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제 4 장. 그곳에 그대로 있기를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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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 좋게 홀의 중앙으로 나온 것은 좋았으나, 큰 문제가 있었다.
공녀는 지금까지 춤을 배워본 적도, 심지어 제대로 구경했던 적도 없었다.
그들은다시 홀의 외곽으로 돌아가 천천히 회전하며 급하게 스텝 연습을 했다.
“이, 이렇게?”
공녀가 벌써 다섯 번이나 스텝을 틀리자 황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공녀에게 귓속말을 했다.
“발을 내 발 위에 살짝 얹어. 힐 같은 거 안 신었지?”
“그냥 납작한 구두에요. 바닥은 딱딱하지만”
“음. 조금 아플 거 같네.”
황자의 말에 공녀는 잠시 고민했다.
- 다른 사람에게 마력보호막을 씌워줄 수 있을까?
- 안될 것 없지. 보호막 마법도 타인에게도 걸 수 있으니.
공녀는 마력을 발쪽으로 보내 두껍게 씌웠다.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바람의 속성을 부여한 공녀는 황자의 발등을 노려보았다.
“리에, 뭐해?”
아까부터 뱅글뱅글 돌기만 하던 그들이었기에 공녀는 살짝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눈이 핑핑 도는 와중에 황자의 발등에 물 속성을 띤 마력보호막을 씌우는데 성공한 공녀는 거리낌 없이 황자의 발등을 밟고 올라섰다.
황자는 마력의 움직임을 포착한 뒤 잠자코 있었고, 자신의 발쪽에 마력의 막이 씌워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공녀의 단화가 자신의 발등을 꾹 누르는데도 무게를 제외하면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는 것에 놀랐다.
공녀가 황자의 발등을 밟고 올라선 것은 그녀의 드레스자락이 살짝 가려주었다. 황자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뱅글뱅글 돌기만 하던 스텝에 변화를 주었다.
가장자리에서 한동안 돌기만 하던 황자와 공녀는 음악이 바뀌는 때에 맞춰 홀의 중앙으로 나왔다.
제법 빠른 왈츠의 박자에 맞춰 발을 바삐 놀리는 황자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마력을 다리에 집중한 공녀는 겉보기에는 제법 그럴듯하게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공녀는 다리를 살짝 굽힌 채 어정쩡한 자세로 황자의 발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느린 곡이었으면 괜찮았겠지만 지금 흘러나오는 곡은 마침 요즘 유행하는 빠른 왈츠였다. 공녀는 마력을 일정 범위 안에서 유지하는 게 한계였다.
황자의 리드는 능숙했지만 팔 길이의 차이가 큰 것이 문제가 되었다.
공녀가 그의 발 위에 올라가있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녀는 거의 황자에게 매달려있는 꼴이 되었다.
공녀는 뒤늦게 이를 깨닫고 황자의 발에서 내려와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그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음악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곧 트릴이 10초 이상 길게 이어지는 구간.
황자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공녀의 등을 받치고 있던 손을 살며시 놓았다.
“리에.”
“네?”
“돌아!”
“!!”
황자가 놓은 손으로 공녀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황자의 발에서 내려온 공녀는 황자의 한쪽 손을 잡은 채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제자리에서 돌기 시작했다. 황자는 나머지 손도 놓았다.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트릴의 박자에 맞춰 발을 가상의 좁은 원 안에서 교차시키며 공녀는 제자리에서 돌았다.
공녀의 발에 담겨있던 바람의 마력이 점점 가속하여 미풍으로 이루어진 돌개바람을 만들어냈다. 공녀의 긴 드레스자락이 거의 무릎까지 올라오며 펼쳐졌다. 주변 사람들은 일찌감치 물러나 공녀의 회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 으아아아……. 어지러울 때는 어떻게 해?
- 땅의마력을 머리로 보내라.
정신없는 와중에 땅의 마력으로 반고리관을 안정시킨 공녀는 트릴이 끝날 때까지 계속 돌았다. 피아노를 치던 악사마저 피아노 너머로 공녀의 회전을 구경하다가 끝낼 타이밍을 놓치기도 했다.
20초 동안 홀의 중앙에서 돌던 공녀는 트릴이 끝나는 동시에 휘청거리다 황자에게 손을 잡혔다.
그리고 짧게 이어지던 곡은 곧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황자는 공녀의 등을 받치고 있던 손을 허리 쪽으로 내리고 앞으로 당겨 공녀의 상체를 뒤로젖혔다. 그와 동시에 음악이 끝났다.
잠시 조용하던 홀에 박수소리가 메아리쳤다.
공녀는 몰랐지만 황자가 춤을 추는 것은 몇 년 만의 일이어서 다들 춤추는 것은뒷전으로 미루고 황자와 공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탓에 어느 순간부터 홀 중앙에는 공녀와 황자만이 춤을 추고 있었으니 누구에게 쏟아지는 박수인지는 자명했다.
공녀는 수치심도 부끄러움도 아닌 이유모를 감정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수고했어.”
공녀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입으로 미소를 그려냈다.
“이 일은, 빚으로 생각해도 되죠?”
“그래. 그러지 뭐. 레스토랑 한 번 더 데리고 가줘?”
“나중에 말할게요.”
공녀와 황자가 돌아오자 양성소 멤버들은 호들갑을 떨며 그들을 맞이했다. 특히 카르나타와 그의 동기인 여생도는 공녀에게 사인까지 부탁할 기세였다.
“역시 마력각성자…….”
또다시 시작된 마력각성자 타령에 공녀는 소리를 꽥 질렀다.
“아니라고! 어? 맞나?”
발에 마력을 싣고 황자와 호흡을 맞추기도 했고 마지막 스핀은 땅의 마력을머리에 두르지 않았다면 도중에 쓰러졌을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공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큼은맞네요. 마력각성자라서 처음 추는 춤도 그럭저럭 출 수 있었어요.”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춤을 처음 추시는 거라고요?”
“공녀님.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그러면 황자님과 발은 어떻게 맞추신 거예요? 설마 안 보고도 상대의 발을 따라가는 경지?”
공녀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인정했다. 그냥 조금 춰봤다고 할 걸 그랬다. 황자의 발을 밟고 올라갔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적당한 변명거리를 생각해내야 했다.
턱
갑자기 어깨에 올려진 손에 공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공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 황자가 웃으며 좌중을 달랬다.
“자, 모두들 공녀의 말을 오해하고 있으니 한 마디 하겠소. 공녀가 처음 춘다고 한 것은 이런 장소에서 남에게 보여주는 춤은 처음 춘다고 한 것이지. 그렇지 않소, 아리에 양?”
공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는 내가 이끄는 프로젝트의 중요 인물이오. 그대들 기사단 양성소에 들러서 속성오러를 가르쳐준 것도 프로젝트의 일환이지. 그런데 공녀는 다들 알다시피 몸이 약해서 제대로 춤을 배운 적이 없었소.”
황자는 공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뭐가 그리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공녀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상대’인 나에게 댄스 레슨을 부탁해서 간신히 발만 맞춘 것이오.”
그제야 양성소 일행은 조금 납득한 모습을 보였다.
공녀는 자신이 마력을 써가며 간신히 해낸 일을 자기의 몫으로 돌리는 황자에게 잠깐 화가 났지만 그 외에는 변명거리가 딱히 없어 잠자코 있었다.
공녀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고개를 갸우뚱한 황자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마지막의 멋진 스핀은 공녀 스스로 해낸 것이지. 아마 그 부분에 마력을 이용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싶소.”
황자가 마치 설명을 하라는 듯 등을 툭 떠밀었다. 공녀는 목을 가다듬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 마력을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분이 계신가요?”
양성소에서는 공녀가 다녀간 이후 이틀간마력 수행 붐이 일었고 상당수의 생도가 마력을 직접 느끼고 움직일 수 있었다.
애초에 마법을 쓰면 자동으로 마력이 움직이는데 그 느낌을 알고 있는 이라면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중에 카르나타는 마법은 영 젬병이지만 어린 나이에 벌써 오러를 발현할 정도로 마력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공녀 역시 그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카르나타를 앞으로 초청했다.
“회전을 할 때 머리 쪽에 땅의 속성을 띤 마력을 집중하면 균형을 쉽게 잃지 않고 어지럼증도 줄어들어요. 자, 머리로 마력을 보내고…….”
카르나타는 심호흡을 하며 집중했다.
검으로 마력을 보내는 것은 숨 쉬듯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팔이나 손이 아닌 신체의 다른 부위로 마력을 움직이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간신히 머리로 마력을 끌어올린 카르나타는 마력을 땅의 속성으로 바꾸었다.
머리가 묵직하고 단단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방법은 오히려 박치기에 쓸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며 카르나타는 제자리에서 돌기 시작했다.
한동안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던 카르나타가 멈췄다.
보통 제자리돌기는 도는 도중보다 멈춘 뒤가 더 어지럽다. 하지만 카르나타는 급하게 멈췄음에도 비틀거리거나 어지럼을 호소하지 않았다.
너무나 멀쩡한 자신에게 놀란 카르나타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굉장합니다! 전혀 어지럽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감탄의 소리가 들려왔다. 무사히 기술(?)의 전수를 마친 공녀는 자기들끼리 토론을 시작한 양성소 일행을 놔두고 한숨을 돌렸다.
“리에는 양성소 교관도 해야 할 거 같은데?”
“안 해요.”
지금 당장 할 일도 많은데 더 이상 시간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공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편하게 갈아입은 아펠이 이쪽을 알아보고 저 멀리서 오고 있었다.
중간 중간 사람들이 말을 걸면 허리를 숙여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간신히 공녀와 황자가 있는 자리로 온 아펠은 상당히 힘들어보였다.
“어서와, 아펠.”
황자가 인사를 건네자 아펠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공녀는 그녀가 안쓰러워서 손을 꼭 잡아주었다.
“수고 많았어요, 용사님.”
“다녀왔습니다.”
공녀는 아펠의 손을 붙잡은 두 손에 치유의 마력을 머물게 한 뒤 아펠에게 조금씩흘려 넣었다. 아펠은 마력의 움직임을 감지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치유의 마력을 받아들인 아펠은 그것을 몸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펠은 신세대 마법사인 셰일로아에게 마법을 전수받아서 그런지 마력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한층 편해진 아펠은 얼굴을 익힌 양성소 멤버들과 인사하며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엘레나는 일치감치 연회장을빠져나와 황궁 근처에 있는 신전을 찾았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항상 찾는 곳이었다.
거대한 신들의 조각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자니 신전의 대사제가 다가왔다.
엘레나는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대사제에게 허리를 숙였다.
“엘레나 평사제님. 오랜만이군요.”
“예, 콘실로 대사제님. 1년만입니다.”
백발이 성성한 대사제는 길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었다. 겉으로 보면 힘없는 노인 같았지만 움푹 들어간 그의 두 눈은 여느 젊은이들 못지않게 빛나고 있었다.
“무얼 그리 고민하고 있습니까?”
엘레나가 이곳을 찾을 때는 항상 고민거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대사제는 엘레나를 은근히 떠보았다. 그녀의 상담을 주로 해주던 사제는 마침 자리에 없었다.
엘레나는 잠시 주저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사제님. 저는 지난 1년간을 용사의 일행으로 보내왔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엘레나는 입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신들께서는 마왕이나 마족, 성검에 대한 어떠한 말씀도없는 것일까요?”
대사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엘레나가 말하는 것은 금기까진 아니었지만 성직자들이 항상 쉬쉬하던 문제였다.
성직자들은 신들에게 신탁을 받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정작 인류의 제일 큰 문제인 마왕과 마족에 대해서는 그 어떤 신도 신탁을 내리지 않았다.
오직 마신의 영혼이 스무 갈래로 갈라져 마왕이 되었다는 설명문 같은 신탁뿐.
그 문제는 성검이 등장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성검에 대해서 그 어떠한 신도 자신이 내려주었다는 신탁이 내려오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성검의 정체에 대해 물어본 성직자들도 많았지만 모든 신들은 침묵했다.
성검에 담겨있는 성스러운 힘은 진짜였으나, 어떠한 신의 것인지는 꾸준히 논란이 있었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정체불명의 성검을 묵인하며 마왕을 잡는 도구로만 여기기로 했다.
“엘레나 평사제님이 직접 봤을 때는 어떻던가요? 그 성검.”
엘레나는 주저 없이 말했다.
“성검에 담긴 힘은 진짜입니다. 정체는 불명하지만 그것에 담겨있는 신의 힘은 우리가 쓰는 신성력과 동일합니다.”
대사제는 빙긋 웃었다. 백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할 정도로 감이 뛰어난 엘레나와 성검을 접촉시키기 위해 그녀를 파견하도록 강력하게 추천한 보람이 있었다.
성검은 어찌되었든 신의 힘이 담겨있는 신성한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걱정이란 말입니까.”
“하지만…….”
대사제가 검지를 자신의 입에 가져다댔다. 엘레나는 그 제스처의 의미를 알아듣고 침묵했다.
“성검은 마왕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저 그곳에 그대로 있으면 되는 물건이지.”
엘레나는 수긍하듯 고개를숙였다. 하지만 대사제가 떠난 뒤에도 그녀의 마음에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엘레나는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신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