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제 5 장. 전조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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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는 눈앞의 작은 사람이 마족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테르한이 봐왔던 마족들은 맹목적인 적의를 갖고 있었고 혼이 나간 것 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마법사라고 소개받은 여인은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연구소 안에 소녀 두 명이 앉아있는 것을 본 하플링 마법사는 긴장이 풀렸는지 한층 여유로워진 말투로 자기소개를 했다.
“하플링은 처음 보시죠? 하플링 마을에서 온 다루라고 합니다.”
“하플링이라 하시면…….”
약 1000년 전에 마왕 ‘복수’에 의해 멸망한, 조그마한 왕국을 이루고 살던 종족이었다.
“과거에는 슈펜하겐이라는 나라에서 모여 살았지만, 왕자가 마왕으로 변해서 왕국은 무너졌고, 왕국을 빠져나온 이들은 제국까지 와서 터를 잡았죠. 지금은 터를 잡은 곳 주변에 조그마한 마을이나 부락을 이루고 살고 있답니다.”
결국 다루는 마족이 아니었다. 공녀는 안도 반 실망 반의 묘한 감정을 느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루의 설명이 이해가 갔다.
당장 양성소의 마테스만 해도 멸망한 사막국가의 생존자들이 만든 공국 출신이었다.
대륙은 넓고 땅도 광활하니 자신이 모르는 국가나 종족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공녀는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다면 왕국에 남아있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다루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지금 ‘언덕의 작은 마족’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저희가 몇 번이나 사절을 보내봤지만 그들은 지나치게 호전적이고, 이제는 언어도 달라져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아예 다른 종족처럼 변했습니다.”
공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으로 변해버린 동족의 이야기는 분열의 감정을 자극했고, 공녀는 그 느낌을 조금이나마 전달받았다.
“저희 마을에서 배운 마법은 구식이라 현대식 마법을 배우려고 제도로 상경했는데, 마족취급을 받고 쫓겨날 뻔한 걸 소장님께서 신분 보장을 해주셨습니다. 그 답례로 클레어 연구원님과 공녀님의 연구를 도와드리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지낼 예정이니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다루처럼 유순하고 무해해 보이는 인상의 사람도 차별과 핍박을 받을 정도면, 그녀처럼 흔히 ‘마족’이라고 알려진 종족 중 도망쳐 나온 생존자들의 후예들은 대부분 상당한 차별을 받고 있을 것이다.
공녀는 황자에게 그들의 대우 및 인식 개선을 제시하기로 했다.
다루처럼 파멸을 막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재들을 놓치는 꼴은 볼 수 없었다.
공녀가 깊은 생각에 빠지자 클레어가 다루에게 마석을 내밀었다.
“마법사님. 이거. 실험 부탁.”
“네! 바로 실험이군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루는 심호흡을 하며 마석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구식 마법’이라고 칭한 마법을 분석하기 위해 공녀는 마력의 감각을 한층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여러 가지 속성을 띤 마력이 마석을 통과했다. 공녀가 깜짝 놀랄 새도 없이 다루가 마석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일단 속성마력에 직접 반응하는종류는 아닌 거 같네요. 혹시 마석의 속성을 특정 지을 수 있을까요? 여러 속성을 한꺼번에 적용시키는 것보다 결론을 빨리 도출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잠깐만요. 마법사님.”
“네, 공녀님.”
다루가 방금 쓴 마법은 분열조차 ‘기억에 없다’고 한다.
거의 모든 마법을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분열이 모르는 마법이라면 마법이라기 보단 마력을 다루는 기술에 가까울 것이다.
공녀는 마력을 각성했지만 여러 속성의 마법을 저런 식으로 마찰 없이 섞어서 쓰지는 못한다.
속성을 섞는 시도는 여러 번 해봤지만 저번의 불꽃회오리처럼 폭발적인 반응이 즉각적으로 일어났으면 일어났지, 방금 다루가 보여준 것처럼 아무 반응 없이 여러 속성이 섞이는 일은 없었다.
“방금 그 마법은 무엇이죠? 처음 보는 마법인데.”
다루는 공녀의 말에 잠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플링 아이들이 사이에서 유행하는, 딱히 중요하지도 않고 마법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애들 장난 같은 것이어서 그 유명한 마력각성자인 공녀가 실망할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루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애들 장난 같은 겁니다. 마법이라고 하기도 애매한데, 마력에 속성을 부여할 수 있으면 누구나 가능한 장난이죠.”
다루는 마력의 구체를 띄운 뒤 눈에 보이도록 빛의 속성을 부여했다.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마법은 크게 4대 원소와 빛의 속성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분화하면 10 종류가 넘어가긴 하지만 그 5개의 속성이 베이스죠. 그리고 4대 원소들은 서로 상극이나 조화를 이루는 속성이 있고, 빛의 속성은 모든 속성과 어울리죠.”
다루는 빛의 속성을 띤 구체에 불의 속성을 더했다. 은은한 붉은빛을 띤 구체는 미약한 열을 발산하고 있었다.
“빛의 속성을 제외하고 두 속성을 직접 부딪치는 건 위험해요. 예를 들어 불과 바람의 속성은 만나게 되면 불꽃 회오리가 일어날 수도 있죠. 하지만 빛의 속성을 베이스로 두 속성을 붙이면, 이렇게.”
다루는 불의 속성을 구체의 한쪽으로 몰아넣고 그 옆에 바람의 속성을 더했다.
붉은색과 녹색이 반반씩 들어앉은 구체는 별 다른 반응 없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공녀도 빛의 속성을 띤 마력구체를 만들어냈다. 다루와는 반대로 물과 땅이 섞인 구체를 만들어낸 공녀는 구체가 자연스레 회전하는 것을 느꼈다.
“이거 스스로 회전하네요?”
“네. 빛 속성과 다른 속성이 섞이면 정방향과 역방향이 형성됩니다.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방향이 정방향이고,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역방향이죠.”
공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력을 역방향으로 돌려보았다. 그것을 본 다루가 깜짝 놀라며 제지했다.
“앗. 공녀님! 역방향으로 돌리시면……!”
쿠과과과
공녀가 띄운 물과 땅의 구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흙이 되더니 터져버렸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진흙을 뒤집어쓴 공녀는 입에 들어간 진흙을 뱉어내며 기침을 했다.
“에퉷퉷. 켈록.켈록.”
다루가 재빨리 클린 마법으로 공녀와 주변을 깨끗하게 만들었고 클레어는 공녀를 데리고 개수대로 향했다.
입 안의 진흙을 헹궈낸 공녀는 눈꼬리에 눈물을 달고 말했다.
“역방향은 빛의 속성을 거스르는 것이군요.”
“맞습니다, 공녀님. 위험하니까 역방향은 조심하세요.”
공녀의 눈이 빛났다.
이건 죽어도 역방향을 연구해보겠다는 표시로 알아들은 클레어가 말했다.
“밖에서 해.”
공녀는 즉시 밖으로 향했다. 다루는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안 말리시나요, 연구원님?”
클레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녀는 말린다고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다루는 공녀가 무척이나 걱정되었다.
“저기, 연구원님. 죄송하지만 공녀님의 상태를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요.”
다루가 말하는 도중 이미 클레어는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루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클레어를 쫓아갔다.
마도공학소 뒤편에는 광활하다고 표현해야할 정도로 넓은 나지가 있었다.
공학소에서 만들어지는 수상한 물건들을 실험하는 장소이며 각종 잡동사니들이 나뒹구는 그곳은 언뜻 보면 쓰레기장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공녀는 바람의 마력을 이용해 적당한 표적들을 늘어놓았다.
심호흡을 한 뒤 빛의 구체를 띄우고 속성을 부여했다.
팟
총 다섯 개의 마력 구체를 띄우고 각각 4대 원소와 빛의 속성을 하나씩 부여한 뒤 견제용 초급 공격마법을 쓸 때의 감각을 살려 차례대로던져보았다.
틱 틱
표적에 부딪힌 구체들은 빈약하기 그지없는 소리를 내며 소멸했다. 표적은 조금 밀려나거나 기울어졌지만 큰 타격은 없어보였다.
공녀는 빛의 속성을 띤 구체를 하나 띄운 뒤 방금 진흙을 만들어냈던 물과 땅의 속성을 부여했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회전하는 구체를 표적에 던져보았다.
틱
여전히 힘 빠지는 소리와 함께 한 가지 속성이 깃든 구체와 별 다를 것 없는 효과가 나왔다.
공녀는 씨익 웃었다.
지금까지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마력구체에 빛의 속성을 꾹꾹 눌러 담은 공녀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물-땅 구체를 만들어냈다.
천천히 돌고 있는 구체를 조금씩 반대 방향으로 회전시킨 공녀는 불안정한 마력의 회전을 관찰했다.
아까는 금방 터져버렸지만 지금은 베이스가 되는 빛의 속성이 많아서 그런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공녀는 조금만 흐트러져도 진흙 폭탄이 될 것 같은 구체를 표적을 향해 쏘아냈다.
퍼억
표적에 부딪힌 구체가 진흙으로 변하며 표적을 반쯤 쓰러트렸다. 공녀는 주먹을 꽉 쥐고 다음 구체를 준비했다.
- 이번에는 뭘 해볼까?
- 글쎄. 나도 이런 식의 마력 운용은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한 번 상극인 속성을 섞어보는 건 어떤가?
- 알았어.
공녀는 빛의 구체에 불과 물의 속성을 담아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구체에 부여되었던 속성이 상쇄되며 빛의 구체만이 남게 되었다.
- 음. 상극인 속성끼리는 상쇄가 되는구나. 그럼 아까 마법사가 했던 다속성 구체는 어떻게 한 거지?
- 직접 물어보시게나. 저기 뒤쪽에 있군.
분열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클레어와 다루가 어느새 뒤에 서있었다. 클레어는 저번 실험 때 개발한 보호마법 위력과 및 범위가 20% 증가하는 마석을 들고 있었다.
“마법사님. 질문할 게 있는데요.”
안절부절 못하던 다루는 재빨리 대답했다.
“네! 공녀님. 아는 것이면 질문으로 다 끝낼 수 있도록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서로 상극인 속성은 어떻게 섞나요? 처음 보여주셨던 마법은 모든 원소가 섞여있었던 것 같던데.”
다루는 잠깐 생각하더니 답변했다.
“글쎄요.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아, 그냥 상극끼리 만나지 않도록 층층이 쌓으면 됩니다. 예를 들어 불-바람-물-땅 속성을 한쪽부터 차례로 부여한 뒤 불-물, 바람-땅이 서로 접촉하지 않도록…… 공녀님!!”
다루는 설명하는 도중 자신이 말하는 대로 마력의 구체를 형성해버린 공녀를 보고 소릴 꽥 질렀다. 만일 저것을 역방향으로 돌리게 되면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네?”
공녀가 무의식적으로 구체를 역회전시키며 반문했다. 그리고 구체는 아무런 소리도징조도 없이 사라졌다.
“어?”
예전에 공녀와 같은 시도를 하던, 마력을 잘 다루던 다루의친구는 체내의 마력이 모두 증발하듯 사라져 며칠을 앓아누웠다.
후유증으로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 친구를 떠올리며 공녀를 말린 것인데, 공녀는 그런 증상을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으음…….”
한편 공녀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생겨났음을 인지했다.
마법사인 다루가 알아차리기 전에 ‘저것’을 처리해야 할 텐데, 표적에 던지자니 어떤 일이 생길지 몰랐다.
공녀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그 무엇인가는 마력을 빨아들이며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체감 상 공녀가 만들어낸 구체의 열 배는 달하는 크기로 커진 것 같았다.
더 이상 지체하면 저것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것 같아 공녀는 하늘을 향해 보이지 않는 마력구체를 쏘아 올렸다.
우웅
소리가 아닌 피부로 느껴지는 진동이 일대를 울렸다.
다루는 그제야 마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짧은 지팡이를 쥐고 보호의 주문을 외웠다.
일단 공녀와 클레어에게 보호막을 씌운 다루는 지팡이를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향했다. 보호막이 있으면 마법이 오가기 힘드니 자신에게는 보호막을 씌우지 않은 것이었다.
공녀는 그 점을 눈여겨보며 시선을 공중으로 던졌다.
구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집중하고 보니 구름과 하늘이 조금씩왜곡되어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쿠르르릉 퍼엉
하늘로 쏘아진 구체는 마력이 희박해지는 공중으로 올라가자 스스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맹렬한 파공음과 함께 주변의 공기를 울리는 폭발이 발생했다.
“…….”
모두들 공녀가 일으킨 조그마한 재해에 할 말을 잃었다.
다루는 아직 자신이 배우지 못한 최고급 공격마법과 비슷한 수준의 파괴력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왜애애앵
잠시 후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마법 공습 주의보 방송을 들으며 세 명은 입을 꾹 다물고 연구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