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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화 〉제 4 장. 그곳에 그대로 있기를 - 1 (19/82)



〈 19화 〉제 4 장. 그곳에 그대로 있기를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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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여느 때처럼 느지막이 일어난 공녀는 머리를 물 묻힌 빗으로 대충 빗고 실내용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공녀를 기다리다 못한 아펠이 먼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잠자리는 편안하셨나요?”

“네, 덕분에요.”

공녀가 자리에 앉자 푸짐한 식사가 나왔다. 아펠이  양을 보고 살짝 놀라자 공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잘 먹어야 잘 크죠.”

“네…….”

자기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덩치는 작은 공녀의 말에 아펠은 미심쩍다는 듯 대답했다.
곧 식사를 마친 아펠은 내일 있을 개선행사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중앙궁으로 가야한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긋하게 2인분 정도의 식사를 마친 공녀는 방으로 돌아와 어제 기사단 양성소에서 선물 받은 소검 형태의 가검을 꺼내들었다.

며칠 만에 몸에 깃든 마력을 제법 자유롭게 다루게 된 공녀는 하체에는 땅의 속성을, 상체에는 바람의 속성을 머금었다.
두 속성이 만나는 허리 쪽에는 속성을 띠지 않는 마력을 머금어 혹시 모를 속성 충돌에 대비했다.
공녀는 몸에 두른 마력을 체내에서 순환시키며 스텝을 밟았다. 소녀의 다리로는 나오기 힘든 묵직한 보법이 펼쳐졌다.
공녀는 상체에 머금은 바람의 마력을 검까지 연장했다. 옅은 연두색의 오러가 검에 깃들며 무게감이 사라졌다. 이제 허공에 맨손을 휘두르는 속도만큼 검이 빨라질 것이었다.

- 마력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 능숙해졌군.

- 네 덕분이지.

만일 분열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마력을 각성했으니마법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해서 실용적인 용도 의외에 흥미도 없는 마법을 억지로 배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파멸에 대한 것은 까맣게 모른 채 있다가 황자에게 마왕이  강림한다는 말을 듣고 지금보다 그에게 더 휘둘렸을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마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새로운 검의 경지에 오르기는커녕 몸을 만드는 것조차 벅찼을 것이었다. 타고난 검사인 테르한은  점을 제일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마움을 느낀다면 성의를 표하도록.

묘하게 장난기를 띤 분열의 말에 공녀는 미소를 지었다.

- 무엇을 원하십니까, 마왕님?

공녀의 질문에 분열은 대답하지 않았다. 공녀는 열심히 검을 휘두르며 그냥 해본 말이었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다.

그렇게 5분  검을 휘두른 공녀는 탁해진 마력을 배출하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때 분열이 말을 걸었다.

- 그대가 들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부탁할 것이 있다.

- 네, 말씀하시죠.

기껏 말을 해놓고 분열은 한참을 주저했다. 분열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공녀는 답답한 마음에 먼저 말을 꺼냈다.

- 그렇게 말하기 힘든 일이야? 내가 할  없는 일이면못한다고 할게. 그냥 말해.

그래. 아마 들어주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대가 그렇게 말하니 얘기하겠다.

분열은 잠시 말을 골랐다.
분열은 지금 공녀에게 할 부탁이 인간, 특히 테르한에게 하기는 다소 뻔뻔한 부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대는 나의 군대를 상대한 적이 있지. 그들이 어떤 종족이었는지 기억나는가?

공녀는 테르한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좋은 추억은 아니었기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 글쎄. 황야의 마족, 숲의 마족,원소의 마족도 좀 있던  같고. 거의 모든 마족에서 조금씩 차출된 느낌이었는데. 아, 인간도 있었어.

- 인간들은 어느 시대에나 마왕군에 존재해왔지. 그나저나 그대가 알고 있는 종족명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군.

- 그렇겠지. 멀쩡하던 종족들이 마왕한테 멸족당한 다음 타락해서 마족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거잖아.

그들은 한때 다른 이름으로 불렸었다. 그대의 기억과 대조해보면 오크, 다크엘프, 정령인 것 같군.

- 옛날에는 그런 종족이었다고 하더라. 뭐, 지금은 전부 마족들이지만.

공녀는 전신의 마력을 물의 속성으로 바꾸고 배어나온 땀을 증발시켰다. 잠시 심호흡을 한 공녀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그래서? 마왕군은 이미 제국군한테 전멸 당했잖아.

- 나도 알고 있다. 흠.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확실히 기억에도 없군.

- 뭘 듣지 못했다는 거야?

분열은 말없이 자신의 기억을 공유했다. 갑자기 흘러들어온 정보에  끝이 방향을 잃고 바닥에 닿았다.

- 뭐야, 이건.

공녀는 검을 늘어뜨린 채 분열이 공유한 정보를 탐독했다.

인간을 제외하면 그들은 하나의 종족.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인간중에도 그들은 다수 포진하고 있었지.

공녀는 분열의 기억에서 핵심을 짚어냈다.

- 도플갱어?

- 그래. 나의 군세는 도플갱어가 주를 이루는 군이었다. 각종 종족들을 흉내 내며 똑같은 얼굴을 가질 수 있는 그들은 그야말로  분열에 어울리는 종족이지.

분열의 말에는 숨길  없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공녀는 이런 정보를 어디서도 듣지 못했기에 제국을 비롯한 인간들은  사실을 전혀 모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 그렇다면 다행이겠지. 적어도 남은 이들은 피해를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니.

- 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 변방의 왕국에 도플갱어와 같이 살아가는 지역이 있다고 하던데.

그곳이 내 군세가 일어난 곳이었다. 내가 세상으로 강림하면서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지. 상당수의 도플갱어들이  군세에 합류했다. 적어도 군에 합류하지 않고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무사하면 좋으련만.

공녀는 슬슬 분열이 부탁하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확실히 마왕군에게 피해를 당한 인간이나 그들을 직접상대했던 테르한이 들어주기에는 다소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마을에 남은 도플갱어들의 상태를 확인해달라는 거야?

- 그렇다. 가능하다면 동굴에 살던 이들의 안위도. 혹시 살아남은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테르한이었다면 거절했을 터였다. 목숨을 걸며 싸워왔던 상대군 잔당이 잘 지내는지 확인하라는 꼴이었으니 선뜻 수락하기 힘든 부탁이었다.

- 잔당이라니. 너무 하지 않은가. 마을에서 지내던 이들은 다른 종족들과 평화롭게 어울리던, 나의 백성이자 인간이다.

공녀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테르한이었다면 거절했을 부탁이었지만, 아리에는 아니었다.

- 좋아. 어차피 ‘내’가 책에서 읽은 그 지역에 흥미도 있고, 무엇보다 파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뭉쳐야 하잖아? 종족을 불문하고 말이야.

공녀가 대답하기 전에 이미 답을 들은 분열에게서 환희의 감정이 느껴져 왔다. 지금껏 분열의 감정이 직접 흘러들어온 적은 없었다. 그 영향인지 알 수는 없지만 공녀도 기분이 좋아졌다.

- 그런데 내가 여기서언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처리해야 할 일도 산더미고, 그쪽까지 기차가 다니지도 않을  같고…….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는 말을 타고도 수십 일이 걸리는 거리를 며칠 만에 오간다. 주로 병력이나 물자의 수송에 이용되지만 최근에는 민간인들도 기차를 많이 타고 다닌다고 한다.

하지만 공녀가 알고 있기로 도플갱어가 있는 왕국은 기차의 선로가 지나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테르한의 기억으로도 제일 가까운 기차역에서 내려서 제국군  왕국군과 합류해 며칠을 이동했으니 직접 찾아간다면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었다.

무엇보다 공녀는 황궁을 나갈 구실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명목상이긴 하지만 현재공녀는 황실의 볼모였고, 황자와 함께 행동하면 다소 제약이 풀릴 수 있었으나 제도를 벗어나기는 요원해보였다.

- 지금 당장 확인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곳은 이제막 전쟁이 끝난 곳이니 기웃거리는 것은 위험하겠지.

 사이에 마을에 살던 이들이 위험해지면?

- 제국은 녹록치 않다. 그때 가서 위험해질 정도면 지금도 위험하다. 우리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니 그들이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공녀는 분열의 말을 납득했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끝났다. 공녀는 다시 검을 들고 허공에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점심시간이 되었다.
풍성하게 차려진 점심을 먹고 나니 황자가 보낸 전령과 마차가 공녀의 귀빈관에 왔다.
전령의 말에 따르면 황자는 미리 목적지에 도착해 모종의 협상중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님.”

마차를 호위하는 케이선이 인사를 건넸다.
평소에 황후궁 주위의 경비를 담당하는 그는 종종 공녀가 머무는 귀빈관의 경비를 맡기도 하여 낯이 익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케이선 경.”

공녀가 예의바르게 인사하자 케이선은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띠며 공녀를 마차까지 에스코트했다. 공녀 또래의 딸이 있다던가. 여하튼 어린아이를 무척이나 귀여워하는 모양이었다.

공녀가 마차에 탑승하고 곧 말들이 천천히걸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혼자 마차에 타게 된 공녀는 푹신한 쿠션에 파묻혀 있다가 스르륵 눈이 감겨오자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다.


[……어떻겠소.]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낯선 목소리에 공녀는 눈을 떴다. 거대한 원형테이블에 앉아있던 공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흐릿한 형체의 무언가가 테이블을  둘러가며 앉아있었다.

[파멸.]

공녀의 목에서 무감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말하고도 그 목소리와 내용에 놀란 공녀는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러시오, 분열.]

바로 왼쪽에 앉아있던 형체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어조는 분열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부드럽고 인간적이었다.

[그대가 다 짊어질 필요는 없다.]

공녀의 의식이 깃든 분열의 목에서 제멋대로 말이 나왔다.

[아니. 그래야만 하오.]

파멸의 소름끼칠정도로 인간 같은 목소리에 공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라리 분열처럼 골렘이 말하는  같은 느낌이었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재해는 여러 가지 의미로 공포스러웠다.

그제야 공녀는 자신이 실제 이 장소에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의 과거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선을 살짝 움직여보니 인간의 인식 범위를 벗어난 형태의 마왕들이 보였다.

전부 세어보니 분열을 포함해서 모두 열아홉의 마왕이 모여 있었다.

‘하나 부족한데.’

 과거 마신의 영혼이 스무 개로 갈라져 마왕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신탁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었다. 모든 마왕이 모여 있는 이곳에 없는 한 명은 누구일까.

공녀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 미안하군. 그대가 자는 동안 영혼이 지나치게 붙어버렸어. 잠시만 기다리게.

허공에서 분열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공녀는 잠에서 깨었다.

‘꿈?’

- 꿈은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여 자신의 욕망을 풀어내는 것이지. 방금 그것은 꿈이 아니다.

- 그럼,  기억인가?

- 그렇다. 파멸이 세상에 나오기 조금 전의 모습이지.

1600여 년 전 마왕들의 모습을 직접 본 공녀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대로는파멸은 막을 수 없다.

같은 마왕인 분열의 몸을 빌린 상태에서도 파멸의 힘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감을 느꼈다.

단순히 인재를 키우고 힘을 길러 막을 수 있는 존재였다면 그 많던 종족들이 멸망했을까.

공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가 훨씬 강해져야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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