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1화 〉제 5 장. 전조 - 6 (31/82)



〈 31화 〉제 5 장. 전조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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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일주일에 걸쳐 진행되는 셰일로아의 강의는 어느새  번째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력에 속성을 부여하는 방법과 마력의 절대량이 필요한 생도들이,  다음은 마법은 쓸 수 있지만 오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생도들이 강의를 듣고 있었다.
후자의 경우 생도의 수가 워낙 많아 세 번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다.

공녀는 이미 필요한 것은 다 배웠다고 생각해 생도들이 강의를 들으러 오갈 때만 잠깐 나와 인솔하기만 했다. 마탑에 생도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어 이제 경비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고, 마탑이 황궁 내에 있었기에 공녀는 시간이 제법 남게 되었다.

오러를 발동하지 못하는 생도들 중 3할은 강의를 전부 들었다.
그들  절반에 가까운 수가 오러를 조금이나마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성취에 고무되어 양성소의 커리큘럼에 마법과 마력에 대한 것을 추가시켜야 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공녀는 그것이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파멸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바뀌어야 하고 반목하던 이들도 손을 잡아야 한다.

강의는 2시간에서 3시간 정도 진행되기에 남는 시간에 마도공학소에 갔다 오기도 애매했다.
귀빈관에 다시 갔다 오는 것도 불침번근무 중 숙소에 잠깐씩 들어가 쉬던 과거의 일탈이 떠올라 떨떠름하던 그때 분열의 말이 공녀의 목적지를 정해주었다.

- 그대는 항상 공부를 한다고 노래를 불렀으면서 막상 시간이 남으면 무얼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하는군.

- 아, 맞다. 오랜만에 연구소에 들러볼까?

요즘 황자와 아펠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납도식 준비로 바쁜 모양이어서 얼굴 볼 새도 없었다.
용마연에 가도 황자가 있을 가능성은 적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방해받지 않고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녀는 황궁 내 보드 금지령에 한탄하며 연구소까지 내달렸다.
공녀가 황궁에서 뛰어다니는 모습은 이제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그녀를 자주 보는 경비병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가끔 처음 보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구경하며 바람의 마력을 머금은 두 다리로 빠르게 연구소에 도착한 공녀는 입구의 경비병에게 인사하며 건물로 들어섰다.

공녀가혼자서 연구소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연구소에 들를 일이 별로 없었던 공녀는 잠시 헤매다가 자료실 비슷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입구부터 안쪽까지 길게 늘어서있는 철제 책장에는 책과 서류들이  막힐 정도로 빼곡하게 꽂혀있었다. 심지어 자료실 안쪽에 거대한 문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보다 보안 등급이 높은 자료들이 있을  같았다.

책장 옆면에는 순서대로 번호가 적혀있는데, 10부터 시작해서 안쪽으로 갈수록 숫자가 낮아지는 것이 보였다. ‘10’의 번호가 적혀있는 책장은 약 다섯 줄, ‘9’는 네  정도 있었고 8번부터는 견고해 보이는 문 너머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마도 이곳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허락을 받아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녀는 여기에 처음 왔을 때 얼떨결에 받았던 자신의 연구원증을 꺼내들었다. 상당히 직관적으로 이름, 사진, 보안등급이 써져있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는데, 그 동안 보안등급의 ‘1’자가 무슨 뜻인지 잘 몰랐던 공녀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자료실의 안쪽으로 향했다.

자료실 안쪽 벽의 절반이나 되는 넓이의 거대한 문은 아무래도 사용하는 용도는 아닌 것 같았다. 사실상 벽이나 다름없는 큰  옆에 사람들이 드나들만한 적당한 크기의 문이 따로 있었고, 그 옆에는 책을들여다보고 있는 청년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저기…….”

공녀가 말을 걸자 흠칫 놀란 청년은 공녀를 바로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제즈릭 공녀님. 어서 오십시오. 언제 오시나 기다렸습니다.”

공녀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여기 온다고  한 적이 있었나요?”

“아, 황자전하께서 공녀님이 언젠가 오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공녀는 자기도 모르게 쳇 소리를 내고는 그에게 연구원증을 내밀었다.
청년은 문을 열다 말고 공녀의 연구원증을 슥 훑어봤다. 보안등급 1등급의 표시를 본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마저 열었다.

자료실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공녀는 생각보다 작은 규모에 놀랐다. 방에는 8부터 4까지의 책장이 늘어서있었고  너머에  문이 있었다.
공녀는 그곳을 지키는 사람에게도 연구원증을 제시했고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자료실 최심부는 공녀의 방보다도 작았다.
3번 책장은 4개가 되지 않아  줄이 채 되지 않았다. 2와 1의 책장은 책장 한 개씩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1의 숫자가 붙어있는 책장에는 책 몇 권과 서류 몇 다발이 전부였다.

공녀는 일단 1번 책장으로 갔다.
이미 분열을 통해 어느 정도 마왕에 관련된 지식을 쌓았기에 분열도 모를만한 정보를 찾기 위해서였다.

- 이 중에 볼만한  있을까?

- 인간들이 얼마나 지식을 쌓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황자는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같으니 나도 모르는 정보들이 있을지도 모르지.

공녀는 1번 책장에서 서류 몇 개를 집어 들고 제목을 훑어봤다. 마왕의 진명, 용사의 조건, 성검과 마왕군 준동의 상관관계…….

- 마왕의 진명부터 봐라.

분열의 말에 따라 ‘마왕의 진명’ 문서를 꺼내든 공녀는  쪽 남짓한 문서를 휘리릭 넘기다가 표로 정리되어있는 것을 찾았다.

‘초대 마왕 파멸, 3대 마왕 공포……?’

표는 곳곳이 비어있었다. 숫자를 세어보니 진명이 적혀있는 마왕은 열 셋이 전부였다. 제법 옛날 자료였는지 표는 19대 마왕까지만 적혀있었다.
자신이 등장하지 않은 것에 분열은 자존심이 조금 상한 것 같았다.

- 난  전부 적혀있는  알았네.

- 인간들이  정도 진명을 밝혀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흐음. 내가 잠들어있던 사이에 여덟이 나갔었군.

파멸이 등장한 시기를 원년으로 해서 계산한 연대까지 같이 적혀있었기에 공녀는 마왕들의 등장 시기와 대략적인 순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분열에게는 자신이 잠들어있던 사이에 어떤 마왕이 지상에 나왔는지를 확인하는 정도였지만 인간들이 생각보다 마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자신이 쥐고있는 말이 병졸인 것보다는 기사인 편이 좋지 않은가.

- ‘용사의 조건’은 어떤 내용이지?

- 한 번 볼까?

공녀는 마왕의 진명에 대한 문서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그 옆의 문서를 집어 들었다.
용사의 조건에는 제법 놀랄만한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용사는 초대 용사의 혈통으로 그를 계승하는 자들 중 동시대에 제일 뛰어난 자가 용사가 된다. 제일 뛰어난 자가 모종의 이유로 용사가 되지 못하거나 불행한 일로 명을 달리하면 그 다음으로 뛰어난 자가 용사의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다.」

이건 황자와 아펠에게도 해당하는 것이겠네.

그들은 반대로 파멸을 상대하기 위해 황자 대신 용사 아펠에게 나를 상대하라고 한 것이었군.

분열의 탄식인지 깨달음인지 애매한 말을 뒤로한 채 공녀는 다음 구절을 읽어 내려갔다.

「용사는 성검의 선택을 받는데, 성검에대한 자세한 자료는 별도의 자료로 남겨둔다. 성검의 선택은 마왕군의 활동이 시작될 때 초대 용사의 조각상에 꽂혀있는 성검이 빛나면서 시작되는데 용사의 자격이 없는 이들은 그 검을 뽑을 수 없다.」

- 납도식 얘기?

- 반대로다. 납도식은 마왕군의 활동이 끝났음을 이르는 것일 테니.

분열의 말에서 착잡함이 묻어나왔다. 조금 있으면 열릴 납도식은 사실상 분열의 군세가 완전히 진압 당했음을 대대적으로 알리는 자리이다.
자신의 세력에 종말을 고하는 기념식에 분열이 우호적인 감정을 품기는 어려웠다.

「현재 용사는 8대 용사의 후손인 체노스트라 제국의 황실에서 배출되고 있으며」

여기까지 읽은 공녀는 문서를 닫았다. 등에 한줄기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문서에 따르면 아펠 또한 황실의 인물이라는 소리였다.
최소한 먼 친척은 될 텐데 테르한으로 그 동안 아펠을 어떻게 대했는지 저도 모르게 기억을 되짚어본 공녀는 딱히 문제가  만한 기억은 없었기에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문서를 펼쳤다.

「……배출되고 있으며 황실의 방계 가문들은 철저히 용사를 길러내기 위한 곳이 되었다. 현재 제국의 개국공신들 중 무력이나 마력이 뛰어난 자들은 우수한 용사를 배출하기 위해 황실과 혼인 등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 황후마마가 선택받은 것도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군.

- 그녀는 기사단 소속이었으니 스스로 강함을 증명한 것이지. 때문에 황자 같은 놈이 태어났으니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

- 하지만 이건…….

강한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품종 개량 같았다.
공녀는 뒷말을 차마 분열에게 전달하지 못했다. 그런다고 분열이 공녀의 생각을 읽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열은 모른 척 해주었다.

어느새 끝나버린 짧은 문서를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은 공녀는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보았다.
강의가 끝날 때는 아직 멀었지만 여유 있게 가는 편이 좋았다.
공녀는 연구소를 나와 다시 마탑으로 향했다.



어느덧 납도식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과거 기록처럼 제도가 가득 차거나 하지는 않았다.
인구는 많이 늘었지만 그만큼 교통이 발달하여 납도식 전날이나 당일 기차가 미어터질 만큼 사람들이 많아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적절히 기차역과 그 주변의 경비가 추가 투입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공녀는 가볍게 검을 내질렀다. 납도식의 주인공인 아펠은 공녀에게 이것저것 이야기해주며 그녀의 가벼운 검을 쉽게 쳐냈다.

“잠깐 쉴까?”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자. 사흘밖에 안 남았으니 아예 그때까지 쉬는 건 어때?”

공녀의 말에 아펠은 고개를 저었다.
테르한 왈, 매일 꾸준한 연습만과 단련만이 검의 경지를 끌어올린다고 하였다. 정작 그 테르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공녀는 이제 좀 쉬고 싶어 했지만.

“납도식 당일에는 황궁에 있을 거지?”

“응. 아마 분수 앞에서 기다릴 거 같은데.”

“그게 사실상 핵심이니까. 그런데 황자님한테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공녀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 놈이 아펠에게 무슨 이상한 소리를 했을지 걱정이 앞섰다.

“무슨 소리를 했는데?”

“음. 납도식 날 기대하라는데.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질 거래.”

일을 꼬아버리는 데 재주가 있는 작자이니 괜히 아펠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미리 물어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공녀는 스스로를 설득시킨 뒤 아펠과 대련을 마치고 황자를 찾아보기로 했다.

황자가 있을만한 곳을 돌아다니던공녀는 요새 황자가 통 보이지 않고 연구소 직원들도 그의 행방을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황자가 머무는 궁에 가볼까 싶었지만 괜한 불똥이 튈까봐 나서지는 못한 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납도식 당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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