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제 3 장. 용사, 그리고 용사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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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나는 병기창고에서 자신의 주무기인 세검을 찾았다.
항상 쓰던 11번이 새겨진 세검을 든 벨로나는 끝을 뭉툭하게 처리한 가검(假劍)인지 확인한 후 연병장으로 나왔다.
연병장에서는 이미 공녀의 지휘 아래 마력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조교의 도움을 받아 연병장에 줄을 그어 구역을 나눈 공녀는 연병장에 도열해있는 생도들을 향해 외쳤다.
“마법과 오러를 둘 다 쓸 수 있는 여러분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나이가 어느 정도 찬 생도들이 상당수 몰려갔다. 그 다음에는 마법만 쓸 수 있는 경우, 그 다음은 둘 다 쓰지 못하는 경우의 생도들을 배치했다. 대부분 나이 순서대로 정렬되었다.
“남은 분들은 마법은 쓰지 못하지만 오러를 쓸 수 있는 분들이죠?”
벨로나를 비롯한 다섯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벨로나와 다른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나이가 제법 되었는데 오러를 쓰는것은 무기를 팔처럼 자연스레 다루며 마력을 주입해야하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도달하기 힘든 영역이었다.
마법에 대한 센스가 없는데도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무기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고 본능적으로 마력을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즉, 마법의 사용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파멸과의 전투에 제일 적합한 인재라는 뜻이었다.
어느새 공녀의 뒤편에 선 황자는 그녀에게 살짝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요즘 유행하는 제스처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는 공녀에게 황자는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어흠. 내가 아까 말했던 ‘특수한 목적’을 위한 기사를 양성하는 훈련에는 여러분들이 중심이 되어야할 것이오. 마력을 마법이 아니라 몸으로 이해하는 사람들 말이지.”
황자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을 둘러보다 제일 나이가 어린 소년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런데, 카르나타. 너는 왜 여기 있는 거니?”
“네! 황자전하형님! 저도 올해부터 양성소에 들어왔습니다!”
무척이나 씩씩한 아이였다. 나이는 공녀나 아펠의 또래로 보였다. 무엇보다 괴상한 호칭에 공녀는 의문을 품었다.
“황자전하형님이라니……. 도대체 이 생도분하고 황자전하는 무슨 관계이시죠?”
카르나타라고 불린 소년은 공녀의 질문에 대답하려다 황자의 눈치를 살폈다.
황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르나타는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고모님께서 황후님이십니다!”
“아, 블란테변경백님의?”
공녀가 아는 체를 하자 카르나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변경백님이 저의 조부님이십니다!”
카르나타가 저 나이에 오러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갔다.
블란테 변경백 가문은 누가 뭐래도 제국 제일의 무신 가문이었으며 가문의 아이는 태어나는 날부터 검을 쥔다고 할 정도였으니.
나이 어린 생도들이 시기와 두려움이 섞인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오러를 다룰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또래는 물론 최소 2~3살 위까지는 상대할 자가 없을 터였다.
언제까지 수백 명의 생도들을 세워놓고 몇 명하고만 이야기 할 수는 없었기에, 공녀는 슬슬 생도들에게 소소한 가르침을 제공하기로 했다.
공녀는 우선 마법과 오러를 전부 쓸 수 있는 집단으로 향했다.
50여명 남짓한 인원의 그들은 대부분 세 번째 승단까지 마친 졸업반이었고, 기사단 입단이 유력했다. 개중에는 테르한의 기억에 남아있는 후배들이 상당수 있었다.
통칭 A그룹이라 부르기로 했다.
- 제일 정석적인 녀석들이군. 이미 마법을 수족처럼 다루고 오러까지 쓰는 이들한테가르침을 줄 것이 있는가?
- 글쎄. 나도 이 집단에 속해있었지만 그야말로 예비 기사단이라 할 수 있는 애들이야. 오러에 관해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를 던져주면 알아서 잘 다룰 거야.
기사단이 강해져야 이후 파멸의 군대가 나타났을 때 대비할 수 있었다.
그때 즈음이면 현재 기사단의 멤버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후기지수 양성에 힘을 쓸 시기이니 현재 여기 있는 이들이 핵심전력이 될 것이었다.
생도들 앞에 선 공녀는 양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뒷짐을 지고 섰다. 의외로 제대로 된 제식 동작에 다소 풀어져있던 A그룹 생도들은 저도 모르게 차렷 자세를 취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아리에 제즈릭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께선 이미 마법과 오러를 다루실 수 있으니 얼마 지나지않아 기사단의 일원이 되실 수 있을 거예요.”
A그룹 사이에서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렇게 그들을 격려만 하고 돌아가는가 싶었던 공녀의 말이 이어졌다.
“여기서 제일 강한 분은누구시죠?”
공녀의 말에 분위기가 반전됐다. 이 나이대의 청소년들에게 누가 제일 강한지 따위의 질문을 받으면 으레 그러하듯 라이벌 관계인 이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제가 제일 강합니다.”
그 중 한 명이 손을 들었고,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발언자를 확인한생도들은 자존심이 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반박하지 못하고 다시 차렷 자세로 돌아갔다.
그를 본 공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차 제국 제일검을 노린다는 마테스.
제국의 귀족이 아닌 외국 출신이었지만 그 검술 하나로 모두가 그를 인정하게 만든 괴물이었다. 이 점은 테르한과 매우 흡사했고, 그래서 그런지 그는 예전부터 테르한을 유독 따랐었다.
앞으로 나온 마테스의 키는 공녀보다 한참 커서 그를 올려볼 수밖에 없었다.
“마테스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마테스 생도님.”
공녀와 인사한 마테스는 자신의 검에 손을 얹었다.
“제즈릭 공녀님. 죄송하지만 저는 검으로밖에 이야기 할 줄 모르는 녀석입니다. 허나 공녀님께선 검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군요.”
- 오. 이 녀석, 텃세 부리는 건가?
- 글쎄. 내가 생도시절이었어도 10살짜리 꼬맹이가 마력 각성했답시고 나를 가르치려 한다면 똑같이 말해줬을걸.
공녀는 한 쪽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공녀가 옆으로 손을 뻗자 근처에 세워져있던 수많은 가검 중 하나가 그녀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람의 마력을 운용해 멀리 있던 검을 마치 염동력을 쓴 듯 움직이는 것을본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염동력 같은 상위 마법은 기사가 익히기 어려웠지만 위급 상황에서 유용한 능력이었다.
마테스는 그제야 흥미를 띤 눈으로 폼멜을 움켜쥐었다.
- 그대도 응용력이 제법이군.
- 이 정도야 별거 아니지. 그런데 슬슬 마력이 부족한 거 같은데.
오전부터 바쁜 일정으로 인해 몸이 지쳐있어서 그런지 몇 번의 마력 운용만으로도 비축한 마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 내가 근처의 마력을 끌어 모아 보겠네. 그대는 가르침에 집중하도록.
잠시 눈을 감았던 공녀는 서서히 마력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검을 살짝들었다가 옆으로 뿌렸다.
검을 한 번도 안 잡아봤다고 보기에는 동작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육체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몸에는 땅의 마력을 채우고 검에는 바람의 마력을 깃들게 한 공녀는 가볍게 검을몇 수 휘둘러보았다.
테르한의 몸에서 구현되는 검술보다야 훨씬 가벼웠지만 썩 만족할만한 검술이 펼쳐졌다.
공녀를 지켜보던 마테스는 그녀의 동작이 단순히 어린애가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게다가 ‘양성소 1초식’이라고 장난스럽게 불리는, 훈련 때 죽어라 반복했던 기초 동작을 물 흐르듯 연속적으로 행하는 동작들이 눈에 익었다.
수 년 전 선배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이었다. 마테스는 공녀가 어디서 저런 걸 배웠는지 궁금해졌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몇 번의 동작에 벌써 지친 공녀는 살짝 땀이 난 이마를 소매로 슥 훔치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대신 마테스 생도님께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네. 제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오러를 사용해줄 수 있나요?”
양성소 내에서는 특정한 상황이 아니면 오러 사용이 금지되어있었다.
기사 한 명을 양성하는 데 상당한 금액이 들어가는데, 생도들이 대련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마테스는 어느새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는 교관들과 조교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양성소의 책임자인 길단 경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검을 뽑아든 마테스는 가장 익숙한 마법주문을 영창했다. 그는 마법이 발동되기 직전 움직이는 마력을 캐치해 그대로 검으로 이동시켜 오러를 발동했다.
가장 일반적이면서 실패 확률이 큰 방법이었다. 하지만 익히기는 제일 쉬웠고, 실패해도 바로 다음 마법을 쓰면 되었기에 큰 페널티는 없다시피 했다.
물론 실패할 때마다 마력과 시간이 낭비되었으며 자신이 쓸 수 있는 마법의 세기에 따라 오러의 한계가 정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마테스는 마법의 사용에도 능숙한 편이어서, 제법 강한 마법에서 추출한 마력을 실패 없이 검에 깃들게 할 수 있었다. 동기들 사이에서도 최상위권의 위력적인 오러를 휘두를 수 있었다.
검에 깃든 은은한 은색의 오러는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는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잠시 마테스의 오러를 관찰하던 공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테스 녀석, 제법 열심히 훈련했군.’
처음 오러 발동에 성공하고 한달음에 달려와 자랑하던 꼬맹이 녀석이 눈에 선했다.
공녀는 아끼는 후배에게 성장의 힌트를 줄 겸, 검을 잡은 김에 생각난 마력 운용법을 시험해볼 겸 마력을 끌어 모았다.
간단하게 검에 마력을 주입한 공녀는 주위가 놀랄 틈도 주지 않고 마력에 변화를 주었다.
공녀의 검에 불의 속성을 머금은 마력이 깃들자 검신이 은은한 붉은 기운을 띠기 시작했다.
이쪽을 지켜보던 이들이 숨을 죽이고 공녀의 검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밝게 타오르는 검신을 치켜든 공녀는 사람이 없는 뒤쪽의 공터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화륵
검에서 뻗어 나온 오러가 공기를 불사르며 흙바닥에 검은 그을음을 남겼다. 내친김에 주변의 마력을 바람 속성으로 바꾼 공녀는 화염의 오러 주위에 바람의 마력을 휘감았다.
검을 타고 자그마한 불꽃회오리가 형성되더니 일정한간격으로 검을 휘감았다. 검에 담긴 불의 마력과 바람의 마력이 부딪히며 마찰하는 곳을 따라 불꽃이 흘러내렸다.
- 오, 이게 되네.
- 그대여, 주의를…….
분열이 주의를 주는 와중 검에 깃들었던 마력이 흩어졌다. 체내의 마력을 전부 소진한 공녀는 하체에 담아두었던 땅의 마력이 흩어지자 몸을 살짝 휘청거렸다.
턱
어느새 다가와 공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벨로나는 무서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공녀의 건강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깐깐했는데, 근 2년간 만나지 못한 동안 그 증상이 더욱 심해진 모양이었다.
“아가씨. 마력을 각성하셨다고 함부로 힘을 쓰시면 안돼요.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실 텐데.”
모두 공녀가 보여준 속성을 담은 오러인지 마법인지 모를 것에 대해 놀라워했지만 벨로나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공녀의 안위만이 중요했다.
“미안, 벨로나. 그런데 방금 내가 보여준 것, 너도 할 수 있지?”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14살인 벨로나는 아직 두 번째 승급시험도 치루지 않은 상태였고, 검술과 오러는 뛰어나지만 마법을 쓰지 못해 방대한 마력의 양에 비해 제 실력이 안 나온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공녀가 보여준 속성검을 쓸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모름지기 오러는 아무런 속성을 띠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고, 지금까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며 각자도생의 경향이 강한 기사단의 성격상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오러의 발동 방식에서 기인한 일종의 고정관념이었는데, 일반적인 발동 방식인 마법 발동 후 움직이는 마력을 포착해서 오러를 발동하는 방식은 마법 발동 방식의 최종 단계인 속성의 부여 단계까지 도달하면 오러 대신 마법이 발동하므로 속성의 부여가 불가능했다.
보다 마력을 근본적으로 느끼고 실제로 어느 정도 운용이 가능한 벨로나의 경우 공녀가 선보인 속성검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오러에 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면 마법을 못쓰는 것 따위는 페널티가 될 수 없었다.
벨로나는 공녀의 눈에 깃든 확신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는 아까 강당에서 벨로나가 마력에 속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을 보았기에 간단한 요령만 알려주었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벨로나는 세검을 든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가져와 기수식을 취했다. 얇은 검신을 따라 은색의 깨끗한 오러가 흘렀다.
벨로나는 심호흡을 한 뒤 불의 마법에 대한 이론을 떠올렸다. 마법이 발동하는 중간 단계에서 무언가 걸리적거려 마법을 쓸 수 없는 벨로나는 마법의 마지막 단계인 속성의 부여에만 집중했다.
몇 초 뒤, 검이 밝게 타올랐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