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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화 〉제 3장. 용사, 그리고 용사 - 1 (13/82)



〈 13화 〉제 3장. 용사, 그리고 용사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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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일어나자마자 공녀는 식당으로향했다.

잡생각에 뒤척이다보니 늦게 잠들었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식사시간이었다. 몸단장은 전혀 하지 않아 머리가 산발에 흐트러진 잠옷차림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시밀레와 하녀들 이외에 아침에 이 건물에 있는 사람도 없을 테니.

공녀는 자신을 깨우러 갔다가 엇갈린 시밀레가 복도 끝에서 달려오는 것을 멀뚱히 보며 식당의 문을 열었다.

“안녕, 리에. 아침부터 굉장한 모습이네.”

문을 다시 닫았다.

공녀는 두통이라도 난 것처럼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아침부터 미친놈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공녀님. 후우.”

순식간에 복도를 주파한 시밀레는 한 손에 빗을 들고 묵묵히 공녀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이미 공녀에게잔소리 하는 것은 포기한 모양이었다.

하녀 한 명이 다가와 숄을 걸쳐주자 잠옷 바람이었던 공녀의 모습이 어느 정도 감춰졌다.

시밀레가 문을 열어주자 공녀는 차분히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황자는 닭튀김을 나이프로 우아하게 썰고 있었다.

“밤사이에 평안하셨나요, 황자전하.”

“물론. 리에도 잘 잤니?”

“네. 덕분에 푹 잘 수 있었답니다.”

정신적으로 지쳐서 말이지.

황자는 낮게 웃었다.

“미인은 잠꾸러기라고 하지.”

공녀는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뱉는 황자를 보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범한 소녀였다면 황자의 말에 감히 그런 표정을 짓기는커녕 황송해하거나 부끄러워했을 테지만, 공녀는 평범한 소녀와는 다소거리가 멀었다.

홍조 대신 닭살이 돋아났다.

“쯧.”

들으라는 듯 혀를 찬 공녀는 쌀쌀맞은 표정으로 황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불쾌할법했지만 오히려 재밌는 반응이라며 황자는 재밌어했고, 그 모습에 공녀는 더욱 기분이 가라앉았다.

“오늘은 어떤 일 때문에 오셨는지요.”

동그란 튀김을 요령 있게 반으로 쪼갠 황자는 맛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맛이야. 어머님의 궁에서 온 요리사인가?”

“아마 맞을 거예요.”

딴 소리를 시작한 황자에게 적당히 대답하면서 공녀도 식사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황자가 있다 보니 어제처럼 많이 내올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식사는 딱 1인분.

여러모로 방해가 되는 인간이었다.

괜히 심술이 나서 커틀릿을 썰고 있던 공녀에게 황자가 대뜸 말을 건넸다.

“첫 번째 일이야, 리에.”

공녀는 포크를  채 대답했다.

“첫 번째 일?”

“곧 용사와 그 일행들이 예정보다 하루 일찍 제도로 돌아온다고 해. 엘레나 성직자님은 이미 와있으니 나머지 일행들 말이지.”

공녀는 고개를끄덕였다. 어제 엘레나와 만났을 때 들었던 내용이었다.

“그리고 연구의 일환으로 용사를 만나볼 예정이야.”

오랜만에 용사와 일행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1년 동안 동고동락해온 이들이었기에 빨리 보고 싶었지만 막상 만나게 되어도 자신이 테르한이라는 것을 밝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용사와 일행을 만나서 그들이 무사한 것만 확인하고 얌전히 있을 예정이었다.

“아, 성검을 분수에 되돌리는 것도 하나요?”

황궁의 중앙에 있는 중앙궁의 분수는 신의 가호를 받아 성수가 흐른다.

평소에 성검은 그곳에 있는 조각상의 허리춤에 있는 검집에 꽂혀 있다가 마왕이 나타나면 빛을 발하게 되고 선택받은 용사가 검을 뽑아낸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고 귀환하면 검을 도로 조각상의 검집에 돌려놓는 것이 용사의 개선을 축하하는 행사의 마무리이자 정점이었다.

평생에 한 번 보기 힘든 장면이었기에 황궁 앞까지 엄청난 인파가 몰리고 황궁에는 평소에 보기 힘든 명사들이 드나든다고 전해진다.

지금보다 인구가 더 적었던 옛날이 그 정도였으면 지금은 아예 제도 전체에 사람이 가득 들어차지 않을까.

하지만 어제 둘러본 황궁에는 아직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의식이나 행사 같은 거라 준비도 필요하고 예행연습도 해야 돼서 며칠 뒤에 할 예정이야. 오늘은 제국  주요 인사들을 모아놓고 승리를 공언하는 자리이지.”

“그럼 용사 일행은 바로 황궁으로 들어오는 건가요?”

“그래. 아버님께서 직접 포상을 내리실 모양이야. 각자 높은 직위와 원하는 것들을 지급하겠지 않을까 싶어.”

분열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승전보는 테르한이 공녀의 몸에 들어온 그날 바로 전해졌겠지만 당사자들이직접 황제와 이야기를 하고 포상도 받는 모양이었다.

‘원래 그 자리에테르한으로써 참가했어야 했지만.’

공녀는 속으로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사실 용사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칠 마땅한 이유가 없어 용사 일행이 되었지만 포상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잘 하면 몸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도 있을 뻔했다.

이제 전부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용사 일행은 당분간 바쁠 텐데 시간을 빼앗아도 괜찮을까요?”

공녀의 질문에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들도 일찍 와서 잠깐 있다가 하루 정도  수 있으면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겠지.  말대로 당분간 눈코   없이 바쁠 텐데.”

용사 일행 중 용사 아펠을 제외한 마법사 셰일로아, 성직자 엘레나, 총사 하빈은 모두 제도 출신이거나 제도에 터를 잡고 있었으니 하루 정도 휴가를 얻는다면 그들도 큰 불만은 없을 것이었다.

“다만, 용사 일행 중에 변고를 당한 자가 있다고 해. 그의 처우에 대한 이야기도 오가겠지.”

공녀는 순간 뜨끔했다.
테르한의 이야기에 구태여 관심을 보일 필요가 있을까. 공녀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암시를 걸었다.

황자의 이야기를 들은 아리에가 말했다.

“슬픈 일이네요.”

“그렇지. 무엇보다 그는 나중에 내가 꾸릴 파티의  축을 맡을 가능성이 높았는데 말이야.”

“……그 사람이 그렇게 강했나요?”

“맨손으로 숲의 거대 마족과 붙어서 이겼다고 하던데.”

공녀로서는 짐작 가는 일이 몇 가지 있었지만 그냥 감탄하는 척 했다.
황자의 말이 이어졌다.

“그 정도면 몽둥이만 쥐어줘도 검을든 기사들이랑 붙어서 이길 수 있을걸. 게다가 원래 제국 기사단에 입단할 예정이었다고 하니 오러 사용도 가능했겠지. 그 나이에 그 정도로 강한 사람은 없었을 거야.”

“꽤나 고평가하시네요?”

공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만 자신의 능력이 인정받는데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

“그래. 훌륭한 전사였던 모양이야. 하지만 엘레나 성직자님이 말하길 그의 영혼은 마왕과 싸우다잠식당해서 정화의 진으로 정화를 했다고 하더군.”

“…….”

역시 자신의 사인을 남에게 직접적으로 듣는 것은 괴로웠다. 공녀가 미간을 찌푸리자 황자는 그 의미를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아, 정확히 말하면 영혼은 정화를 당했지만아직 살아있기는 하데. 정화의 진도 내성 비슷한 게 있나보더라고. 상태가 좀 이상하다고 하긴 했지만.”

“!!!”

공녀는 손에 들려있던 식기를 떨어트렸다.

숨이 턱 막히고 머리에 피가 몰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흐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직 살아있다니? 누가?

“리에?”

공녀가 손에 힘이 없어서 식기를 떨어트린  알고 살짝 놀려줄 생각을 하던 황자는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챘다.

눈을 부릅뜬 채 얼굴이 벌게진 소녀는 금방이라도 식탁을 내려칠 기세로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 진정해라, 검사. 일단 확인이 먼저다.

공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자 분열이 나섰다. 공녀는 숨을 길게 내뱉으며 손에 힘을 풀었다.

후우. 그래. 일단 두 눈으로 확인해본다.

공녀의 이상을눈치 챈 시밀레가 황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공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공녀님?”

여전히 얼굴에 피가 몰려있는 상태였지만 분열과 대화한 공녀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할 것이다.

현재 테르한의 몸 안에누가 있는지. 그가 진짜 테르한이라면 ‘나’는 누구인지.

손을 들어 괜찮다는 의사를 표현한 공녀는 황자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죄송해요. 영혼이 정화를 당했다고 하니 남의  같지가 않아서.”

“어? 아, 그래. 미안하게 되었군.”

“네? 앗.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대충 둘러대다 보니 황자가 어제 저지른 일을 탓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황자는 순순히 사과를 했지만 공녀의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황자에게 손찌검을 한 것으로 그가 벌인 일을 넘어가주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를 했는데 자신이 핀잔을 줘버린 셈이었다.

가벼운 분위기에서는 말실수나 장난으로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공녀는 누가 봐도 장난치는 모습은 아니었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시밀레는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에 발만 동동 구르다가 공녀의 접시가 비어있는것을 발견했다.

“공녀님. 식사 더 갖다드릴까요?”

공녀는 식욕이 뚝 떨어졌기에 고개를 저었다. 황자 역시 식사를 할 기분은 아닌지 대충 비워져있는 접시에 식기를 뒤집어 걸쳐놓았다.

“그럼 준비 되면 응접실로 와.”

“네.”

황자가 응접실로 향하자 공녀는 자신의 방으로 털레털레 돌아갔다.

당장이라도 살아있다는 테르한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과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동시에들며 공녀를 괴롭혔다. 괴로운 모순이었다.

‘그렇다고 확인하지 않을 수도 없어.’

- 그대의 원래 몸과 접촉을 해봐라. 내가 상황을 파악할 테니.

고마워.

- 무얼. 그나저나 나도 그 경위가 궁금하군. 그대의 영혼은 틀림없이 검사 테르한의 영혼이다. 허나 그대의 영혼의 용량이 워낙 커서 일부가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 일단 만나봐야 알겠지.

분열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시밀레가 조심스럽게 오늘은 그냥 쉬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왔지만 공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대한 빨리 자신의 몸을 확인해야한다. 이미 마음은 굳혔다.

옷을 갈아입고 가볍게 단장한 공녀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예의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황자는 다소 굳은 얼굴로 기다리고 있다가 공녀가 문 앞에 멈춰 서자 손을 내밀었다.

“자.”

황자가내민 손을 잡기가 어색해 공녀는 손을 뻗지 못했다.

대신 허공에 머물던 손을 그대로 내려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살짝 치마를 잡아 올린 공녀는 스스로 마차에 올랐다.

황자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손을 거두었다.

“…….”

중앙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공녀는 다소곳이 앉아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테르한의 몸에접촉할지 고민하고 있었고, 황자는 답지 않게 공녀의 눈치를 살폈다.

도저히 자연스럽게 테르한과 접촉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공녀는 한숨을 쉬며 황자에게 질문했다.

“오늘은 용사 일행을 만나서 뭘 하면 되나요?”

“응? 아아, 그냥 간단한 격려 같은 거지. 황족과 용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 굳이나 같은 놈까지 대동해서 용사의 비위를 맞춰주는 거야.”

“네?”

공녀에겐 다소 생소한 정보들이 튀어나왔다. 황족과 용사의 관계라던가, 용사의 비위를 맞춘다던가.

‘그 꼬맹이의 비위를 황자가 직접 나서서 맞춘다고?’

기억과 현실의 괴리에 혼란이 온 공녀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을 본 황자는 살짝 표정을 풀었다.

“걱정 마. 나서는 건 전부 내가 할 테니, 리에는 맛있는 거 먹고 용사 얼굴이나 좀 보고 통성명 정도만 하면 돼.”

황자의 말이 끝나자 공녀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하고 마주쳤다.

“아, 그럼!”

“응?”

공녀가 화사한미소를 짓자 황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저 미소 뒤에 이어진 왼뺨의 아릿함이 아직 남아있는 듯했다.

공녀는 그 모습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말했다.

“용사 일행 분들과 악수라도 할 수 있을까요?”

황자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공녀는 두 손을 불끈 쥐고 해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히 용사를 좋아하는군.’

황자의 잘못된 추측을 뒤로 한 채 마차는 천천히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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