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제 4 장. 그곳에 그대로 있기를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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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를 나눈 아리에와 루스카는 두어 걸음 떨어졌다.
검사들이 서로의 간격을 재듯 둘은 한동안 가만히 서서 시선을 교차하였다.
“많이 건강해졌구나, 아리에.”
“오라버니는 몇 년 못 본 사이에 많이 커지셨네요.”
공녀 안의 테르한은 루스카의 호칭에 대해 아까 전부터 고민하다가 아리에가 루스카를 부를 때 쓰려고 했던 호칭을 사용했다. 지금껏 루스카의 말을 일방적으로들어오기만 했던 아리에는 한 번도 써본 적 없었지만, ‘오라버니’라는 말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나왔다.
아리에의 기억에 의하면 루스카를 마지막을 본 건 4~5년 전 즈음이었다.
그때는 침대에 일어나 앉으면 어린 소년이었던 루스카와 눈높이가비슷했다. 지금은 공녀가 침대 위에 서있어야 눈높이가 비슷할 것 같았다.
긴장한 채 아리에와 루스카의 조우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남매끼리 모종의 장난이나 기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공녀의 정신이 나갔거나 제즈릭 공작가의 암투를 목격한 게 아니라 다행이라 여기며 그들은 이제 남매간의 독특한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루스카는 조그마한 공녀를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너는 별로 크지 않았구나.”
“아파서 제대로 못 큰 거죠.”
루스카가 미간을 찡그렸다.
순식간에 아픈 동생에게 키도 안 컸다고 놀린 나쁜 놈이 되어버린 루스카는 헛기침을 하고 화제를 돌렸다.
“황궁은 지낼만하니? 밖으로 나가기 힘들어 답답하겠구나.”
“원래 집에서도 밖으로 못 나갔었잖아요.”
공녀가 그것도 기억 못하냐는 투로 받아치자 루스카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대화를 이어갈수록 자신이 손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따끔하게 혼내고 싶어도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크흠. 그럼 언제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지?”
공녀는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버지께 말씀 드렸는데요. 취직해서 못 간다고.”
루스카는 아예 할 말을 잊었다.
아버지가 한 ‘아리에의 상태는 직접 보는 편이 빠르다’는 말이 서서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마치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사람의 정신을 아예 바꿔놓는 마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아리에의 원래 성격일 수도 있다. 그 동안 몸이 약한 탓에 표출되지 못한 것뿐이었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루스카는 넓은 도량으로 건방진 여동생을 용서해주기로 했다. 적당한 말을 하고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던 루스카의 시도는 시작도 전에 무위로 돌아갔다.
“공자님. 그 분은?”
루스카의 친구들로 보이는 젊은 귀족들 몇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공녀는 얼굴 위에 가식적인 미소를 그려냈다. 드레스 자락을 살포시 잡아 올린 공녀는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리에 제즈릭이라고 합니다. 오라버니의 친우 분들이신가요?”
공녀의 질문에 제일 앞에 있던 금발의 여성이 말을 받았다.
“네. 맞아요. 소문의 공녀님? 만나서 반가워요. 엘마이어 백작가의 에이들린이라고 해요.”
공녀가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하자 에이들린은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에는 귀족들에 대한 지식이 적었지만, 테르한은 양성소에서 수업으로 들은 것이 제법 되었다.
그래서 눈앞의 십대 후반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이 제즈릭 공작령 옆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엘마이어 백작가의 영애임을 알았다.
‘엘마이어 백작가라. 공작의 사업 파트너이기도 하지.’
엘마이어 백작령에서 채취한 희귀한 마석들을 공작가에서 중개무역을 하며 막대한 부를 쌓고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아리에는 들은 적 없었지만 아마 루스카와 에이들린은 밀접한 관계일 가능성이 컸다.
그녀의 뒤쪽을 슬쩍 보니 남자 둘과 여자 셋이 더 있었다. 그중 남녀 두 쌍은 연인처럼 팔짱을 하고 있었고, 조금 떨어져서 고개를 살짝 숙인 여성이 보였다. 검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미인이었는데, 루스카를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갈 것 같은 느낌에 공녀는 미소를 지었다.
가족을 만난 탓인지 지금 공녀는 제즈릭 공작가에 악감정이 있는 아리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분열이 나지막이 말했다.
-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우습겠지만, 가족과 잘 지낼생각은 없나?
- 지금 저 귀찮은 ‘오라버니’를 안 떼어놓으면 앞으로 더 힘들어져. 공작가에서 우리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딴죽을 걸고넘어질 수도 있어. 아예 나에게 신경을 끄게 만들어야지.
- 방법은 있나?
- 해봐야지.
공녀가 자신을 향해 방긋 웃자 검은 머리의 여인, 셀리아 드바리아 백작영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말없이 미소를 띤 공녀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본 에이들린의 표정이 어그러졌다.
몇 년 전부터 루스카에게 달라붙은 도둑고양이는 제 주제를 몰랐다. 루스카 때문에 참고 있었지만 언젠가 꼬투리를 잡아 자신들의 무리에서 추방할 생각이었다.
그때 공녀가 움직였다. 셀리아의 앞에 선 공녀는 대뜸 어린아이 같은 말투로 말을 했다.
“언니. 저희 오라버니 좋아하세요?”
얼굴이 빨개진 셀리아는 더 이상 숙이기도 힘든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공녀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라버니를 별로 안 좋아하시나보네요.”
계속되는 공녀의 말을감당하기에는 셀리아가 조금 소심했다. 그대로 도망치고 싶었으나, 루스카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서 무언가를 느낀 셀리아는 큰 용기를 냈다.
“아니에요. 좋, 좋아해요.”
공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셀리아의 양 손을 잡고 위 아래로 흔들었다.
“저는 언니가 새언니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공녀는 말을 하는 동시에 슬쩍 고개를 돌려 루스카와 에이들린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당황해서 입만 뻐끔거리는 에이들린과 무슨 짓이냐는 듯 인상을 쓴 루스카를 뒤로 한 채 공녀는 다시 셀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셀리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당황한 공녀는 잡았던 손을 놓았다.
- 이번엔 그대가 좀 너무했네.
- 어, 그런 것 같다. 내 안의 아리에가 지나치게 폭주했어.
- 변명은.
어찌할 바를 모르던 공녀는 반대로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셀리아 때문에 비명을지를 뻔했다.
“고마워요, 공녀님. 저, 용기를 내볼게요.”
“네?”
셀리아는 굳은 결심을 한 눈으로 에이들린과 루스카를 향해 걸어갔다.
“루스카 제즈릭 공자님.”
“네, 셀리아 영애.”
루스카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의외로 거절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공녀는 그제야 자신의 계획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원래라면 셀리아가 자리를 피하거나 에이들린 또는 루스카가 끼어들고, 자신은 적당히빠져서 관망하다가 정치적인 관계 때문이라도 에이들린을 감쌀 루스카에게 앞으로 자신에게 신경 쓰지 말아달라고 하는 대신 에이들린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셀리아를 이용하는 꼴이었지만 할일도 많은데 가족이나 청년들의 사랑 놀음에 시간을 빼앗길 여유는 없었다. 게다가 가망성이 별로 없어보였으니 일치감치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공녀가 생각에 빠진 틈에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루스카와 셀리아가 자리를 비웠다.
남겨진 에이들린은 공녀를 째려보더니 서둘러 그들을 따라 나갔다.
루스카의 친구들은 공녀에게 제법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뒤 구경하러 따라갔다. 그들도 은근히 셀리아를 응원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루스카 일행이 사라지자 그제야 멀리서 이쪽을 주시하던 양성소 일행이 다가왔다. 카르나타가 힘차게 말했다.
“공녀님, 대단합니다! 그 공자님을 말로 압도해버리시는 모습! 역시 마력각성자이셔서 그런 걸까요?”
“마력각성자가 된다고 말싸움 잘 하는 건 아니에요.”
그의 옆에 있던 또래의 여자아이 생도가 주먹 쥔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눈을 빛냈다.
“제즈릭 공자님의 복잡하다는 여자관계를 바로 정리해버리다니. 역시 마력각성자라서 그런 거예요?”
“양성소에서는 마력각성자를 도대체 뭐라고 가르치는 건가요?”
공녀의 불평에 나이를 제법 먹은 생도가 껄껄 웃었다.
“또래인 공녀님이 말로 어른들을 좌지우지하니 신기해서 그런 겁니다. 솔직히 저도 좀 놀랐어요. 혹시 마력…….”
“아니요.”
“아, 네.”
생도의 농담을 칼같이 쳐낸 공녀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계획과는 어긋났지만 다음 일은 다음번에 생각해야한다. 일단 루스카를 떨쳐냈으니 오늘은 더 이상 엮일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시간이 지나서 점심 무렵이 되었다.
루스카와 일행은 어느새 돌아와 있었는데 에이들린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셀리아가 거의 폭발 직전까지 빨개진 얼굴로 루스카의 옆에 서있었다.
- 오, 작전 실패.
- 조용히 해.
분열과 티격태격하는 사이 팡파르가 울렸다.
용사 일행의 입장을 알리는 외침이 울려 퍼졌고,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중앙을 비우고 가장자리로 비켜섰다.
용사 일행이 입장했다.
선두에 선 아펠은 전설에 나오는 빛의 기사를 형상화한 은빛 갑옷과 얼굴을 다 드러낸 투구를 쓰고 있었다.
물론 이번 행사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으며, 아펠은 지난 1년간 저런 갑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마왕과 장군들을 쳐부술 때 아펠이 입었던 방어구는 테르한이 사다준 튼튼한 어린이용 가죽 갑옷 한 벌이 전부였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감탄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공녀도 조금 착잡한 심정으로 박수를 쳤다. 곧이어 셰일로아와 하빈, 엘레나가 입장했고 문이 닫혔다.
테르한은 저 자리에 자신이 없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용사 일행이 홀의 중앙에 서자 황제 일가가 입장했다. 이미 승리 선언과 포상은 저번에 끝났으므로 황제는 간단한 인사만 하고 축제를 즐기라고 한 뒤 사라졌다. 황제는 평소에도 축제나 연회에서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황태자와 황자는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인사를 받아내며 정신이 없어보였고, 황후 역시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여있었다. 그들에게 인사를 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공녀는 용사일행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용사일행들 또한 황가일원들과 비슷할 정도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들 가까이에 루스카가 있었기에 공녀는 아펠에게 나중에 찾아가기로 했다.
공녀는 하는 수 없이 양성소 일행들과 함께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먹는 데에 주력했다.
한참이 지나고 모든 테이블을 제패한 공녀와 일행은 제법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황자가 다가오자 모두들 질서정연하게 정렬했다.
공녀는 저도 모르게 일행의 선임이 위치하는 자리에 섰는데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수고 많으셨어요, 황자전하.”
황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공녀와 열을 이룬 양성소 일행을 둘러보았다.
“오, 리에. 벌써 제식 훈련을 받은 모양이네. 혹시 양성소에 들어가기로 한 거야?”
“아니에요. 그냥 서있었는데 다른 분들이…….”
공녀의 변명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공녀는 일행의 수에 맞춰 3열종대로 설 수 있게 양 손으로 생도 두 명을 붙들고 위치를 정해준 다음 자신이 중앙에 섰고 모두들 홀린 듯이 그 뒤에 섰다.
- 그대는 꼭 티를 못 내서 안달이군.
- 몇 년을 해왔는데 버릇이 어디 가겠냐.
“그런데, 루스카 공자하고는 만났어?”
“네. 그냥 몇 마디하고 말았어요.”
공녀의 말에 황자가 웃었다.
“공자의 말과는 조금 다르네. 된통 혼났다던데. 동생한테 뭘 가르친 거냐고 내 탓으로 돌리더라고.”
“아, 그 인간, 아니, 오라버니가 진짜…….”
역시 제즈릭 공작가와는 맞지 않았다. 이를 가는 공녀에게 황자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공자가 자기랑은 이제 말도 안 해줄 것 같다고 하면서 말 좀 전해달래.”
“무슨 말이요?”
또 유치한 놀림 같은 건가하고 생각하던 공녀의 귀에 뜻밖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고맙대.”
“네?”
“자신의 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하더라고.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황자를 전령으로 쓰는 건 너네 남매뿐일 거다.”
그 말을 하면서 황자는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잘 모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공녀가 루스카 일행이 있는 쪽을 쳐다보자 마침 이쪽을 보던 셀리아가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제 그녀는 루스카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공녀도 셀리아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루스카는 곁눈질로 그 모습을 보더니 헛기침을 하고 돌아섰다.
공녀는 숨을 돌렸다.
일이 이래저래 잘 풀린 모양새였지만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냥 넘어가야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아리에.”
“네.”
연회장에서는 어느새 은은한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황자는 공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우와…….”
황자가 설마 이런 말을 할지는 몰랐기에 공녀는 식겁한 표정으로 살짝 뒤로 물러났다. 황자는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싫어할 건 없잖아?”
“아, 죄송해요. 황자님이 어린 아이를 좋아하는 분인 줄도 모르고…….”
공녀의 말에 황자가 드물게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내 나이대의 영애와 춤을 추면 여러 모로 곤란한 일들이 있어서 그래.”
“그럼 황후마마께…….”
말을 하던 공녀의 눈에 황후가 황태자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공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이에요.”
황자는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다음번에도 부탁할게.”
“안돼요.”
“그러지 말고…….”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공녀와 황자는 홀의 중앙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