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제 3 장. 용사, 그리고 용사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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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연병장에서는 속성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마법을 쓰지 못하지만 오러를 쓸 수 있는 5명이 전부 속성을 띤 오러를 발동하는데 성공한 다음 그들은 토론의 중심에 있었다. 오러를 쓰는 방식이 다소 독특한 몇 명의 생도들도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다.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황자는 조용히 그들의 명단을체크했다.
서로 경쟁하는 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생도들은 원래 자신의 노하우를 쉽게 공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녀가 보여준 오러와 그것을 토대로 속성검을 구현한 생도들의 영향으로 그들은 흥분한 상태였고, 더 강해지고픈 열망으로 폭발적인 정보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속성을 띤 오러의 활용성은 무궁무진했다.
지금까지 오러를 두르고도 상대하기 힘든 특수한 적들은 마법사들의 마법으로 물리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속성검을 익히는 기사들이 늘어나면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
마법사들의 집단인 마탑과 라이벌 관계인 기사단이 더 이상 마법사들에게 아쉬워하며 손을 벌릴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물론이는 기사단 일원인 교관들의 생각이었고, 생도들은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 자체에 흥미가 느껴 열띤 토론의 장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공녀는 연병장 한 구석에 있는 의자에서 축 늘어져있었다.
어린생도들에게 둘러싸여 마왕을 물리친 이야기를 해주던 아펠은 대화 주제를 검술로 흘리고는 카르나타가 큰 목소리로 떠드는 동안 살짝 빠져나왔다.
의자 위에서 퍼질러져있는 공녀를 발견한 아펠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아펠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공녀는 힘겹게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 지쳤지만 괜찮아요.”
사실 마력이 한줌밖에 남지 않은 공녀의 몸은예전의 병약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가느다란 팔다리를 힘없이 축 늘어뜨린 모습은 방금까지 수백 명의 기사단 생도들을 압도한 소녀와 동일인물인지 의심케 했다.
아펠은 공녀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 칭찬의 말을 꺼냈다.
“검술을 배우셨나 봐요. 제가 스승님한테 배운 검술하고 비슷하던데 공녀님을 아가씨라고 부르던 그 생도 분한테 배우신 건가요?”
“네? 그, 그런 셈이죠.”
공녀는 그제야 자신이 홈그라운드에 돌아와 지나치게 마음 편히 행동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펠이 이런 말을 할 정도면 황자가 조금 있다가 공녀를 다시 엘레나에게 데려가 정화의 진 한 번 쏴달라고 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건가?
- 좀 알려줬어야지!
- 그대가 파멸을 막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 후배들을 교육시키는 것을 어찌 막겠는가.
- 누가 희생을 한다는 거야.
공녀는억지로 기운을 쥐어짜 마력을 그러모았다. 분열과 함께 열심히 대기 중의 마력을 모아 차곡차곡 몸에 쌓은 공녀는 온몸에 미약한 마력을 두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좀 괜찮니?”
열심히 교관들과 이야기하던 황자가 둘에게 다가왔다. 공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리에가 그렇게 검을 잘 다루는 줄은 몰랐는데.”
“과찬이십니다. 그냥 흉내 내는 수준이에요.”
가벼운 칭찬에 공녀가 정색을 하며 부정하자 황자는 잠시 공녀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온 목적도 초과달성했으니 슬슬 돌아갈까?”
“네.”
지쳐있던 공녀와 아펠은 황자의 제안을 달가워했고, 그들은 곧 돌아갈 채비를 했다.
“실례합니다, 공녀님.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마테스가 공녀의 앞을 막아섰다.
공녀는 올 것이 왔다는 심정으로 황자와 아펠에게 양해를 구했다.
공녀와 마테스는 연병장 구석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갔다.
“얘기해 보세요, 마테스 생도님.”
마테스는 잠시 말없이 서있었다.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을 하고 있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녀님께서는 혹시 ‘정령검사’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모를 리가 없었다. 테르한은 마테스에게 몇 번이나 들었었고, 아리에가 좋아하는 용사의 이야기에도 정령검사가 등장했다.
‘여기서는 아리에의 지식을 동원해 응대를 하는 것이 적당하겠지.’
공녀는 세심하게 말을 골랐다.
“5대 용사의 일행 중에 정령검사가 있었죠.”
“아시는군요. 과거 정령들이 있었을 시절 그들의 힘을 검에깃들게 하는 검사.”
마테스는 한숨을 쉬었다.
“저는 정령검사의 후예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마테스는 정령검사가 지켜내지 못한 사막왕국의 핏줄을 잇고 있었다.
일곱 번째 마왕 ‘배신’이 사막왕국을 집어삼키자 도망쳐 나온 왕자가 왕국의 비전인 정령검술을 쓰며 용사와 함께 마왕을 물리친 이야기는 책으로 나와 있었고, 아리에는 물론 그 책을 갖고 있었다.
마왕을 물리친 후 왕자는 사막왕국의 생존자들과 함께 사막 인근의 땅에 작은 마을을 형성했고, 그 마을은 천년이 훌쩍 지난 현재 제국 산하의 조그마한 독립 공국이 되었다. 마테스는 그곳 출신이었다.
마테스가 정령검사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공녀는 오러에 속성을 부여하는 법을 그의 눈앞에서 보여주었다.
“정령들이 원소의 마족으로 타락한 후 정령검은 허황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마테스의 눈이 조용한 열기를 띠었다.
“하지만 오늘 공녀님께서 보여주신 검에서 정령검의 편린을 보았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가르침에 반드시 보답해드리겠습니다.”
마테스는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는 허리를 숙였다. 공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보답은 괜찮아요. 다만 앞으로 제국을, 아니 세상을 위해 싸워주시면 돼요.
“하하. 공녀님도 거창한 임무를 내려주시는군요.”
마테스의 미소가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공녀는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파멸의 군세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열의 견해에 따르면 최근의 조촐한 마왕군과 궤를 달리 할 가능성이 컸다.
그에 대비하기 위해 어느 때보다 강한 군대와 걸출한 인재들이 필요했다.
공녀는 새삼스레 황자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 파멸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권력과 인맥을 두루 갖춘 그의 존재는 필수불가결이었다.
마테스는 인사를 하고 연병장으로 향했다. 공녀는 나른한 몸과 뿌듯한 심경으로 연병장을 떠났다.
돌아오는 마차 안, 공녀는 저번처럼 또 졸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펠의 어깨에 기대어 입을 헤 벌리고 자고 있었는데, 덕분에 아펠은 옴짝달싹 못하고 굳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마차만 타면 자는 병에 걸렸나 하고 생각한 황자는 자고 있는 공녀의 얼굴을 보며 오늘 있었던 그녀의 활약상을 떠올렸다.
마력각성자로써 마력을 움직이는 방법에 대한 추상적인 설명만 해주었으면 했으나 오러의 새로운 방향에 대해 제시를 해버렸다.
‘참 대단한 인재가 아닌가.’
재미도 있고 능력도 있고, 보기보다 의욕적이었다. 무엇보다 공녀는 부정하겠지만, 자기편인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황자는 그녀의 안에 무엇이 깃들어있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알 수 없는 것의 정체를 알게 되면 실망하는 경우가 있고, 더욱 흥미가 가는 경우가 있는데 공녀의 정체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저쪽에서 먼저 밝힐 생각이 없으면 굳이 알아낼 필요는 없지.’
황자는 제일 맛있는 것을 맨 나중에 먹는 성격이었다. 제일 흥미로운 것을 제일 나중에 알아내는 편이 더 재미있을 것이분명했다.
‘내일이 기대되는걸.’
내일은 파멸에 대항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들을 만드는 곳에 들를 예정이었다. 그곳에서 공녀는 또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었다.
마차의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정신을 차린 공녀는 자신의 머리를 누르고 있는 아펠의 머리를 조심스레 받쳐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황자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고, 자고 있는 아펠이 깰까봐 움직이기 힘든 공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황자가 살며시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려 아펠을 넘겨달라는 듯 양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아펠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공녀는 황자에게 그녀를 넘겨주는 것이 꺼려졌다.
어느 정도 회복된 마력을 몸에 두르고 아펠을 안아든 공녀는 아펠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마차에서 내리며 업어들었다. 부드러운 바람의 마력들이 아펠의 자세를 안정시켜 깨지 않을 수 있었다.
시밀레가 기겁을 하며 아펠을 받으려고 했지만 축 늘어진 아펠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공녀는 말없이 고개를 저은 뒤 황자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 귀빈관을 향해 걸어갔다.
양성소에서 공녀의 능력을 지켜본 호위기사들은 굳이 도와준답시고 나서지 않았다. 공녀가 가볍게 발걸음을 떼자 그제야 시밀레와 하녀들이 황자에게 인사를 하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황자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하여간 고집은.”
황자는 공녀가 이상할 정도로 아펠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꺼려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아펠이 자신의 사촌동생이라는 것을 몰랐던가. 나중에 공녀를 놀려주기 위한 정보를 갈무리한 황자는 창문을 열고 호위기사에게 명했다.
“마탑으로 간다.”
“예, 전하.”
마차는 황궁의 한쪽 귀퉁이에 높게 솟아있는 마탑으로 향했다.
공녀와 아펠에게는 그다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일들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바래다준 지금이 제일 적절한 시기였다.
마왕의 능력은 마왕군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파멸의 군세가 생성된다면 그들은 마법이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1600여 년 전에 인간보다 뛰어났던 수많은 종족들이 멸망당한 이유도 강력한 마왕과 마법이 통하지 않는 마왕군 때문이라는 기록도 있었다.
그리하여 앞으로, 최소한 파멸을 막을 때까지는 마법에 대한 제국의 투자가 크게 감소할 것이다. 당장 상대해야할 적에게 통하지 않는 무기를 준비해봐야 자원과 인력을 낭비할 뿐이었다.
물론 마탑에 있는 저 고집불통들이 황실의 방침을 고분고분 따를 리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른 제안을 하여 협상할 예정이다.
‘그건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네.’
공녀와 아펠에게는 비겁한 술수를 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마차가 마탑에 다다랐다. 황자는 각오를 다지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의 앞에는 어느새 연구소에서 미리 나와 있던 이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그들을 돌아보며 황자가 말했다.
“자, 일할 시간이다.”
황자와 연구원들이 마탑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아펠의 방은 공녀의 옆방으로 배정되었다. 산뜻한 시트가 깔려있는 침대에 아펠을 뉘고 나니 저녁시간이 가까웠다.
공녀는 새근새근 자는 아펠의 앞머리를 살짝 넘겨주었다.
‘어느새 이만큼 길었구나.’
마왕군의 마지막 장군을 무찌르고 마왕군 잔당과 제국의 정규군이 전투를 치르는 사이 분열이 자리 잡은 곳을 알아내기 위해 용사의 머리카락으로 점을 쳤을 때였던가.
삐뚤빼뚤해진 머리에 울상을 짓던 아펠의 머리를 다듬어주었었다.
그 후 두어 달이 넘는 사투 끝에 마왕이 있는 요새를 찾아내어 마왕을 무찌르고 어쩌다보니 지금 이 상황.
아펠은 머리카락 길이만큼 성장했고, 자신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공녀는 아펠에게 이불을 덮어준 다음 방 밖으로 나왔다. 그녀를 기다리던 시밀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떼려고 하자 검지를 입술에 가져간 공녀는 쉿 소리를 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공녀님. 피곤하지 않으세요?”
시밀레가 어깨를 살짝 풀며 말했다. 공녀는 난감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몸은 멀쩡해.”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용사님이 깨면 같이 먹을게.”
시밀레는 알겠다고 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간단하게 씻은 공녀는 아펠이 깰 때까지 잠시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결국 공녀와 아펠은 밤이 다 되어 늦은 저녁을 먹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