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제 5 장. 전조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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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오늘 한 말을 요약하자면 마력에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첫 번째가 이미지고, 두 번째가 감각이야. 알았지?”
셰일로아는 허공에 띄운 마력 구체의 속성을 순차적으로 변화시키며 설명했다.
이곳에 있는 전원이 기사단 양성소의 생도라는 것을 들킨 뒤 그들은 두루뭉술한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직접적인 설명을 해주길 원했고, 셰일로아 역시 동의했다.
그리고 중간에 쉬는 시간도 없이 두 시간이 넘게 이어진 강의에 강철 같던 생도들의 정신력이 뭉텅뭉텅 깎여나갔다.
공녀는 셰일로아의 설명에 처음 듣는 개념이 나올 때마다 분열에게 질문하였다.
- 나는 너 덕분에 이미지만으로 마력에 속성을 부여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된 거지?
- 그럼. 그대가 마력 움직이는 법도 모르던 때가 며칠 전이지 않은가.
- 역시 마왕이라 그런 건가? 다른 마왕들도 마법이나 마력에 대해 파멸만큼이나 알고 있는 거야?
분열은 잠시 생각을 골랐다.
지금 공녀에게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일은 최대한 말하지 않는 것이 분열의 방식이었다.
- 아니. 마왕들은 제각기 마신의 일부분을 이어받기 때문에 능력이나 특기가 다들 제각각이다. 나는 사실 마법을 잘 다루는 편은 아니지만 지식욕이 왕성하고 영혼을 분열시킬 수 있지. 마법은 파멸의 영역이라 파멸만큼이나 마법에 대해 알고 있는 마왕은 없다.
- 흐음. 그럼 파멸은 내가 저번에 만들어냈던 그 구체도 알고 있으려나?
- 그렇겠지. 그 강함을 보면 파멸 또한 그것을 직접 사용했을 수도 있다. 나는 사실 파멸이 지상에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직접 본 적은 없어서 확신은 하지 못하겠지만, 파멸이 그 구체를 사용한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 또한 생각해 봐야겠지.
공녀는 분열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저번에 본 분열의 기억에서는 열아홉의 마왕이 모여 있었고, 분열에 말로 추정해보면 파멸은 지상에 나오기 직전의 상황이었으며 분열은 멀쩡한 상태였다.
- 파멸이 어떤 방식으로 지상을 파괴했는지는 못 본거야? 도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분열은 잠시 말이 없었다.
분열이 대답하기 싫어서 입을 다물었나보다 하고 셰일로아의 강의를 듣던 공녀의 머릿속에 분열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당황한 공녀는 펜을 꽉 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것은 마신의 편린인 분열의 사명.
타락한 세상의 원죄를 뒤집어쓴…….
- 야, 잠깐. 너무 과거부터 시작하잖아.
- 과거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아니었나?
- 지금 수업중이잖아. 요약본 없어?
- 쳇. 나중에 꼭 다 보거라.
분열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고 공녀는 분열이 짧게 편집한 기억을 다시 공유 받았다.
파멸이 지상으로 나가고, 마신의 성격과 능력, 그가 뒤집어 쓴 원죄를 열아홉 조각으로 나눈다는 사명을 마친 분열은 수백 년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분열은 몇 명 남지 않은 마왕들에게 일의 진행을 물어보았다. 그들은 파멸이 지상을 대부분 파괴한 뒤 귀환하여 잠들었고, 그 뒤로 차례차례 마왕들이 지상으로 가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전해주었다.
- 돌아오지 못했다고?
- 그래. 원래는 다른 마왕들도 파멸처럼 활동 기간이 종료되면 그곳으로 돌아오도록 되어있었지. 하지만 파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 당황해서 지상을 살펴본 나는 용사라 불리는 인간과 그 일행들에게 마왕들이 당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분열이 과거에 느꼈던 당황스러움이 공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애초에 마왕이 지상에 강림하는 목적은 무엇인지가 궁금했지만, 그것은 다음 번 편집 전 기억을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나머지 얘기는 다음번에 하겠네.
- 응? 갑자기?
따악
“아얏!”
갑작스러운 타격에 공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느새 꾸벅꾸벅 졸던 공녀에게 순수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탄환을 날려 꿀밤을 먹인 셰일로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맨 앞에 앉아서 간도 크네. 아펠 친구라고 봐줄 생각 없어. 마력각성자일수록 내 강의를 듣고 올바른 마력 사용법을 익혀야지.”
“죄송합니다.”
입가에 흐르던 침을 닦으며 공녀가 사과했고 생도들 사이에 웃음이 번졌다. 어느덧 강의를 마칠 시간이 되었는지 셰일로아는 자료를 정리했다.
“다음 강의는 모레, 똑같은 시간이야. 너희가 목표하는 걸 알았으니 좀 더 실전적인 것을 가르쳐줄게. 이상.”
생도들의 인사를 받으며 셰일로아는 강의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생도들은 오늘 들은 내용을 오러에 접목시키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지 아니면 그저 빨리 돌아가고 싶은 것인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로브는 쓰세요! 누가 물어보면 강의 들으러 온 일반인이라고 하고!”
공녀의 외침에 생도들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질서정연하게 강의실 밖으로 향했다. 그들 사이에 섞여서 나오던 공녀는 출구에서 경비에게 다시 한 번 인사한 뒤 무사히 양성소로 돌아왔다.
“파이어 오러!”
검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제는 식상한 풍경이라 생도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 맞은편에 서있는 이에게 주목했다.
“이건 어때? 아이스 오러!”
가느다란 검에 얼음가지가 돋아나고 냉기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물 원소의 변형인 얼음 원소를 발현하는 것은 원소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필요했으므로 생도들은 깜짝 놀라며 박수를 쳤다.
박수를 받은 벨로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로브를 뒤집어 쓴 한 무리가 양성소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선두에는 공녀가 서있었다.
“아가씨!”
벨로나는 얼음의 오러를 꺼트리고 검을 갈무리한 뒤 공녀에게 다가갔다. 벨로나에게 인사를 건넨 공녀는 그녀에게 슬며시 권유했다.
“벨로나. 다음 수업은 너도 들어볼래?”
“음. 전 괜찮아요. 이제 아이스 오러까지 쓸 수 있는걸요. 게다가 제 마력량 잘 아시잖아요.”
아리에의 기억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벨로나가 공녀에게 붙어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녀의 월등한 마력량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력으로 공녀의 마력 탈진증을 어떻게 완화시켜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붙여둔 것이라던가. 하지만 소용은 없었다.
벨로나가 제법 마력을 다루는 데 익숙하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린 공녀는 그녀가 마법을 대신할 보조 기술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자신의 뒤에 서있는 생도들을 해산시키고 이야기하기로 결정한 공녀는 뒤를 돌아보며 로브를 벗었다.
“자, 여러분들은 일단 오늘 배운 것을 숙지하시고 오러에 적용시켜본 뒤 모레 다시 봅시다.”
“네!”
이제 완전히 인솔자나 다름없는 공녀의 말에 생도들은 해산했다. 그 모습에 혀를 내두르던 벨로나에게 공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아가씨?”
벨로나는 종이봉투에 담겨있던 물건을 꺼냈다.
가죽으로 된 팔찌에 마석이 박혀있었는데, 크기 조절이 용이하도록 길이 조절용 끈이 붙어있었다.
공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벨로나. 일반적인 [헤이스트]의 마법을 양 다리에 거는 것과 네가 다리에 바람의 마력을 불어넣고 빠르기를 증가시켰을 때를 비교해서 대답해봐.”
“네? 네.”
갑작스런 공녀의 말에 벨로나는 자신의 훈련 파트너가 써줬던 헤이스트 마법을 떠올렸다.
“일단 마력 소모량은 어느 정도 차이가 나?”
“음.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제 동기랑 저의 마력량을 비교해봤을 때 대충 2~3배쯤 아닐까요?”
“그럼 효과는?”
“아, 그건 헤이스트 마법을 받아봐서 알아요. 헤이스트는 걸음이나 뜀박질의 빠르기를 30% 정도 올려주는 마법이죠? 제가 쓰는 방법으로는 제일 효율적으로 마력을 사용하면 10%정도, 마력을 엄청 쓰면 15% 좀 안 되는 정도까지는 가능해요.”
효과는 적어도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 게다가 마력의 소모량까지 따지면 네 배 이상 효율이 떨어지는 방식이었다. 심지어 반발력 때문에 저 이상 효과를 끌어올릴 수도 없었다.
발동 방식도 마법은 주문을 익히기만 하면 되지만 마력을 다루는 기술은 타고난 센스가 있어야 했다. 이쯤 되면 마법을 익히지 못하는 쪽이 명백히 손해였다.
공녀는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벨로나에게 방금 조그마한, 어쩌면 제법 큰 선물을 했다.
“그 발찌에 달린 마석은 바람 마력의 ‘보조계열 효력 상승’과 ‘반발력 억제’의 효과가 있어. 얼마 전 개발된 마석의 시제품이야.”
벨로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이거 엄청 귀한 거 아닌가요?”
공녀는 씨익 웃었다. 그녀는 품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내 벨로나에게 그 안을 보여주었다. 주머니 안에는 벨로나가 받은 발찌에 부착된 것과 같은 종류의 마석이 가득했다.
“아니. 마도공학소에서는 몇 개 생산하지 못하는 희귀 마석은 취급하지 않아. 전부 대량생산이야.”
벨로나가 감탄하는 사이 공녀는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발찌를 손수 발목에 착용시켜주었다. 벨로나는 허둥지둥하다가 얌전히 공녀의 행동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불편하지는 않지? 일단 한쪽만 차고 좀 뛰어볼까? 다리에는 바람의 마력을 두르고.”
벨로나는 공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다리에 바람의 마력을 채워 넣었다. 오른쪽 발목에 찬 마석이 마력과 공명하고 있었다. 잔잔한 진동이 일며 왼쪽 다리보다 안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벨로나는 자신감이 차오른 채 출발선에 섰다. 어느새 주변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이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바람의 마력을 머금은 벨로나의 오른쪽 다리가 땅을 뒤로 밀어내며 그녀의 몸을 앞으로 쏘아 보냈다.
조금 둔한 느낌이 드는 왼쪽 다리에는 본능적으로 마력을 더 쏟아 부었다. 오른쪽 다리와 보조를 맞출 수는 있을 정도로 마력을 쏟아 붓고 보니 그 차이가 대략 세 배에 달했다.
벨로나는 빠른 속도로 연병장 한 바퀴를 돌았다.
“후우. 이 발찌, 성능이 대단하네요.”
“다행이네. 나도 시험해보긴 했는데 다른사람도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을지 긴가민가했어.”
공녀는 벨로나에게 발찌를 하나 더 주었다. 마치 주군에게 검을 하사받는 기사처럼, 벨로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발찌를 받아들었다.
그만큼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것을 준 아가씨에게 감사하는 마음에서 자연스레 나온 행동이었다.
왠지 쑥스러워진 공녀는 헛기침을 한 뒤 벨로나에게 물었다.
“헤이스트랑 비교해보면 어때?”
“직접적인 비교는 해봐야 알겠지만, 기존 속도를 10%정도 상승시킬 때보다 적은 마력으로 15% 정도 속도를 끌어올리는 게 가능했어요. 왼쪽 다리에도 이걸 차고 달리면 두 세 배 정도의 마력을 더 쓰면 헤이스트를 거의 따라잡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반발력도 상쇄해준다니까 가능하겠죠?”
공녀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만 있으면 다른 이들보다 마력량이 몇 배는 되는 벨로나가 바람계열 보조마법에서 밀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헤이스트 같은 바람 계열의 보조마법을 어느 정도 대체하게 되었지만, 앞으로는 모든 속성, 모든 계열에 대한 대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바람-보조 마석의 개발은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는데, 특수 시약 처리를 하던 마석에 불순물이 섞여 들어가 그것을 마력으로 배제하다가 생겨난 것이었다.
클레어는 주로 물리, 화학적인 방식으로 마석을 가공했지만 마력에 의한 후처리로 어느 정도 성능을 의도한 방향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개발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즉, 다루가 죽을 만큼 고생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마석을 생산하게 되면 마력을 잘 다루는 이들이 다수 필요하다. 클레어는 공장에서 마석을 찍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마력에 의한 후처리는 수작업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공녀는 이를 마탑의 인력을 동원해 그들에게 외주의 형식으로 주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출처는 테르한의 용병 생활 때의 지식.
벨로나는 공녀에게 인사를 한 뒤 마석을 테스트하러 갔다. 양성소에서 볼일을 마친 공녀는 플라잉 보드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양성소는 제도의 북서쪽에 있었다. 제도 북쪽에 자리 잡은 황궁까지는 보드의 속도로도 20분은 넘게 걸린다.
공녀는 거리의 풍경을 보며 천천히 나아갔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길. 2층 주택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들. 그 너머에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장.
공녀는 제도를 사랑한다. 이곳에 사는 시민들과 그들의 생활 터전이 무언가에 파괴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막을 수 있다면.
‘파멸을 먼저 발견할 수 있을까?’
황자의 말에 의하면 공녀와 같은 마력각성자가 마왕의 낙인이 새겨지는 유력한 후보라고 한다.
문제는 마력탈진증을 앓는 사람들 중 그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자신이 마력탈진증을 앓았는지도, 병이 낫고 마력각성자가 되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었다.
제국 곳곳에 퍼져있는 정보요원들과 정보상들이 의심되는 자들에 대한 소식을 모으고 있지만 마력탈진증 자체가 워낙 희귀한 질병이라 근 몇 년 간 관련 보고는 공녀에 대한 건이 전부였다고 한다.
게다가 대륙이 좀 넓은 것도 아니고, 제국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도 많다보니 애초에 파멸을 먼저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은 버리는 편이 현명했다.
그저 최대한 힘을 길러놓고 나타나자마자 잡는다.
파멸을 대하는 공녀의 기본 자세였다.
현재는 존재하지도 않는 파멸에 대해 조용한 분노를 태우며 공녀는 황궁으로 귀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