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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화 〉제 5 장. 전조 - 4 (29/82)



〈 29화 〉제 5 장. 전조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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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은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부터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고 있었다.

초대 마왕이 세상을 파괴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진 후, 살아남은 종족들의 마법사들이 모여 세운 대륙에서 제일 오래된 마법사 집단이자 그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대륙의 마법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장소에 로브를 대충 걸친 청소년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저만큼 어린 마법사들은 애초에 마탑에 들어올 자격이 안됐고, 귀족 마법사들을 위한 시종은 저 정도 숫자가 되지 않는다.

마탑 입구의 질서와 정의를 수호하는, 흔히 ‘경비’라 불리곤 하는 초급 마법사 이안은 몰려오는 아이들을 보고 깜짝 놀라 경비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마탑이 황궁 내에 있는 만큼 수상한 자들이 저만큼 떼거리로 몰려다닐 리는 없었으나 이들은 정체는 불명확했다. 이안은 침을 꿀꺽 삼키고 몰래 소매 속의 로드를 만지작거렸다.

“잠깐, 멈추시오.”

우르르 몰려오던 사람들이멈춰 섰다.
모두들 로브를 착용하고는 있었지만  아래 숨겨진 체형은 마법사들로 보긴 힘들었다. 수십 년간 마탑 입구에서 마법사들을 보아온 이안은 로브 너머의 체형을  수 있었다.

멈춰선 무리 앞으로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은 방심하지 않았다. 외모로 상대방을 가늠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여자아이가 머리에 쓰고 있던 로브를 내리자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 나왔다.
한 동안 마탑에서 화제가 되었던 마력각성자이며 며칠 전 신문에까지 나온 그 얼굴이.

“아, 공녀님 아니십니까.”

마탑 경비원이 자신을 알아보고 경계태세를 풀자 공녀는 안도했다. 그녀는 미리 가지고  서류를 경비에게 제출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주일간 여기 있는 분들과 셰일로아 실마이아 마법사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 왔답니다.”

마력각성자인 공녀에게 마탑은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마력각성자들은 대부분 마법 역사에  발자취를 남기곤 했다. 마법적 깨달음에 목마른 마법사들이 새로운 마력각성자의 탄생에 얼마나 환호했던가.
드디어 공녀가 마법을 배운다고 생각한 이안은 기분 좋게 서류를 받았다.

“셰일로아 중급 마법사님의 강의 말씀이시군요. 며칠간 마탑에서 제법 논란이 있었지만 무사히 개설되어 다행입니다.”

이안은 서류에 찍힌 마탑의 문장이 진짜인지 판별하는 마법도구로 서류를 한 번 스캔한 다음 그것을 다시 공녀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저 분들은?”

이안이 뒤쪽에 경직된 자세로 정렬해있는 생도들을 가리키자 공녀는 딱딱한 미소를 지었다.

“일반인입니다.”

이안은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으나 서류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라고 적혀있기도 했고, 마력각성자인 공녀가 이들의 대표인 것을 보아 수상한 사람들로 보기에는 힘들었다.

결국 그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생도들을 통과시켰다.
아마 기사단 양성소 생도라고 떳떳하게 밝혔으면 입구에서 공녀를 제외한 전원이 문전박대 당했을 것이었다.

서류에 나와 있는 강의실은 마탑의 1층에 있어 금방 찾을  있었다. 생도들에게 검술과의 접목이나 오러에 대해 일언반구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준 공녀는 자신도 마력을 쓰는 방식에 대해 배우기 위해 강의실로 들어갔다.

강의실에는 이미 셰일로아가 와있었다. 테르한과 같이 다닐 때와는 다르게 제법 고급스러운 로브를 걸친 그녀는 우르르 들어오는 생도들을 보고 잠시 당황했다가 공녀가 보이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이. 공작가 꼬맹이. 오랜만이네. 네가 쟤네들 대장이지?”

셰일로아는 제즈릭 공작가와 맞먹을 정도로 큰 가문인 실마이아 후작가의 영애이자 근래 보기 드문 마법천재소리를들으며 자라왔기에 공녀를  대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성격을  아는 공녀는 셰일로아의 태도가 자신에게 막 대한다기보단 오히려 친근함의 표현임을 알고 있었다.
라이벌 가문의 자식이라기 보단 아펠의 친구로 인식되는 모양이었다.

“네, 마법사님.  동안 잘 지내셨나요?”

“말도 마. 갑자기 황실에서 재정 긴축 한다고 해서 위쪽 꼰대들이 노발대발해선 나보고 용사네 일행에서 활약이 적어서 그랬다는  했다니까?”

셰일로아는 혀를 찼고 공녀도 기가 막힌심정으로 탄식을 뱉었다. 용사 일행에서 그녀와 직접 뛰고 구르던 테르한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되는 발언이었다.

“네가 황자에게 이 강의를 제안해준 거지? 덕분에 깎인 돈 조금이나마 돌려받는다고 하니까 다행이지 뭐.”

말을 마친 셰일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도들을 둘러봤다. 벌써 자리에 앉아서 떠들고 있던 그들은 셰일로아의 시선을 느끼고는 조용해졌다.

“근데 쟤네들 기사단 양성소 애들이네? 야! 케론! 숨어있어도 다 보여! 너희 아버지 잘 지내시냐?”

케론이라 불린 생도는 앞자리의 친구 등에 숨어있다 마지못해 얼굴을 드러냈다. 낭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공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귀족 출신의 생도들이 섞여있다는 것을 깜빡했다. 셰일로아는 신분 때문에 또래의 귀족 아이들과 교류가 잦았을테고, 개중에 아는 얼굴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아는 얼굴들을 체크하던 셰일로아는 공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마탑과 기사단의 케케묵은 싸움에는 관심 없어. 나중에 내가 가르쳐준 걸로 문제나 일으키지 마.”

“네. 걱정마세요.”

잽싸게 대답한 공녀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노트를 꺼내들었다.

셰일로아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황자는 연구실 제일 깊숙한 방에서 성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언제나 총명함으로 빛나던 눈은 초점을 잃었고 입은 반쯤 벌린 채였다. 바닥에 시선을 내리깐 채 폐인과도 같은 꼴로 소파에 처박혀 있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성검과 대화하고 있었다.

[파멸의 도래가 멀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다.’

[충분치 않다. 모자란 것은 넘치는 것만 못하다.]

‘보통  반대 아닌가?’

[파멸이 상식적으로 나올 거라 생각지 마라. 나의 조언을 무시하면 오는 것은 멸망뿐이다.]

‘그래.  말 또 할 줄 알았지.’

황자는 문득 5년 전 자신이 호기심에 못 이겨 성검을  잡았더라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황태자가 되었을 수도 있고, 아직 20번째 마왕과 싸우고 있을 수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마력각성자의 상태는 어떠한가?]

‘네 말대로 조금 몰아붙이니까 금방 답을 내놓더군. 어린애가 조금 똑똑하다고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조언자로 붙어있다는 것은 명백하지.’

[그래. 계속 주시하라. 마력각성자에게 붙은 자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우리가 갖고 있는 제일 강력한 카드가 나중에 우리의 목을 조르지 않도록 충분히 감시하라.]

‘이미 충분히 감시하고 있다. 그녀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파멸에 대한 이야기나 해라.’

황자가 말을 돌리는 것을 알았는지 잠시 침묵하던 성검이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못마땅한 모양이군.]

황자는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니.너까지 나서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거지. 현재는 공녀가 우리의 가장 강한 패로 부르기는 모자람이 있다. 잠재력은 충분하지만 성장하지 못하면꽝이지.’

[하지만 너는 그녀의 성장 가능성을 무척이나 높게 보고 있군.]

황자는 혀를 찼다. 지금만큼은 성검과 기억이 조금씩 공유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와병하다 각성하고 한 달도 안 되어서 파멸의 구체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또 있을까?’

공녀가 만들어낸 것에 대한 설명을 들은 성검은 그것을 ‘파멸의 구체’라고 불렀다. 마왕 파멸이 즐겨 쓰던, 속성의 흐름을 역행하여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는 기술.

마법이라고 부르기는 힘든 것이, 마법의 전제조건인 ‘발동 주문 필요’, ‘필요 마력량이 정량적으로 계산되어야함’, ‘어떤 이가 사용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조건에 전부 해당되지 않았다.

애초에 마법적 재능이 무척이나 뛰어나야 흉내 내는 것이 겨우 가능할 정도였고, 잘못해서 파멸의 구체를 만들어냈다가는 시전자의 몸속의 마력을 전부 탕진할 때까지 무한히 마력을 소모한다고 한다.

과거에는 제법 많은 이들이 이를 시도했다고 하나 이제는 하나의 금기가 되어버렸다.
파멸의 구체에 흥미를 느낀 황자가 마법관련 사고 기록을 들여다본 결과 몇 년  하플링 부락에서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았다. 물론 그는 폐인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운이 좋았다. 마력각성자가 아니었으면 체내의 마력이 빨려 들어갔겠지만 마력각성자는 온 세상의 마력을 자기  마냥 뽑아 쓰는 작자들이니. 문제는 마법을 익히지 못한다고 한 공녀가 그 나이에 파멸의 구체를 다룰 정도로 마력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이겠지.]

‘뛰어난 마법사가 붙어있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뛰어난 마법사일수록 마법의 형식에 목메는 법이니. 제일 유력한 것은 전대의 마왕 중  명이다.]

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녀의 영혼에 마왕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파멸은 아직 ‘그곳’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성검이 코웃음을 쳤다. 실제로 코는 없었지만 황자에겐 그와 비슷한 감정이느껴졌다.

[인간 따위의 판별을 믿을쏘냐. 물론 내가 직접 접한다고 해도 알아볼 수는 없을 테지만, 최악의 경우 정화의진 따위에 당한 전대 마왕 중 누군가가 붙어있다고 가정하고 행동하라. 그자의 회유가 가능하면 정말 강력한 아군이 될  있다.]

‘왜 정화의 진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나?’

성검은 자신의 기억을 공유했다. 황자는 처음 보고 듣는 이야기가 많아 한동안 말없이 지식을 탐독했다.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한 황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화의 진이 그런 것이었다니. 왜 이번 마왕 원정 전에 말하지 않았지?’

[이번 마왕은 특별하니까 그런 것이다. ‘분열’만큼은 여타 다른 마왕과는 특성이 다른 마왕이니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고 파멸을 불러와야 했다. 그러려면 정화의 진이 필수적이지. ‘분열’의 특성상 정화의 진이 아니면 대책이 없기도 했고.]

‘어째서인지는 물어봐도 소용없겠지?’

[그래. 아직 때가 아니다. 너는 오로지 파멸에 대한 대비만 생각해라. 더 이상 공명하면 너의 머리가 망가지겠군. 이번에는 시간도 길었고 공유한 지식도 상당하니 다음번 공명은 최소 보름 뒤다.]

‘알겠다.’

황자는 자신의 머리를 옥죄이던 감각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빛을 잃었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는 심각한 피곤함을 느끼며 뻐근해진 몸을 풀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검이 성검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공명하면 정신을 갉아먹은 성검이라니. 전대 용사들도 이러했을까.

황자는 성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소파에 널브러졌다. 오늘은 이만 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황자의 의식이 점멸하더니 이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몇 년째 꿈을 꾸지 못하는 황자의 수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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