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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화 〉제 4 장. 그곳에 그대로 있기를 - 5 (23/82)



〈 23화 〉제 4 장. 그곳에 그대로 있기를 - 5


23 -


해가 저물어갈 무렵, 아펠과 공녀는 귀빈관 앞에 서있었다.

“내일 있을 개선행사 때문에 남문 근처에서 동료들이랑 저녁을 먹고 근처에서 머물기로 했어요. 행사가 남문에서시작해서요.”

“제도를  바퀴 돈다면서요?”

“네. 아침 일찍 시작해서 점심때까지 돌아다니다가 황궁으로 들어와서 만찬을 한대요.”

아펠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빨리 끝내고 쉬고 싶어요.”

아펠은 지쳐있었다.
이제 막 열 살이 된 그녀는 일 년 간의 용사 역할에 신물이 난 듯 했다.
공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저 조용히 아펠의 손을 잡아주었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아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마차가 도착했고, 성검을 품에 안은 아펠은 마차에 탑승했다.
아펠이  마차를 잠시 지켜보던 공녀는 홀로 귀빈관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누워 마력을 느리게 순환시켜 취침준비를 한 공녀는 잠들기 전 소박한 기원을 했다.
부디 내일은 큰일 없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공녀의 기원은 하루를 시작하자마자 박살나버렸다.

“리에! 어서 준비해야지!”

아침부터 쳐들어온 황자의 손에 이끌려 불편하고 화려한드레스를 입고 나온 공녀는 영문도 모른 채 그대로 마차에 몸을 실었다.

“저도 개선행사에 참석해야 하나요?”

“당연하지. 용사 일행의 최대 후원자인 제즈릭 공작가의 사람이잖아.”

테르한도 아리에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공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우리 가문이요?”

“그래. 황실에서는 제국군을 운용하면서 동시에 용사 일행을 일일이 챙겨주기 어려우니까 보통 그들을 후원해주는 귀족이 있어. 제즈릭 공작가는 벌써 세 번째 후원이야.”

후원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필요할 때마다 돈과 장비를 지급해주고 적절한 사람들을 소개시켜주고 교통편까지 마련해주던 사람. 가히 용사 일행의 숨은 멤버라 할 수 있는 그가 공작가의 사람이었을 줄은 몰랐다.

“에이전트?”

“응?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공녀는 저도 모르게 말 한마디 했다가 식은땀이 주륵 흐르는 경험을 했다. 괜히 반가워서 아는  했다가 경을 치게 생기자 저절로 변명이 튀어나왔다.

“용사님한테 들었어요.”

공녀는 아펠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황자는 납득하고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한숨 돌린 공녀는 마차의 방향이 황궁의 입구가 아닌 중앙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전하. 혹시 지금 중앙궁으로 가고 있나요?”

“물론이지. 설마 퍼레이드를 보고 싶었던 거야? 사람들 많아서 위험해.”

“아뇨. 그냥 입구 쪽으로 가서 들어올 때 맞이하는 건줄 알았죠.”

중앙궁으로 간다면 분명히 만찬이나 연회에 참석할 것이다.
온갖 귀족들이 모일 텐데 용사의 후원자인 제즈릭 공작가가 빠질 리는 없을 테니 또 공작과 맞닥뜨릴 것이 뻔했다.

공녀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자 그녀의 고민을 짐작한 황자는 귀띔을 해주었다.

“공작은 오늘 못 온다고 했어. 영지로 급하게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겼다고 했던가. 대신 루스카 공자가 온다고 하던데.”

“으.”

공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공녀는 큰 오라비인 루스카 제즈릭과 나이 차이가 제법 났는데, 아리에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는 올해에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와는 애초에 대화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사이가 좋았는지 나빴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남매를 가진 동기들이나 남동생이 있는 셰일로아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남매는 거의 다 철천지원수들인 모양이었으니, 루스카 또한 아리에를 싫어할 가능성이 있었다.

공녀는 일단 루스카를 경계하기로 했다.

중앙궁에도착한 공녀와 황자는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황자가 말없이 팔을 옆으로 내밀었지만 공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굳이 황자에게 에스코트 받을 생각도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키 차이 때문에 우습게 보일 수도 있었다.

전쟁 중에는 행사나 연회가 크게 줄어드니 이번 개선행사는 상당히 오랜만에 열리는 행사일 것이다. 이런 자리에 참석해본 적이 없는 공녀는 오랜만에 낯선 전장에 발을 딛는 기분으로 연회장에 들어섰다. 흥분인지 긴장인지 모를 느낌이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져나갔다.

“리베리안 황자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참석자 명부를 체크하던 문관이 외치자 웅성거리던 소리가 확 줄어들었다.
그제보다 훨씬 많고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홀을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공녀는 머리가 멍해지며 발을 뗄  없었다.

‘내가 나인 것을 숨기고 귀족으로 행동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리에라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거야. 아,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지금은 파멸을 막는 것을 생각하기도 벅찬데.’

온갖 잡생각이 공녀의 발을 묶어놓았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황궁  구석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파멸에 대비한 힘을 기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냥 이대로 발을 돌려서…….

- 정신 차리게. 그대는 방금 배운 것을 잘도 까먹는구먼.

분열의 말에 공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무방비해진 머리 쪽으로 마력을 움직여 순환시켜보니 공녀를 향한 얄팍한 술수가 느껴졌다.

자신에게 걸려있던 마법을 역추적한 공녀는 누군가가 커튼 뒤로 몸을 숨기는 것을 발견했다.
공녀가 따라오지 않자 뒤를 돌아본 황자는 자연스레 공녀의 시선을 따라갔고, 그 역시 같은 것을 보았다.

옆에 서있던 경비병에게 조용히 지시를 내린 황자는 다시금 공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걱정 마.”

공녀는 황자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걱정 안 해요.”


하얀색을 베이스로 노란색, 파란색의 포인트를 가미한 제복차림의 황자와 보라색 실크재질에 검은 프릴이 장식된 드레스를 입은 공녀는 정 반대의 색상을 훌륭하게 대비시키며 사람들에게 강렬한인상을 심어주었다.

공녀의 키가 너무 작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종종 나이가 찼음에도 상대가 없어 아빠나 오빠의 에스코트를 받는 영애가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공녀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개중에는 황실에 황녀가 있었는지 묻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공녀의 친오빠 루스카의 반응은 그쪽을 예의 주시하던 황자를 충분히 만족시키고 남을 정도였다.

뎅그렁

루스카가 들고 있던 잔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본 것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일부러 그쪽을 향해 웃어준 황자는 공녀를 정중히 계단 아래까지 에스코트한 뒤 마침 입구 근처에모여 있던 카르나타를 비롯한 귀족 출신의 기사단 양성소 멤버들에게 공녀를 인도했다.
공녀는 마음이 놓인 표정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황자는 그 모습을 지켜본 뒤 돌아섰다.
오늘은 다소 소란스러운 날이  거라 생각하며, 황자는 기분 좋게 황제의 알현실로 향했다.


루스카 제즈릭은 앞으로 제국의 신진 귀족을 이끌어갈 인재로, 지금까지 역경 없는 탄탄대로를 달려왔다.
아버지는 귀족 중의귀족 제즈릭 공작가의 주인이었으며, 자신은 제즈릭 공작가의 적법한 후계자이자 장차 제즈릭 공작령의 주인이 될 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머리와 부모님께 물려받은 수려한 외모. 자신을 따르는 많은 또래 귀족들, 자신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아리따운 영애들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물론 모든 이가 루스카는 완벽하다는 것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실패한 일은 밤을 새서라도 원인을 분석하고 재도전하여 해냈다. 근성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었지만, 다소 비겁한 수를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점은 완벽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유일하게 실패했다고 인정한 일은 딱 하나였다.
병약한 여동생을 고치지 못한 것.

루스카가 일곱 살 때 태어난 여동생 아리에는 어머니를 쏙 빼닮은 귀여운 아기였다.
매일매일 여동생을 보러 가던 그에게 어느 날부턴가 접근 금지령이 떨어졌다. 영문을 모른 채 투정을 부리던 그에게 친한 하인 한명이 여동생이 심각한 병에 걸려있다고 귀띔해주었다.

일곱 살짜리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동생이 낫기만을 기다리며  년이 흘렀다.
여동생은 여전히 방에서 나오지 못했고, 부모님과 가신들이 지쳐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는 열세 살이 되어 제도의 학교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집을 떠났고,   뒤 졸업할 무렵 동생이 자신과 교대하여 볼모로 제도로 보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루스카가 실패를 인정한 날이었다.

손을 놓고 있다가 경험한 실패는 그의 삶의 지침을 조금 바꿔놓았다. 매사에 신중하던 그는 어느새 진취적으로 일을 밀어붙이는 스타일로 탈바꿈해있었다.

며칠 전 아버지가 자기 대신 개선행사에 참석하라며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믿지 못했다. 자신이 실패했고, 포기한 일이 하루아침에 해결되어버렸다니?

인정할 수 없었다.

분명 아리에는 무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 걷기조차 힘든 가느다란 다리로 억지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공작가에 대한 억제의 상징으로 노리갯감이 되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루스카는 고요히 분노했다.
정신계열 마법을  줄 아는 이를 고용해 아리에가 모습을 드러내면 그나마 편히 지낼 수 있다고  귀빈관으로 돌려보내는 마법을 걸도록 지시했다. 상당한 금액이 들어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황실 녀석들의, 특히 1황자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루스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기억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는 아리에였다. 푸석푸석하지 않고 윤기가 흐르는 머릿결, 또렷한  눈. 여전히 가느다랗지만 전과는 확연히 비교가 되는 팔다리.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루스카는 마법사에게중지의 신호를 보냈다. 허나 사전에 사인 따위 맞춰놓지 않았기에 마법사는 아리에에게 정신마법을 걸어버렸다.
입구로 들어오던 아리에는 갑자기 멈춰 섰다.

동생과 이야기할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한 루스카는 혀를 찼다. 그래도 건강을 회복한 모양이라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리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황자가 내민 손을 잡고 마치 남매 같은 분위기를 내며 사이좋게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루스카는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렸다. 유리잔이 아니라 큰 소리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리에는 입구 쪽의 다소 거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어린 귀족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잔을 주워든 루스카에게 그의 친구들이 말을 건넸지만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때 황자가 그의 옆을 스쳐지나가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야, 제즈릭 공작가 분들은 귀여운 막내를 보는 표정들이 신기하군요.”

루스카가 당황한 사이 얄미운 황자는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뒤늦게 격분했다.
시선을 돌린 그의 눈에 꼬맹이들에게 둘러싸인 아리에가 들어왔다. 손에는 음식을 한가득 들고 뭐가 그리 신나는지 팔을 휘두르는 모습이 영락없는 동네 평민 꼬맹이 같았다.

루스카는 동생에게서 적잖은 이질감을 느꼈다.
항상 쳐져있는 어깨, 계속 침대에 누워있으면서도 힘겹게 몰아쉬는 호흡,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인 모습 전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루스카는 자기도 모르게 아리에가 있는 무리에 다가갔다. 그가 지척에 다다르자 아리에가 빙글 돌아섰다.

“안녕하세요, 루스카 제즈릭 공자님.”

아리에의 발언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루스카는 자기 여동생이 기억을 잃은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제정신으로는 나올 수 없는 소리였다.
그가 입을 열기 직전, 아리에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아리에 제즈릭이라고 합니다. 얼굴은 자주 보긴 했었는데, 우리 서로 이야기 해본 적 없죠?”

굳이 와서 아는 체를 하려는 그에게 던진 여동생의 명백한 도발이었다. 루스카는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고 웃었다.

“네, 그렇습니다. 아리에 제즈릭 공녀님. 우연히 성씨도 같고, 놀랍게도 전에 살던 주소하고 부모님도 같은데, 악수나  번 할까요?”

“물론이죠.”

아리에와 루스카는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루스카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아리에는 마력을 긁어모아 루스카의 손을 박살낼 기세로 꽉 쥐었다. 재빨리 땅계열의 강화마법으로 간신히 손을 지켜낸 루스카가 먼저 손을 풀었고, 공녀는 마지막으로 루스카의 손을 살짝 쥔 다음 놓아주었다.

공녀는 자신이 먼저 도발한 주제에 ‘역시 남매는 원수지간이 맞았어!’라며 주변인들에 대한 신뢰도를  단계 높였다.

그렇게 남매간의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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