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화 〉제 5 장. 전조 - 1 (26/82)



〈 26화 〉제 5 장. 전조 - 1

26 -

개선행사가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아펠은 여전히 공녀의 귀빈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 달 뒤에 있을 납도식을 마치면 용사의 직함을 떼게 되는데,  이후의 계획은 따로없다고 한다.

공녀는 아펠이 홀어머니 밑에서 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고향의 집을 처분하고 용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구태여 고향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얏!”

따악

목검이 교차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공녀와 아펠은 귀빈관의 공터에서 대련을 하고 있었다.공녀가 검술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 아펠도 참여하기 시작해 간단한 대련을 하게 된 것이었다.

공녀는 실력을 숨기고 초보자인 척 하느라 아펠의 공격을 반쯤 맞아주고 나머지 반은 피하거나 막았다.  사람의 목검에는타격을 거의 제로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마법이 걸려있어서 거침없는 공방이 오고갔다.
황자가 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해 구해준 물건이었다.

“좀 쉴까?”

“응.”

둘은 얼마 전부터 말을 놓았다. 낯을 많이 가리는 아펠이 공녀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친밀감을 느꼈기 때문에 둘은 금방 친해졌다.

아펠과 공녀는 공터 한쪽에 마련되어있는 쉼터로 향했다.
천막으로 된 지붕 아래에 의자를 가져다놓은 쉼터는 공녀가 손수 설계하고 주로 시밀레가 만든 장소였다.

공녀는 의자에 앉아서 마력을 물의 기운으로 바꾼 뒤 체내에서 순환시켜 땀을 비롯한 노폐물을 끌어 모아 외부로 날려버렸다.
물속성 마법 ‘클린’과 똑같은 원리였지만 클린 마법과 달리 원하는 부위, 특히 체내의 노폐물까지 제거가 가능했다.
물론 마력의 소모는 클린 마법의 몇 배에 달했지만, 공녀는 마력각성자라 마력을 펑펑 쓰는 게 가능해서 자주 사용하곤 했다.

아펠에게도 방법을 가르쳐주었지만, 마력 양이 제법 많은 아펠도 공녀처럼 마구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펠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아펠이 사용한 수건은 공녀가 마력으로 깨끗하게 만들어두었다.

공녀는 며칠 동안 꾸준히 움직였다. 이제 기초체력이 많이 다져져서 마력을 두르지 않아도 비슷한 나이의 여자아이 수준은 되었다.
겨우 며칠 만에 이정도로 회복된 것은 공녀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사이 묵묵히 마력으로 온몸의 근육을 자극시킨 분열의 공이 컸다.

이제야 겨우 출발선에 선 것이다.

공녀는 팔을 접어 알통을 만들어 만져보았지만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살집만 잡혔다.
한숨을 내쉰 공녀는 언제쯤 수첩에 적는  상태를 5 이상으로 올릴 수 있을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잠시 쉬고 있으려니 시밀레가 물주전자를 들고 왔다. 둘에게 물을 따라준 시밀레가 말했다.

“공녀님. 연구소에 가실 시간입니다.”

“어, 벌써?”

공녀는 물을 벌컥벌컥 마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펠은 웃으며 그녀를 배웅했고, 방에서 옷을 갈아입은 공녀는 체력단련도 할 겸 황궁 입구를 향해 달렸다.

드레스를 입고 뛴다면 주변의 눈총을 샀을 테지만, 간편한 셔츠와 바지를 입은 지금은 거리낄 게 없었다.
물론 그건 공녀만의 생각이었고, 주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쏠렸다.
하늘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10살짜리 여자아이가 황궁 내를 전력 질주하는 모습은 흔히 볼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귀빈관과 황궁 입구는 꽤 가까워서 공녀의 심박이 본격적으로 빨라지기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녀는 이제 제법 안면을 익힌 경비병들에게 인사하고 자신 전용으로 마련된외출일지를 찾아 삐뚤빼뚤하게 글씨를 썼다. 테르한도 아리에도 글씨를  쓰는 편은 아니었다.

공녀는 플라잉 보드 보관소에서 자신의 애마를 꺼냈다. 최신식의 은색 보드는 기사의 무구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견고함과 예술성을 자랑했다.
공녀는 왠지 모를 뿌듯함에 콧김을 세게 내뿜으며 보드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우웅

보드가 진동음을 내자 공녀는 그것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보드는 땅에 스칠 정도로 내려가더니 곧 지면에서 20cm 가량 높이까지 떠올랐다.
보드의 바닥에서 손잡이를 빼 잡기 편한 높이까지 올린 공녀는 기세좋게 출발했다.

처음 보드를 붙잡고 낑낑대다가 결국 보관소의 경비병이 이것저것 알려주었던 것이 바로 요전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빠른 적응력이었다.
이제 스스로 보드를 가동시킬  아는 공녀의 모습에 경비병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보드는 마력의 주입량에 따라 속도의 조절이 가능했는데, 공녀는 아직 초보자라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괜히 사고를 낼 필요는 없으니 천천히 운전하며 길을 익히고 있었다.
다행히 제도 내에서는 보드에 탑재된 지도를 통해 현재 위치를 볼 수 있었다.

무사히 마도공학소에 도착한 공녀는 입구 한쪽에 있는 보관소에 보드를 맡기고 마도공학소에 들어갔다.
곧장 클레어의 연구실로 간 공녀는 확대경으로 마석을 들여다보고 있는 클레어를 보았다.

“…….”

저 상태면 길게는 10분 정도는 꼼짝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공녀는 적당한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법 넓은 방에는 알  없는 기계가 가득한 책상 여러 개, 정체불명의 시약들이 담겨있는 플라스크들, 장식용이라기에는 철저하게 분류되어있는 각종 마석들의 진열장까지 소녀다움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장소였다.
남자인 테르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소녀다움 운운하는 것이 조금은 우스웠다.

자조적인 쓴웃음을 짓던 공녀는 바로 앞에 있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오늘자 신문을 발견했다.
생각해보니 신문을 안 본지도 한참이 되었다. 양성소 시절에는 제국 동향파악이라며 강제로 읽었던 것인데, 나름 취미가 되어 용병시절까지 꾸준히 읽었었다.

‘오랜만에 신문이나 읽어볼까.’

공녀는 내친김에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냈다. 새콤한 오렌지주스를 클레어의 허락 없이 꺼내든 공녀는 컵을 찾다가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비커를 씻은 뒤 주스를 따라 마셨다.
역시 신문은 무언가를 마시면서 봐야 제 맛이었다.
공녀는 신문을 펼쳐들었다.

[제 1 면]

「마탑, 긴급 재정 긴축에 항의」

1면에는 커다란 마탑을 원거리에서 찍은 풍경이 보였다. 사진 밑에 화살표가 없는 것을 보아 움직이는 사진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황자가 마법사들을 못살게 군다는 얘기가 있었지.“

아마 파멸에게는 마법이 안 통하니 일치감치 마탑에 들어가는 예산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일게 분명했다. 예를 들면 지금 공녀가 있는이곳도 그 수혜를 받은 곳일 가능성이 컸다.

- 그렇다고 마법사가 필요 없지는 않을 텐데.

- 동감이다. 마법사들 중에서 필시 마력을 잘 다루는 자들이 있겠지. 아, 나와 싸웠던 그 마법사도 마법을 쓰는 틈틈이 마력을 직접 움직이더군.

- 셰일로아? 걔는 원래 그랬어. 자칭 신세대 마법사라고 하면서 마법보다는 다른 재주를 부리는 걸 좋아했지.

그녀에게 마법과 마력을 다루는 법을 익힌 아펠 역시 마력을 제법 능숙하게 다룬다.
아펠은 마왕을  번 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공녀-테르한이었지만 그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아펠보다 강하고 젊은 인재가 많다면 모를까, 지금은 손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공녀는 페이지를 넘겼다.

[제 2 면]

「‘춤꾼공녀님’ 화제. 연일계속되는 사진 첨부 요청에 따라…….」

“푸웁!!“

공녀는 마시던 주스를 바닥에 뿜었다.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던 공녀는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채고 다가온 클레어가 등을 두드려주어 간신히 안정을 되찾았다.

“이게 뭐야…….”

2면에 당당히 박혀있는커다란 사진은 분명히 자신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황자가 공녀에게 돌라고 하며 떠미는 장면이었다. 심지어 사진 밑에 화살표가 붙어있었다.

“아. 공녀님. 그거. 멋져.”

클레어가 신문을 보더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뭐가요!?”

공녀는 얼굴이 빨개진  신문을 뒤로 숨겼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태연하게 뒤쪽에서 새로운 신문을 꺼내들었다. 2면을 펼친 클레어는 사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사진 속의 공녀가 잠시 멈칫하더니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현재의 공녀는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지나친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에 머리가 어지러워진 공녀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클레어가 급하게 냉장고에서 간식을 꺼내 공녀를 달래준 뒤 겨우 오늘의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마석은 물의 마력이…… 속도 약 30% 감소. 그만큼 안정화 되는 느낌.”

클레어는 공녀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벌써 세 번째 연구라 그런지 손발이 잘 맞았다.

“예전의 푸르스름한 마석. 물의 마력. 끈적끈적해지는? 그 마석을 개조한 거야.”

“아,  마석의 파생형인가보네요.”

“응. 결정구조를 육각형 모양에서 다이아몬드 형으로 바꾸고 두 층마다 기존의 육각형 구조를 끼워 넣어 안정성을 추구했어.”

여전히 설명하고픈 것이 있으면 말이 빨라지는 클레어였다. 공녀는 그녀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으나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었다.

“지금 제가 느끼는 마력의 변화에 대한 실험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공녀는 그것까지 자신이 실험하고싶었지만 상당히  시간을 요구하는 과정이어서 3일에 한 번씩 들르는 공녀가 매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응. 마법보단 마력을 움직이는 마법사 섭외했어. 모든 속성에 민감한 사람.”

“그 분은 지금 어디 계세요?”

“좀 있다가 와.”

공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마도공학소와 마탑의 마법사들은 뗄 레야 뗄 수 없는관계였지만 아까 신문에서 봤듯 마탑에 대한 황실의 지원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마법사와 괜한 마찰이 생길지도 모른다.
공녀는 새로 고용되었다는 마법사를 보고 가기로 결심했다.

“클레어. 마법사님 왔다.”

마침 알레온이 새로 왔다는 마법사를 데리고 왔다. 알레온은 공녀에게 목례했고, 공녀도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그러나 마법사는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님?”

공녀가 의문을 표하자 문 옆에서 조그마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아, 아아, 안녕하십니깟!”

알레온의 키의 반이나 될까 말까한 소녀가 긴장한 모습으로 공녀와 클레어에게 허리를 숙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소녀라기에는 얼굴이 성숙해보였다.

- 언덕의 작은 마족?
- 하플링?

테르한이 아닌 아리에로써 처음 접하는 ‘마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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