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제 3 장. 용사, 그리고 용사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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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진행되었던 연회는 마왕을 물리친 아펠을 소개하고 마왕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선언하는 자리였다.
공식적인 개선행사는 모레부터 시작할 예정이었고, 아펠의 일행들은 그녀를 한 번씩 다독여준 뒤 각자 집이나 직장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텅 비어버린 홀에는 아펠, 아리에, 황태자가모여 있었다. 그들의 대표 격인 황자가 잠시 황제와 무언가 논의를 하러 잠시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나이대가 비슷한 또래들이 모였지만 오가는 말은 없었다.
자신의 혈통도 모른 채 시골에서 살다가 갑자기 용사로 징집되어 1년여 간 전장을 돌아다니며 마왕을 물리친 아펠.
제국의 두 번째 황자로 태어나 황태자 직위를 물려받고 끊임없이 형과 비교당하는 알레르만 황태자.
날 때부터 심각한 병에 걸려있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로 살아오다 마력각성까지하게 된 아리에 공녀.
모두 고귀한 신분과 비범한 삶을 살아왔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인생 이야기는 애들이 꺼내기에 좋은 주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다들 또래의 아이들과 놀아본 적이 없었다.
아펠과 황태자, 황태자와 공녀가 따로 있었으면 그럭저럭 대화가 오갔을 것이었다. 어쩌면 아펠과 공녀라도.
하지만세 명이 모이자 이상하리만큼 침묵이 이어졌다.
아펠은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얼굴 한 번 못 본 아버지 때문에 황가의 일원이 되었지만 자신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용사로 선택된 뒤 고향에 살던 집을 모두 처분하고 나와서 황궁이 아니면 머무를 곳이 없었다.
공녀는 테르한이 이곳에 오지 않은 것을 알고 그 위치를 알만한 아펠이나 용사 일행과 따로얘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황태자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심각한 표정의 소녀들에게 기가 눌려있을 뿐이었다.
“얘들아 뭐해?”
마침 황자가 왔기에 모두들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황자는 아까 전 파티가 끝나고 아펠에게 잠시 빌려갔던 성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슬슬 돌아가자.”
황자는 허리춤에서 성검을 빼내 아펠에게 돌려주었다. 공녀는 살짝 삐져나온 검신이 은은한 빛을 내는 것을 보았다.
- 진짜 용사였네.
- 용사의 자격은 여러 명이 갖고 있을 수 있는 건가보군.
테르한도 성검을 몇 번 만져보거나 아펠 대신 들고 다녔던 적이 있었지만 성검은 오직 아펠이 들었을 때만 빛을 발하였다.
성검을 받아든 아펠은 누군가 빼앗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품에 끌어안았다. 테르한이 검술을 가르쳐줄 때 항상 주의를 주었지만 제대로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었다.
- 그대나 나나 아직 용사에 대한 것은 잘 모르니 기회가 있을 때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군.
- 연구소에 뭔가 있지 않을까?
황자의 인솔 하에 연회장을 빠져나온 그들 중 황태자가 제일 먼저이별을 고했다.
“형님. 아펠. 제즈릭 공녀.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냐. 공부 열심히 해라.”
마차에 오르는 황태자를 향해 황자는 손을 흔들었고, 아펠과 공녀는 살짝 목례를 해 그를 배웅했다.
황자는 남은 두 소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펠. 납도식 때까지 머물 곳은 정해졌어?”
“아뇨. 듣지 못했어요.”
황자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일정이 하루 빨라졌다고는 하지만, 마왕을 물리치고 온 용사에게 귀빈실 배정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일행들은 전부 제도에 집이 있어서 큰 문제는아니었지만 용사는 제도 출신이 아니었다. 그런 기본적인 것에 대한 파악조차 되지 않은 것이었다.
어쩌면 제국 내에서 더 이상 마왕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는 문제였다.
파멸로 인해 수많은 종족들이 몰락하고 마족으로 변질되면서 열 번째 이전의 마왕들은 말 그대로 종족 단위의 마족들을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갈수록 마왕의 뜻에 동조하는 마족들이 줄어들어 마지막 스무 번째 마왕에 이르러서는 마족들 중 극히 일부만으로 세력을 형성했고, 제국은 1개의 군단만을 동원하여 그들을 제압했다.
전쟁이 볼품없어지며 마왕을 물리친 용사의 활약도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모름지기 상대가 강해야 영웅의 활약이 돋보이는 법이었다.
만일 용사 일행이 마왕을 물리치는 데 실패했다면 마족들이 규합해 큰 규모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것을 아는이들은 별로 없었다.
이제 곧 나타날 마왕은 지금까지의 마왕과는 궤를 달리 하는 태초의 마왕, 파멸이었다.
모두의 힘을 모아 대비를 해야 하는데, 제국은 제대로 된 준비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황자가 고민하는사이 공녀가 아펠에게 제안을 했다.
“머물 곳이 아직 안정해졌나 봐요. 그럼 제가 머무는 곳에 오실래요?”
“네? 공녀님이 계시는 곳이요?”
“네. 저 빼고는 다 시녀하고 하녀만 머무는 곳이에요. 그나마 몇 명 없어요.”
공녀는 아펠이 낯선 사람, 높은 지위의 사람을 꺼려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궁 어디에 가도 귀족이나 관료, 대신들이 돌아다녀 어디에 머물든 불편할것이다.
그나마 제일 구석에 있고 일단 안면을 튼 또래인 자신이 있는 곳이 제일 나은 선택일 것이라 생각했다.
공녀의 제안에 아펠은 잠시 생각하더니 황자를 돌아봤다.
“제가 머물 곳은 제가 정해도 되나요?”
“물론. 황궁의 관리를 하는 인간이 바쁜 것 같으니, 뜻대로 해.”
황자의 말에 뼈가 있었지만 아펠은 개의치 않았다. 아펠은 공녀에게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당분간 신세 좀 질게요.”
“편히 계실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노력은 시녀랑 하녀들이 하겠지. 하고 황자는 생각했지만 괜히 훈훈한 분위기를 깨고싶지는 않았다.
그는 매사에 재미를 추구할지언정 눈치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럼 아리에가 머무는 귀빈관으로 갈까?”
“네. 용사님의 짐도 풀 겸 먼저 그쪽으로 가죠.”
아펠의 짐은 낡은 배낭 하나뿐이었다. 공녀의 눈에도 익숙한 물건이었다.
세 명이 차례대로 마차에 오르고 잠시 후 마차가 출발했다.
공녀가 머무는 귀빈관은 좋게 말해서 예스러웠고,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낡고 오래되었다.
그 오래된 건물에서는 지금 대청소가 한창이었다.
“시밀레 시녀님. 이물건은 어디에 옮겨놓을까요?”
“그건 지하 창고로 옮겨주세요.”
하녀들뿐만 아니라 하인들까지 대동한 청소는 공녀가 돌아올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주로 쓰는 방 위주로 청소했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는데, 공녀가 용사까지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안 시밀레는 할일이 더욱 많아졌다며 한숨을 내뱉었다.
우선 청소가 끝난 자신의 방으로 아펠을 데리고 온 공녀는 가벼운 화두로 대화를하기 시작했다.
아펠이 좋아하는 주제도 어느 정도 알고, 꺼내면 안 될 말들을 파악하고 있는 공녀는 아펠에게 제법 좋은 말상대였다.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그건 스승님의덩치가 너무 커서 그런 거예요.’라고.”
“아하하. 아참, 그 검술 스승님이란 분은 오늘 안 오셨나요? 뒤쪽에 계시던 남자 분은 아닌 거 같던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나서 얘기하던 용사는 공녀의 말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녀의 스승 테르한이 정화의 진을 쐰 다음 상태가 이상해져서 다른 곳으로 가있었다.
“지금은 여기 없어요. 이야기 하면 좀 길어지지만, 몸이 안 좋아져서…….”
공녀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축였다.
조금만 더 아펠을 자극하면 지금 테르한의 몸이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말솜씨는 썩 좋은 편은 아니었고, 아펠은 생각보다 예민하고 의심이 많은 아이였다.
지금은 돌아서 가야할 때였다.
“저런. 아프신 모양이에요.”
“네.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디선가 치료 받고 있을 거예요.”
- 용사도 자세히는 모르는 모양이군.
- 그러게. 쉽지 않네.
분열은 가끔 조언을 해주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동안 존재감을 감추고 숨어있었다. 용사나 성직자들에게 존재를 들키면 곤란하다던가.
“나중에라도 꼭 뵙고 싶네요. 전 용사님과 동료 분들을 정말 존경하거든요.”
“존경하실 것까지는…….”
아펠이 겸양의 말을 하며 쑥스러워했다. 공녀는 그 반응이 익숙하면서도 평소처럼 놀리는 말을 할 수 없어 살짝 씁쓸했다.
두 소녀가 이야기하는 사이 하녀가 점심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알려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공녀와 아펠은 식당으로 향했다.
“안녕, 리에. 아펠.”
뻔뻔하게 이미 식사를 하고 있는 황자를 보고 공녀는 한숨을 쉬었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귀찮을 뿐.
“황자전하. 꼭 여기서 식사를 하셔야 하나요?”
“연구소 밥은 별로 맛이 없어.”
공녀는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면 전하 궁에서 드시면 되잖아요.”
“매일 먹어서 질렸어.”
잔소리를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황자의 맞은편에 착석한 공녀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하녀가 의자를 빼주자 티격태격하는 황자와 공녀를 신기한 눈으로 보던 아펠은 조심스레 자리에앉았다.
각종 요리들이 부산스럽게 옮겨져 식탁을 메웠고, 시밀레의 주의 깊은 배치로 공녀는 눈에 띄지 않고 1인분이 넘는 식사를 챙길 수 있었다.
“둘 다 점심 먹고 시간 있어?”
“저야 황궁 밥만 축내는 식객이니 할 일이 있을 리가 없죠. 용사님은 괜찮으세요?”
“네. 저도 딱히 할 일은 없어요.”
둘의 일정을 확인한황자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정보를 얻을 겸 연구소를 찾아보려던 공녀는 황자가 제의도 하기 전에 수락의 말을 꺼내려고 했다.
“지금부터 기사단 양성소에 가볼 거야. 준비 되면 나와.”
“네? 기사단 양성소요?”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공녀가 얼빠진 반문을 하자 황자는 윙크를 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공녀는 졸지에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인생 중 삼 할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가게 되었다. 마왕을 물리치고 금의환향하는 장면을 상상한 적은 있었지만 이런 모습으로 찾아가게 될 줄이야.
“와. 검술스승님한테 자주 들었던 곳이에요.”
공녀의 심정을 알 리가 없는 용사는 신이나 있었다.
확실히 심심할 때마다 양성소에 대한 추억거리를 자주 풀어놓긴 했지만 아펠이 이렇게나 좋아할지는 몰랐다. 공녀는 코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온 공녀는 아펠에게 옷을 빌려주기로 했다. 아펠의 옷은 평소 입고 다니던 모험가 복장과 오늘 기념식을 위해 황실에서 빌려준 드레스가 전부였다.
그나마 마왕과 상대하기 전까지는 옷을 몇 벌인가 갖고 다녔지만 난리 통에 옷을 챙기고 다닐 여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펠의 나이가 한 살 어렸지만 공녀가 워낙 덩치가 작아 공녀에게 맞춘 의상은 아펠이 입기에 다소 갑갑할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둘 다 간편하고 헐렁한 옷과 바지를 입었다. 양성소에 가면 몸을 움직이게 될지도 몰랐기에 편한 옷을 고른 것이었다.
건물을 나온 둘을 본 황자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 의도랑은 좀 다르지만, 둘 다 그 옷도 잘 어울리네.”
황자의 칭찬에 아펠은 성검을 꼭 끌어안으며 부끄러워했고 공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황자는 여느 때처럼 공녀와 아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스스로 가볍게 마차에 오른 공녀 역시 아펠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펠은 잠시 고민하다가 황자에게 성검을 건네고 공녀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황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곧 마차가 황궁 밖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