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제 6 장. 분열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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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변방의 조그마한 제후국인 켄스웰 왕국은 수도를 포함해 도시라 부를 수 있는 곳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작은 곳이었다.
드넓은 초원과 대륙 북부의 거대한 산맥에서 내려오는 깨끗한 강물이 나라 전체에 흘러, 전국토의 대부분이 비옥한 땅이었기에 좋은 재료로 만든 맛좋은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공녀는 현재 몇 주째 이 왕국에 머물며 그 말을 유감없이 체험하고 있었다.
분명히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지만 시기를 잘 재어야 하는 일인 줄 모르고 무작정 왔다가 이곳에 꼼짝없이 붙어있게 되었다.
제국의 망명 높은 귀족 제즈릭 공작가의 여식이자, 현대 생활수준을 한층 끌어올린 마도공학소의 수석 연구원 직함을 달고 왔기 때문에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다.
다만 국왕이 굽실거리며 나이대가 비슷한 조카를 소개시켜주려고 했던 것은 불편함을 넘어 불쾌했다.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거는 소년을 대하기 힘들어 대충 인사만 하고 나와 식도락을 즐기며 나라를 돌아다닌 것이 어언 3주일.
겨울이 끝날 즈음 이곳에 도착한 공녀는 수소문한 끝에 왕국 어딜 가도 보이는 커다란 산맥에 목적지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길었던 겨울이 끝난 지는 꽤 되었지만 높은 산의 눈은 쉬이 녹지 않았다. 어느 정도 날씨가 풀려야 목적지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에 공녀는 관광을 온 기분으로 간만에 편하게 쉬게 되었다.
3주가 지난 지금은 제법 봄기운이 충만해져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산맥의 눈이 녹아 파묻혀있던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채비를 차리고 출발할 때가 된 것이다.
- 분열?
분열은 오늘도 대답이 없다.
언제부터였더라. 기억을 떠올려보니 대략 작년 이맘때였던 것 같았다.
항상 붙어있는 단짝친구처럼, 격식 없는 동료처럼 수년을 지내오던 분열이 언제부턴가 종종 공녀의 말을 놓치는 일이 늘어났다.
잠시 딴 생각을 했다는 말만 반복하는 분열이 어딘가 수상해 한참을 추궁한 결과 분열에게서 다소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듣게 되었다.
- 그대, 아리에의 영혼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또 다른 그대, 검사 테르한의 영혼이 감당해낼 수는 있겠지만, 그 사이에 눌러앉은 나의 영적인 위치가 조금씩 위태로워지고 있다.
- 뭐? 그럼 큰일 아니야?
- 호오. 큰일이라고 말 해주는 건가.
- 그야…….
따지고 보면 서로는 전생의 원수나 다름없었었다.
하지만 아리에의 몸에 같이 섞여 들어와 파멸이라는 공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배우고 가르치고 의논하고 실행하며 그들은 어느새 말 그대로 영혼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 이대로 간다면 파멸의 도래를 못 보고 내 영혼은 흩어질 것이다. 애초에 영혼은 정화의 진에 맞고 육체는 성검에 맞았으니 지금까지 영혼이 멀쩡했던 것이 기적이었지.
공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방도를 찾았다. 용마연의 3급 이하 비밀자료, 황궁의 도서관에 있는 영혼이나 마왕에 대한 정보를 이 잡듯 뒤져가며 관련 정보를 모았다.
그것으로는 마땅한 방법을 찾을 수 없어 엘레나를 찾아가 말을 빙빙 돌려가며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무언가 알고 있는 듯 했지만 넘어가준다는 투로 말을 했고, 공녀는 다시는 성직자들에게 영혼에 관련된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약 한달 전, 겨울의 마지막 추위가 몰아칠 무렵. 몇 주 만에 정신을 차린 분열이 대뜸 말을 꺼냈다.
- 그대는 언제 내 부탁을 들어주려는 것이지? 나에겐 이제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 부탁이라면, 도플갱어를 말 하는 거야?
- 그래. 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면…….
분열은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침묵했다.
다급해진 공녀는 예전에 분열의 군세를 잡으러 갔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과거에 봤던 책들을 뒤져가며 도플갱어들이 사는 곳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그리하여 오게 된 곳이 이곳 켄스웰 왕국이었다.
5년 전 마왕 분열의 군세가 일어난 곳이며 거대한 산맥에 도플갱어들과 어울려 사는 마을들이 넓게 분포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 도플갱어들이 있는 그 산맥이 희귀한 마석이 날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고 새로운 마석 개발에 몰두하던 클레어는 희귀한 마석을 필요로 했다.
공녀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즉시 마석을 찾아오겠다며 극구 고집을 부려 혼자서 왕국까지 오게 되었다. 그동안 공녀 혼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어지간한 모험가나 용병들보다 더한 험지를 오갔기 때문에 딱히 걱정이나 의심을 받지는 않았다.
문제는 산맥에 사는 현지인들도 동절기에는 몇 개월 치 식량을 쌓아놓고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었다.
“하아. 누구랑 같이 왔어야 했나. 엄청 심심하네. 분열도 말이 없고.”
물론 황실에서 귀중한 인재인 공녀를 호위나 감시 없이 외국으로 보내지는 않았다. 당장 지금만 해도 공녀가 들어와 있는 식당 맞은편 카페에 벨로나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제 딴에는 완벽한위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애초에 사람들의 마력 패턴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공녀의 앞에서는 변장이 무의미했다.
몇 년 전까지는 호위하는 사람이 계속바뀌었지만 작년부터는 벨로나가 정식 기사가 되어서 그런지 계속 그녀가 호위를 맡고 있었다. 공녀는 덕분에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 마음 편하게 여행하고 있었다.
벨로나가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며 설탕을 한 스푼 집어넣는 것을 보며 공녀는 식사를 왕창 주문했다.
이제 제법 여인의 티가 나는 공녀는 호리호리한 체형과 그 아래 숨겨진 탄력 있는 근육의 소유자였다.
본격적으로 자랄 나이가 되면서 신체의 능력을 제법 끌어올렸지만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여성으로써의 성장은 공녀에게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시밀레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었다.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한숨을 쉬며 홀로 3인분은 넘어 보이는 음식을 먹어치우는 아리따운 소녀는 흔히 볼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식당의 가격이 상당히 비싸고 고급스러워서 그런지 난폭하고 거친 무리들은 이곳에 출입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남자들에게 추파를 받는 등의 끔찍한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기에 공녀는 이 식당을 자주 이용했다.
처음에는 웬 가냘픈 소녀가 음식을 잔뜩 시키자 우려를 표했던 주인장도 이제는 공녀에게 완전히 익숙해졌다. 오히려 가끔 2인분 정도만 먹고 돌아가려고 하면 걱정해줄 정도가 되었으니 가히 단골이라 할만 했다.
“저기, 실례합니다.”
낮게 내리깐 성인 남성의 목소리에 공녀는 눈만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한산한 시간이었기에 근처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명백히 자신을 향한 말임을 인지하고 빠른 속도로 음식을 나르던 식기를 잠시 내려놓은 공녀는 식탁의 냅킨을 한 장 빼어 가볍게 입가를 닦았다.
어느새 몸에 배어버린 동작에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아름다운 레이디.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올려 말을 건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어느 놈팡이가 추파를 던지나 싶어 눈을 찌푸리던 공녀의 얼굴이 잠시 후 놀라움으로 환해졌다.
“하빈!”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하빈이 씨익 웃고는 공녀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던 주인장은 공녀의 표정이 밝아지자 안심하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하빈은 테르한과 동료였던 총사이자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유격활동을 하는 제국 레인저부대 소속의 특급 레인저였다. 테르한과는 1년간 동고동락하며 격의 없이 지내온 사이로 테르한보다 나이가 두어 살 많았으니 이제 거의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일 것이었다.
공녀와는 아펠을 통해 친해져서 이제는 삼촌과 조카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지만 거의 1년 간 만나지 못한데다가 목소리를 낮게 깔아서 그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제 보니느껴지는 마력이 꽤 익숙했다.
“오랜만이네, 아리에.”
“네. 오랜만이에요, 하빈.”
하빈이 피식 웃고는 습관처럼 품속의 파이프를 꺼냈다가 아차 하며 도로 집어넣었다.
공녀나 아펠이 담배를 끔찍이 싫어한다는 것을 아는 그는 그녀들 앞에서는 담배를 자제하고 있었다.
“저번 달에 아펠에게 네가 여기로 왔다는 말을 들었긴 했는데 말이야. 마침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식당에 들렀는데 아직 여기 있을 줄은 몰랐지.”
하빈은 자연스럽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고 공녀가 시킨 음식을 마음대로 먹기 시작했다.
“아, 그거 내거에요. 따로 시켜 드릴까요?”
“너는 여전히 식탐이 세구나. 내가 그냥 따로 시키지, 뭐.”
하빈은 자신의 몫을 따로 주문한 뒤 공녀와 함께 식사를 했다.
공녀는 오랜만에 즐겁게 떠들며 식사할 수 있었다.
어느덧 식사가 거의 끝났고, 공녀는 레인저인 하빈이 험난한 곳을 자주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알려진 게 적은 목적지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볼 좋은 기회였다.
“아참. 하빈은 저 산맥도 가봤나요?”
공녀가 창문 너머의 거대한 산맥을 가리키자 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 산맥에는 레인저 지부가 있어. 나 같은 유격대원들이 정기적으로 교대하며 근무하는 곳이지. 겨울만 아니면 괜찮은 곳이야.”
“그러면 ‘지버트 마을’이라는 곳도 가보셨나요?”
공녀의 목적지인, 도플갱어들이 사람들과 모여서 산다는 곳 중 제일 큰 마을이라고 하는 곳이었다. 그녀의 말에 하빈이 반갑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이지. 지버트 마을 참 좋은 곳이야.”
하빈은 식탁 아래에 두었던 배낭에서 정교한 지도를 꺼내들었다. 그들이 현재 있는 마을의 위치를 짚은 그는 산맥 쪽으로 주욱 손가락을 옮겨갔다.
“저 산맥은 4개의 큰 산이 대륙을 가로지르는 대간까지 이어져있어. 그 중에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 피체르 시에서 남쪽으로 가면 산맥 아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 나오고, 그쪽을 통해서 산 쪽으로 가는 길이 있어. 그 곳으로 계속 가다보면 가보면 마을이 나와. 표지판도 있고 갈림길도 몇 개 안되니까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거야.”
공녀는 열심히 눈으로 지도를 읽었다. 동서남북의 방향을 보는 방법은 마력으로도 가능한데다가 처음 가야하는 마을은 이곳에서 눈으로도 보이니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혹시 몰라서 빛의 속성이 담긴 마석을 하나 꺼내든 공녀는 정신을 집중해 새로운 능력을 마석에 새기기 시작했다.
“오, 뭐 하는 거야?”
“잠깐만요. 집중해야 돼서.”
마력의 조작법을 통해 마석에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는 일은 수년간 공녀가 해오던 일이었다.
분열의 지식과 셰일로아의 특강으로 다져진 마력이론은 이미 마탑의 여느 마법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고, 마력을 다루는 기술은 가히 대마법사 급이라 할만 했다.
마법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전장이 마법이 통하지않는 곳으로 변했기 때문에 공녀는 마탑의 회원증을 받아낼 수 있었다. 요즘 마탑에서는 마법을 배우는 것보다는 마력을 다루는 것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력을 다루는 기술이 독보적인 공녀는 가끔 마탑의 회의에도 얼굴을 비추곤 하였다.
마력의 프로페셔널인 공녀답게 채 1분이 지나지 않아 마석에 새로운 능력이 새겨졌다.
공녀의 애마인 플라잉 보드에 탑재된 빛의 마법의 일종인 [맵 리딩]을 응용한 능력이었다. 공녀가 마석에 마력을 불어넣자 하빈의 지도가 허공에 투영되었다.
“오, 굉장한데. 이거 몇 개 팔 생각 없어? 요즘 신입 레인저 애들은 지도 들고 다니는 걸 싫어해서 말이야.”
“음. 나중에 시험용 마석 몇 개 드릴게요. 마도공학소로 발주 넣어주세요.”
공과 사가 확실한 공녀의 말에 하빈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재미있는 녀석이라 생각하며 하빈은 스테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