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3화 〉1부 닫고 2부 여는 장 (33/82)



〈 33화 〉1부 닫고 2부 여는 장



33 -

1. 공작의 성

제국력 874년 6월. 아리에 제즈릭 공녀의 열한 번째 생일.

공녀는 제즈릭 공작의 성에 와있었다.

공녀는 원래 이곳에 올 생각이 없었지만 시밀레의 간곡한 부탁에 마음이 약해져 어쩔 수 없이 오게 되었다
시밀레는 기어코 따라오려 했지만 공녀는 그녀가 지난 1년 동안 쓰지 못한 휴가를 억지로 쓰게 만들어서 집으로 보내버렸다.

그래도 여기 와서 좋았던 점은 아리에의 기억 속에서도 가끔만 만날 수 있던 공녀의 어머니를 직접 만날  있었다는 것이었다.
공녀를 낳고 몸이 많이 안 좋아져 별채에서 요양 중인 그녀에게치유의 마력을 써보았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나 품에 안기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느끼며 어머니의 ‘고생 많았지?’ 한 마디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륵 흘리며, 공녀는 가끔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테르한의 부모님의 묘소에 한  찾아갈 계획을 세웠다.
제도에서 멀지 않으니 어렵지는 않으리라.

2. 생일파티

아리에는 자신의 생일에 축하를 받아본 기억이 없었고, 테르한 역시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자신의 생일을 기념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양성소에서 생일 때 주던 조그마한 케이크를 생도들끼리 나눠먹었던 기억이 전부였다.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휘황찬란한 음식들과 거대한 케이크를 보며 공녀는 한숨을 쉬었다.
공녀의 맞은편엔 공작과 그의 두 아들이 앉아있었다.
각각 아버지와 오라비라 부를  있는 존재들이었지만 공녀는 열한 살 아이의 생일파티에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들을 그 호칭으로 부르기도 싫어졌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기 싫고 오라비를 오라비라 부르기 싫은 심정으로, 공녀는 포크를 집어 들었다.

수많은 하인들이 공작과 자식들을 보며 다소 경직된 자세로 음식을 계속 날랐다.
그리고 그 음식들은 대부분 공녀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생일잔치 음식이라 그런지 제법 고급스러운 재료들을 쓴 모양이어서 꽤 정순한 마력을 뽑아낼 수 있었다.

공작과 공자들은 처음에 공녀가 2인분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배가 많이 고팠나 싶었지만  5번째 접시를 비우는 공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나 체하지나 않았을까 의학을 배운 둘째 루테스가 공녀의 맥을 짚으려다 그녀의 기세등등한 포크질에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었다.

마력 각성 때문에 몸의 효율이 안 좋아졌다는 변명을 둘러댄 공녀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 둘째 오라비를 쏘아보아 눈빛으로 제압한 뒤, 남은 음식을 마저 먹어치웠다.
간만의 포식에 공녀는 배를 두드리며 곧장 어머니가 있는 별채로 향했다. 남은 세 부자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잠시 당황하는 시간을 가졌다.


3. 생일선물

짜잔-하고 예쁜 돌멩이가 박혀있는 목걸이를 주는 루스카를 공녀는 말없이 쳐다보았다.
멋쩍어진 루스카는 마력각성자가 쓸 만한 귀한 마석이라 알려주었고, 공녀는 버릇처럼 목걸이를 쥐고 속성마력을 흘렸다.
목걸이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공녀는 피식 웃으며 마석이 아닌 그냥 보석이라 일러주며 목걸이를 건네주었고, 루스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다음날 신문에서 공작령의 시내에 있던 보석 상인이 가짜 보석을 대량으로 판매한 뒤 야반도주했다는 소식을 보며 공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루스카를 찾아간 공녀는 목걸이를 다시 받아서 원래 있던 보석을 빼버리고 즉석에서 품에 있던 주머니에서 꺼낸 마석을 끼워 넣었다. 따로 가공기술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마력으로 대충 다듬으니 제법 모양이 나왔다.
공녀는 고맙다고 말한 뒤 목걸이를 챙겨갔고 루스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여동생은 생각보다 더 대단한 모양이었다.



4. 손난로 마석

제국력 876년 12월.

마도공학소의 겨울은 따뜻하다.
작년 겨울, 난방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얼어붙을 것 같은 연구실에서 며칠을 지내던 클레어가 참다못해 마력을 소모하여 자동으로 일정 반경에 온기를 뿜어주는 마석을 개발해냈기 때문이었다.
핵심이 되는 마석이 제법 희귀해서 대량생산은 아직 힘들었지만 공학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전부 나눠주고 지인들에게 팔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공녀는 연구원 특전으로 하나를 받은 뒤 돈을 지불하고 손난로 마석을 두 개  사갔다.

아펠과 시밀레에게 마석을 하나씩 나누어준 공녀는 오랜만에 귀빈관의 식당에 쳐들어온 황자의 배신감 어린 끈덕진 시선을 받게되었다.
요즘 제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황자는 때때로 보온이 잘 되지 않는 곳에도 가게 되는데, 고생을 하는 자신에게 손난로 마석을 주지 않았다고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는 막 나가도 어려서 그러려니 했지만 몸은 다 자란 성인이나 마찬가지인 사내놈이 저러니 밥맛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공녀는 황자가 더 이상 구시렁대는 것이 싫어서 자신의 손난로 마석을 직접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황자는 뛸 듯이 기뻐했다. 실제로도 조금 뛰다가 공녀에게 주의를 들었다.

얼마  황자가 손난로 마석을 자랑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공녀는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했다. 결국 비슷한 효과를 내는 마석 개발에 박차를 가한 공녀 덕분에 보급형 손난로 마석이 시중에 출시되었고, 황자가 마석을 자랑하고 다니는 일은 줄어들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