때는 좋겠지만 이 몸으로 사용하기에는 마력이 빠진 후의 반작용이 심해서 초반에 기틀을 다질 때에는 다소 맞지 않겠군.
- 마력의 속성에 따라 차이가 있나보네.
- 그래. 그대가 기존에 쓰던 육체 강화 마법들도 각자의 속성이 있지 않았는가? 그 중 제일 적합한 것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지.
공녀의 머릿속에 테르한이 즐겨 사용하던 마법들이 나열되었다.
발동 주문은 분열이 봉인해놔서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이름이나 속성,기능은 기억에 남아있었다.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주는 헤이스트, 퀴큰은 바람계열의 마법이었다. 리제네레이션 같은 자연치유력을 늘려주는 마법들은 물계열 등등 각 속성별로 강화해주는 것이 달랐다.
이 중 몸을 다지기 시작하는 공녀에게 제일 적합한 속성은,
- 땅 -
공녀와 분열의 말이 겹쳤다.
몸의 균형을 잡아주고 내구력을 증진시켜주며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땅계열의 마법처럼 땅의 마력은 공녀의 육체적 내구성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 자, 무슨 속성을 기초로 수련할지도 정했으니 이만 쉬는 것이 좋겠군.
- 그 전에 이거 어떻게 하지?
공녀는 손끝을 파르르 떨며 다리에 꾹꾹 눌러 담은 마력을 가리켰다.
마력은 물의 기운을 띠고 있어 찢어졌던 근섬유가 천천히 재생되고 있었지만 공녀가 잠드는 순간 집중력이 풀려 밤잠을 설칠 고통을 선사하게 될 것이었다.
분열은 한숨을 내쉬었다.
- 오늘 아침의 일을 벌써 까먹었는가?
- 아침? 아!
공녀는 물의 기운을 띤 마력의 성질을 천천히 치유의 기운으로 바꿔나갔다. 물과 치유의 마력은 성질이 상당히 유사해서 교체하기가 수월했다.
공녀는 다리가 빠른 속도로 낫는 것을 느끼며 식은땀 범벅이 된 옷을 갈아입었다. 세탁을 하는 하녀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몸이 아파서 땀을 좀 흘렸다고 하면 대충 넘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뒷정리를 마친 공녀는 침대에 누워 마력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외부의 마력을 끌어들여 몸속에 담아두었다가 속성을 여러 가지로 바꿔보다가 하면서 자연스레 마력을 다루는 연습을 했다. 은근히 재미도 있어 심심할 때마다 하게 될 것 같았다.
- 빨리 자라.
- 어…….
무의식적으로 분열에게 반박하려던 공녀는 분열의 말투에 테르한 생전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렸을 적 에너지가 넘치는 꼬마였던 그에게 항상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고 하시던 아버지.
테르한의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매년 찾아가던 무덤은 이제 아무도 찾는 이가 없을 터였다.
‘나중에 살짝 찾아 가봐야지.’
침대에 누웠지만 낮에 퍼질러 잤던 공녀의 눈은 말똥말똥했다. 자연스레 공녀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버지 하니까 아리에의 아버지인 제즈릭 공작에게서 연락이 올 때가 지났다.
아무래도 자식의 병이 완치되었으니 빠르면 당일, 늦어도 공녀가 다시 깨어난 날에는 연락이 갔을 것이었다.
요즘은 마법 전보가 꽤 발달해서 대륙 반대편에 있는 시골까지도 사흘 정도면 소식이 닿는다고 한다.
공작의 성은 제도와 적당한 거리에 있어 이틀이면 소식이 닿았을 텐데 별도의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아리에에게 관심을 끊었거나 바쁜 모양이었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
아리에의 기억 속 공작은 언제나 무심하면서도 실망한 눈을 하고 있었다.
공작가의 딸로써 그 어떠한 행보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리에의 병세는 내버려두자니 매정한 아버지로 정적들의 타깃이 될 테고, 고치자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딸에게 그런 눈을 하는 아버지는 과연 옳은가.
아픈 딸을 아는 이 한 명 없는 황궁에 버려두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이해해야 하는가.
만일 그가 이제 와서 공작가의 여식으로 책임을 다하라고 한다면 그 말에 따라야 하는가.
공녀에게는 쉽지 않은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