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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화 〉제 4 장. 그곳에 그대로 있기를 - 4 (22/82)



〈 22화 〉제 4 장. 그곳에 그대로 있기를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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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로도 계속이어진 회의는 점심시간 무렵에 끝났다.

공녀는 눈독들이고 있던 최신식 플라잉 보드 패키지를 들고 생글거리며 공학소를 나왔다.
적어도 3일에  번은 클레어의 연구소에 들려 마석의 개조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받은 선물이었다.

“오늘은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요. 무엇보다 성과가 금방 나올 것 같아 기대되는군.”

공녀는 황자와 알레온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플라잉 보드가 담긴 상자를 이리 저리 돌려가며 살펴보았다. 딴청을 피우는 공녀의 모습에 황자는 실소를 흘렸다.

“다음번에는 또 다른 의뢰를 가지고 오겠소. 그럼 이만.”

“살펴 가십시오.”

알레온과 클레어가 고개를 숙이자 공녀도 고개를 숙였다. 황자는 오른팔을 가슴께로 접으며 유난스런 인사로 작별을 고한  마차로 향했다.

양손 가득 큰 상자를 안아든 공녀에게 호위기사들이 손을 내밀었지만 최신식 플라잉 보드는 제법 비싼지라 공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못해서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기사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마차 한쪽에 플라잉 보드를 싣고 나니 앉을 공간이 없었다.
먼저 탑승해있던 황자가 자신이 옆자리를 탁탁 손으로 두들겼다.

“이걸 어쩌나. 그 상자 위에 앉을 수는 없으니 자리가 여기밖에 없네?”

공녀는 약이 올랐지만 어쩔 수 없이 황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평소에 서있을 때는 눈높이가 머리 하나 이상차이가 났지만 바로 옆에 앉자 거리감이 줄어들었다.

마차가 출발했다.

“슬슬 점심시간인데, 외식이나 할까?”

“전하 뜻대로 하세요.”

“알았어. 리에는 뭘 좋아하려나.”

공녀는 어디서 무얼 먹든 개의치 않았다. 테르한이야 강철도 씹어 먹을 사나이였고, 아리에는 검소하다 못해 빈약한 끼니로 억척스레 버텨왔기에 어떤 것도 잘 먹을 자신이 있었다.

“달콤한 팬케이크에 시럽을 가득 붓고 생크림을 올린 건 어때?”

공녀의 머릿속에 잠시 달콤함의 개념에 대한 혼란이 왔다. 그런 물건이 존재한다고?
반사적으로 오케이를 외칠 뻔한 공녀였지만 테르한의 뚝심으로 점심은 든든하게 먹어야한다는 지론을 펼쳤다.

“점심식사 하신다면서요. 그건 디저트잖아요.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공녀의 눈에는 달콤한 디저트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황자는 식사 후 꼭 디저트 가게에 들르기로 결정했다.

공녀는 마차에 타면 항상 그렇듯 슬슬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마차에 무슨 장치라도 되어있나 싶어서 비몽사몽간에 마력의 흐름을 감지해본 공녀는 마차에 제법 복잡한 마법 차단계열의 술식과 탑승자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마법이 걸려있음을 파악했다.
마력에 민감한 공녀에게 특히 효과가 좋은 모양이었다.

 사실을 알아낸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며 공녀는 잠이 들었다.

“…….”

공녀가 잠들자 황자는 의자 아래쪽을 열어 어느새 준비해놓은 베개를 꺼냈다.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공녀의 머리를 붙잡아 베개를 목에 받치고 그대로 등받이에 기대놓은 황자는 창문을 열고 손짓으로 목적지를 알렸다.
황자가 자주 가는 레스토랑을알고 있는 호위기사는 목적지를 마부에게 전했고, 마차는 번화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리에, 일어나.”

“으어억”

공녀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일어나자 황자는 얼굴을 반대편으로돌려버렸다. 들썩이는 그의 어깨를 보며 뒤늦게 상황파악을  공녀는 열이 오른 얼굴을 손부채질로 식히며 머리를 매만졌다.

‘베개는 또 언제 갖다놓은 거야.’

이제 마차의 비밀을 알았으니 마력을 적당히 흘려내기만 한다면 어지간히 피곤하지 않은 이상 잠들지 않을 것이었다. 베개를 황자에게 돌려준 공녀는 그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여긴?”

“내 단골 레스토랑.”

겉으로 보기에 상당히 오래되고 평범해 보이는 곳이었다.

먹는 것으로 불평하지않겠다고 다짐을 하긴 했지만, 공녀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제도에는 돈 많은 사람들의 지갑을 가볍게 해주기 위한 식당이 많았다.
바다건너 대륙에서만 난다는 귀한 향신료를 아낌없이 쓰는 곳부터 한 끼에 4인 가족의 한 달 치 생활비에 육박한다는 가격의 최고급 레스토랑까지.

살면서 절대 가볼  없을만한 곳을 가보는 것도 좋은 경험 아니겠는가. 절대 비싼 것이 먹어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자기합리화를 하던 공녀는 식당 안쪽이 생각보다 깔끔하고 세련되었다는 점에 놀랐고 메뉴판에 적혀있는 가격을 보고 또 놀랐다.
소문의 그 엄청 비싼 요리를 하는 곳이었다.

4인 가족 생활비 운운한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었지만 테르한이 용병으로 생활하던 때, 즉 유일하게 돈을 벌어봤던 때를 떠올려보니 한 끼를 이 가격에 먹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공녀가 상념에 잠겨있으려니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내륙에 위치한 제도에서는 구하기 쉽지 않은 싱싱한 해산물이 잔뜩 들어간 스프를  숟가락 떠먹어본 공녀의 눈에서 별이 튀었다.

음식의 맛에 감동받은 공녀를 향해 분열이 말했다.

- 이 음식은 제법 정갈한 마력을 뽑아낼 수 있겠군.

- 마력의 질도 음식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 아무래도 좋은 재료에는 좋은 마력이 깃들어있는 경우가 많지.

- 앞으로 음식도 비싼 것만 먹어야하나.

- 그대의 평소 식단도 화려한 편이다. 게다가 돈도 없지 않은가?

공녀의 식단은 황후가 후원자가 된 이후 크게 개선되었다. 물론 이 무지막지하게 비싼 레스토랑의 음식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으니 공녀는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체내에 쌓인 마력은 기분 탓인지 실제로 질이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매끄럽게 움직일  있었다.

마법을 쓰는 이들은 마력의 질에 따라 마력 소모 효율만이 달라지지만, 마력을 직접 움직이는 경우는 마력의 세기, 반응속도를 비롯한 전반적인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

조금이라도 빨리 강해져야 하는 공녀의 입장에서는 식단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황후마마께 조르는 것은 말도  되고.’

지금도 과분할 정도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고민이 깊어진 공녀가 스프를 깨작거리자 황자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맛없어?”

“아, 아뇨. 맛있어요.”

“처음에는 입에 들이 붓더니 갑자기 느려져서 문제가 있나 했지.”

황자의 말에 공녀는 눈을 흘겼다.

“이런 음식은 먹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잖아요.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어요.”

공녀의 말에 황자가 무슨 소리냐는  눈을 크게 떴다.

“앞으로 자주 들를 곳인데 그냥 편하게 먹어.”

“네? 이런 곳을 자주 온다고요?”

그제야 황자는 공녀의 고민에 대해 눈치 챘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리에가 열심히 일한 만큼 자주 올 거야.”

공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모름지기 일한만큼 먹어야한다.
공녀가 투정을 부리거나 불평을 늘어놓을 줄 알고 놀릴 준비를 하던 황자는 쉽게 납득하는 그녀를 보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잠시 후 메인디시가 나왔고, 화려한 식단에 정신을  차리던 공녀는 지극히 서민적인 반응으로 황자를 즐겁게 했다.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

공녀는 웬일인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편히 쉬라는 유혹적인 마력이 공녀를 흔들었지만 체내의 마력을 공고히 다져놓고 분열의 조언에 따라 머리 쪽에 있는 마력을 계속 순환시켜 그 영향을 피할 수 있었다.

- 이거 혹시 정신적인 술법에 저항할 수 있는 건가?

물론. 정신계열 마법이나 사술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다.

좋아. 파멸의 수하 중 정신공격을 하는 녀석이 있어도 어느 정도는 대비할  있겠네.

- 방심은 금물이다. 실제로 싸우는 도중에는 머리로 보낼 마력도 부족해질 테니.

- 그럼 평소에 버릇을 들여놓아야 하겠네.

- 그 편이 좋지. 머리는 제일 치명적인 약점 부위  하나이니 평소에도 마력으로보호하는 습관을 길러놓아라.

공녀는 대기 중에 떠다니는 마력을 머리 근처에 집중하는 연습을 했다.

체내에 쌓은 마력은 음식을 먹으면 생기는데, 마왕을 직접 상대해본 경험으로는 식사도 못하고 며칠간 싸우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었다.
체내의 마력이 고갈되어도 대기 중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으니 처음부터 그쪽으로 습관을 들여놓는 편이 좋았다.

마차가 귀빈관에 도착할 때 즈음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 정신계열 마법은 주로 어떤 속성이지?

- 거의 모든 속성에 분포해있다. 특히 조심해야 하는 것은 물이나 불이지. 물은 감각에 교란을 주고 불은 시야를 혼란시킨다.

- 음. 마력을 이용하면 그 마법 비슷한 효과를 낼 수도 있겠지?

- 하기 나름이지. 하지만 마력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그런 정교한 마법을 흉내 내긴 어렵다.

- 그럼 일단 방어에만 신경 써야겠네.

공녀가 분열과 이야기하는 사이 마차가 멈춰 섰다. 재빨리 맞은편의 플라잉 보드를 집어든 공녀는 마차에서 내렸다.

“공녀님. 이건 또 뭐예요?”

“선물 받아왔어.”

시밀레와 하녀들이 상자를 대신 들어주려 하였으나 공녀가 나지막하게 가격을얘기하자 다들 기겁하며 손을 뗐다. 시밀레만이 고집스럽게 상자를 대신 들어주겠다고 했으나 공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로 무겁지는 않아. 현관이나 열어줘.”

하는 수 없이 시밀레가 귀빈관 입구로 향한 사이,공녀는 황자에게 인사를 하러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공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기분 나쁜 미소를 띠며 킬킬대는 황자였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아니, 그거. 황궁에서 타는 거 금지인거 알지?”

“네?”

“황궁 출입구에 보관소가 생겼다니까 그쪽에 맡겨놓고 황궁 밖으로 나갈 때만 타고 다녀야한다? 그럼 이만.”

공녀가 뭐라 할세라 황자는 재빨리 마차의 문을 닫고 출발했다.
허망해진 공녀는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터덜터덜 귀빈관으로 돌아왔다.

“어서 오세요. 공녀님.”

공녀의 방에서 아펠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펠은  짧은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나서 지쳤는지 소파에 축 늘어져있는 상태였다. 공녀 역시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다녀왔습니다.”

지쳐있는 소녀들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공녀는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뒤 아펠의 옆자리에 앉아 똑같은 모습으로 늘어졌다.

곧 평화로운 낮잠 시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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