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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화 〉제 3 장. 용사, 그리고 용사 - 2 (14/82)



〈 14화 〉제 3 장. 용사, 그리고 용사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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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연회장의 대기실.

아펠은 긴장하고 있었다.

몇 개월  정돈하지 못해 눈까지 닿게 된 앞머리가 거슬렸지만 항상 그녀의 머리를 정돈해주던 검술 스승은 현재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어깨에얹어진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항상 묶어 올리던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마법 스승 셰일로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펠은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 서있던 하빈이 문을 열고 밖으로 안내하는 손짓을 했다.

“숙녀 분들 먼저.”

셰일로아가 입을 삐죽 내밀며 아펠의 어깨를 잡고 앞으로 밀었다. 아펠은 낡은 검집에 담긴 성검을 품에 꼭 안은 채  밖으로 나섰다.

웅성이던 홀이 조용해졌다.

중앙궁의 연회가 열리는 홀에는 제국을 움직이는 이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귀족파의 수장인 제즈릭 공작은 당연하다는 듯 홀의 중앙에서 서있었다. 아직 40대의 나이였지만 그는 원로 귀족들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인물이었다.

최근 아픈 손가락이었던 고명딸의 병세가 기적적으로 나았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비슷한 나이대의 아들을 둔 귀족들이 그의 주위에서 아첨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던 황제파의 중심, 실마이아 후작은 주위가 조용해지자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외동딸을 보고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아펠은 자신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셰일로아 실마이아는 사실 자신의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황후와 황태자는 홀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 대화하고 있었다.

기사 서약을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간 지 수십  만에 제도에 온 블란테 변경백은 간만에 만난 딸과 외손자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급한 일 때문에 하루 일찍 황궁에 도착한 엘레나는 정갈한 사제복을 입은  방문 옆에 서있었다.
그녀는 아펠을 보며 눈인사를 건넸다. 아펠 역시 살짝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아펠에겐 이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도, 처음 듣는 이름도 전부 익숙한 것처럼 보이고 들려왔다.
그 동안 쌓아온 귀족들에 대한 적지 않은 지식들이 그들의 관계를 추측하고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만들었다.

나아가서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취할 지까지 예지에 가까운 예측이 가능했다.
성검과 대화를 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용사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능력을 써버릴 만큼 긴장했다는 반증이었다.

“괜찮니?”

아펠의 어깨가 떨려오는 것을 눈치 챈 셰일로아가 고개를 숙여 아펠과 눈을 마주쳤다.

“괜찮아요.”

아펠은 침을   삼킨  홀로 나아갔다.

드레스의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느낌이 신경 쓰였다.  입던 편안한 활동복과 가죽갑옷이 그리워졌다.

아펠의 뒤로 마법사 셰일로아, 성직자 엘레나, 총사 하빈이 정렬했다.
마왕을 물리친 용사일행을 향해 누군가 박수를 치자 다른 이들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홀 안에 박수소리가 메아리쳤다.

아펠은 도망가고 싶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한  없는데.’

아펠은 문뜩 자신의 검술 스승테르한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연금술사 본부에서 그의 몸을 살펴본다고 데려간 이후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
정화되었다는 그의 영혼은 진정 되찾을 길이 없는 것일까.

아펠이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서서히 박수소리가 잦아들었고 황제의 알현실로 향하는 복도의 문이 열렸다.

나팔수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었고 홀에 모여 있던 이들은 전부 황제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입장했다.

홀에 나와 있던 황후와 황태자가 자연스레 황제의  옆에 섰다.
1황자가 자리에 없었지만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늘은 몇 가지 소식을 전해주고자 이 자리에 여러분들을 모셨소.”

황제는 어느새 홀의 중앙에 덩그러니 놓이게 된 용사 일행을 보았다. 아펠은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용사는 고개를 들라.”

황제의 말에 아펠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아펠의 눈에 높은 계단 위에 서있는 황제가 보였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아펠을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용사 아페르오네.”

성급한 몇몇 귀족은 박수를 칠 준비를 했다.

“아페르오네 체노스트라. 마왕을 물리치고 무사히 귀환한 것을 축하한다. 앞으로도 황실의 일원으로 활약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황제의 말에 모두들 움직임을 멈췄다.
곧 다들 어전이라는 것도 잊은 듯 웅성이기 시작했다.
아펠은 이를  물고눈을 감았다.

황제는 군중들을 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아펠은 동료들의 동요를 느꼈다.

딱히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이름만 황실의 일원이었을 뿐.

“아, 다들 오해하고 있군. 아페리오네는 내 숨겨둔 자식 같은 게 아니오. 그랬으면 내가 마누라한테 맞아 죽었지.”

황제의 농담에 넉살 좋은 일부가 웃음을 터트렸다. 황후가 그를 째려보았지만 황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녀는 형님이 남기신 유일한 핏줄이지.”

일부 귀족들은 이제야 알았다는 표정으로, 다른 일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탄식하며 아펠을 쳐다보았다.

폐태자의 사생아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용사에게 보내는 시선과는 다른 의미로 견디기 힘들었다.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던, 보호자이자 전우였던 동료들에게서마저 거리감이 느껴졌다.

검술스승 테르한이었다면 달랐을까.
그의 듬직한 등이 그리웠다.

그때, 홀의 정문이 열렸다.

“오, 다들 여기 계셨네요. 난  야외에서 파티라도 하는 줄 알았지 뭡니까.”

황자의 등장에 나이가 많은 귀족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젊은 귀족들은 그를 동경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이 자리에 젊은 귀족은 별로 없었다.

아펠은 황자의 등장에 간신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를 따라 시선을 돌린 아펠은 황자를 따라 들어오다가 황급히 기둥 뒤로 몸을 숨긴 자기 또래의 소녀를 보았다.

연한 하늘색의 머리를한 소녀에게 기시감을 느낀 아펠의 시야 한 구석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성검의 힘을 쓴 아펠은 시야에 잡힌 제즈릭 공작의 파란 머리, 소녀와 공작의 나이차, 그답지 않게 당황한 표정 등을 통해 소녀와 공작의 관계를 유추했다.

황궁에 볼모로 잡혀 들어갔다는, 혹은 공작이 황제에게 떠넘기듯 황궁에 들여보냈다는 제즈릭 가의 아리에 공녀.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약간의 동질감을 느끼던 상대였다.

“리베리안. 이리로 오거라.”

황제의 말에 황자는 황송하다는 듯 과장된 동작으로 허리를 숙였고, 그가 시선을 끈 덕분에 아리에 공녀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고 홀의 한 구석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제즈릭 공작이 공녀를 빤히 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짐짓 모른 체하며 테이블에 있던 음료수와 과자를 집어 들었다. 공녀도 1황자 못지않게 마이페이스인 모양이었다.

황자는 홀을 가로질러 황제에게 향하던  아펠과 스쳐지나가며 그녀를 향해 윙크했고, 아펠은 어이없어하면서도 긴장이 확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펠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 자리에 적어도 한 명은 기댈만한 사람이 있었다.

황자가 계단 아래에도착하자 황제와 황후, 황태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황실의 일원이 전부 모이자 본격적인 용사 귀환 기념식이 시작되었다.

아펠과 황제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는 동안 황태자는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잠깐 동안 소개받은 인물들만 수십 명이라메모가 필요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오늘은 주인공은 아펠이었고 또래의 아이들도 없어서 여느 때보다는 빨리 무리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숨 돌리고 있는 황태자의 눈에 황자가 들어왔다.

“형님.”

“왜 그러시오, 황태자전하.”

황자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황태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황태자는 뭐든 자신보다 뛰어난 형에게 열등감을 느끼기 보다는 존경심을 품고 있었지만 그의 장난기에는 대응하기 어려웠다.
황자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필요 이상으로 그를 놀리지는 않았다.

“제즈릭 공녀와 아는 사이이십니까?”

“오, 동생아.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하는구나.”

황자는 인사해오는 사람들을 자연스레 응대하며 시선을 홀의 한 구석으로 던졌다.

그곳에는 이를 악 물고 인상을 쓴 제즈릭 공작과, 누가  아니랄까봐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공녀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둘의 표정만 아니었으면 부녀가 사이좋게 술래잡기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저 강경한 제즈릭 공작의 표정을 무너뜨렸는지 처음부터  본 것이 매우 아쉬웠지만 지금상황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다.

“아리에랑 아는 사이냐고? 물론이지.”

황태자는 어딘가 살짝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또래의 친구가 거의 없는 황태자는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는 황자를 부러워했다.
그래서얼마 전에 만난 동갑내기 소녀는 자신만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을까하고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시무룩해진 황태자의 표정을 본 황자는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고는 귓속말을 했다.

“걱정 마. 네 친구를 빼앗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어, 그럼 여자친구야?”

황태자는 기겁했다.

“아뇨, 그냥 친구 맞습니다.”

“큭큭. 그래. 그런데 친구가 지금 위기상황인거 같은데?”

제즈릭 공작과 공녀의 대치는 극에 달했다.

체면도 잊고 테이블 위에 올라서려는 공작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간신히 말렸고 공녀는 잡아보라는 듯 당돌한 표정으로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얼마 전까지 와병 중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 힘든 날렵한 동작이었다.

조금씩 소란이 날 조짐이 보이자 황자는 황태자에게 고갯짓을 했다.
황제가 공작 부녀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한숨을 쉬며 황제의 시선을 끌기 위해 다시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황태자가 황제의 시선을 돌리자 황자는 제즈릭 공작에게 다가갔다.

“공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황자전하. 버릇없는 딸아이의 교육 때문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인상 깊은 모습이었습니다.”

그제야 홀 안의 사람들  상당수가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공작은 목을 가다듬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이후 별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자 사람들의관심은 다시 용사 일행에게로 향했다.

황자는 테이블 위의 잔을 집어 들며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녀를 데려가려고 하셨습니까?”

“저 아이는 내 딸입니다.

“황궁의 손님이기도 하고요.”

공작은 잔이 들려있었으면 부서졌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그 약속은 아직도 유효한 것입니까? 저 아이의 병이 이렇게 빨리 나았는데도?”

공작의 시선이 공녀에게 향하자 이쪽을 경계하며 포크로 음식을 찍어먹던 공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공녀의 역할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럼  딸은. 아리에는.”

공작이 주먹쥔 손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굳어버린 표정 대신 몸의떨림으로 나타났다.

“파멸과 맞서야 하는 것입니까?”

황자는 잔에 남은 음료를 들이켰다.

“파멸은 모든 종족, 모든 이들이 함께 맞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공녀는 남들보다 조금 앞에서 싸울 뿐입니다.”

공작은 더 이상 떨지 않았다.

열기를 띠었던 눈동자가 싸늘해졌고, 어린 딸을 둔 아버지였던 그는 강경한 제국 귀족파의 수장으로 돌아왔다.

“죽을 겁니다. 당신도, 제 딸도.”

공작의 저주에 가까운 말에 황자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 다음은 당신이 죽을 겁니다. 우리가 파멸을 막지 못하면 모두가 그렇게 될 거고요.”

공작은 황자를 노려보다가 뒤로 돌아섰다.

공작이 인파들 사이로 사라지자 공녀가 황자의 옆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어떻게 네 아버지랑 술래잡기를 하게 된 거야? 제즈릭 공작이 저러는 모습은  적이 없는데.”

황자는 공작과 대치하던 공녀를 떠올렸다. 직접  광경이 아니라면 믿기 힘들었으리라.
공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오라기에 취직했으니까 못 간다고 했어요.”

공녀의 대답에 황자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공녀는 황자를 향해 눈을 흘기며 질문했다.

“아버지는 전하께 뭐래셨어요?”

“너랑 나랑 죽을 거래.”

“네?”

눈을 동그랗게 뜬 공녀를 향해 실없는 미소를 지은 황자는 이쪽으로 오는 황태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의 뒤에는 아펠이 따라오고 있었다.

“아, 둘은 아직 서로 모르겠구나. 자, 여기는 용사 아펠. 이쪽은 제즈릭 공작가의 아리에.”

아펠은 성검을 품에 안은  지친 표정으로 공녀에게 꾸벅 인사했다. 공녀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허리를 숙여 답례했다.

“아펠이에요.”

“아리에 제즈릭이라고 합니다. 용사님께 악수 한 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펠은 공녀에 대한 인상을 수정했다.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소녀는 예상보다 훨씬 기운차고 당당했다.

그리고 왠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잘 알지 못하는 타인과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아펠이었지만 무심코 손을 내밀었다.
공녀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두 소녀가 손을 마주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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