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제 6 장. 분열 - 3
- 36 -
식사를 마친 공녀와 하빈은 계산을 한 뒤 거리로 나왔다.
“그럼 지버트 마을까지 가는 거지? 같이 가줄까?”
“아뇨. 괜찮아요.”
“응, 그래. 그럴 것 같았어. 뭐, 너니까 별로 걱정은 안한다만…….”
말하던 하빈이 갑자기 왼손을 홀스터에 가져갔다. 순식간에 권총을 뽑아든 하빈은 낮은 목소리로 공녀에게 속삭였다.
“미행이 있다. 두 명.”
공녀는 눈앞에 있는 마력에 물과 바람, 얼음의 속성을 부여하여허공에 조그맣고 투명한 거울을 만들어냈다. 거울에 비친 익숙한 모자를 본 공녀는 조용히 웃었다.
“괜찮아요. 호위에요.”
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권총을 다시 홀스터에 집어넣고 단추를 잠갔다. 그 모든 행동은 길을 걸어가며 팔을 자연스레 앞뒤로 움직이는 도중 행해졌다. 바로 옆에 있어도 눈치 채기 힘든 솜씨였기에 공녀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자세히 보니 젊은 친구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네. 움직임이나 폼이 제국 기사단 소속 같군.”
“네. 저희 집안의 가신 가문 출신인 벨로나라고 해요. 앞으로 제 호위를 맡을 거 같으니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았다. 상당히 강해 보이는군. 그리고 그 옆의 여자는? 나이가 좀있어 보이네.”
“음. 잘 모르겠어요. 아마 정보부 소속일거에요.”
벨로나가 공녀의 호위라면 다른 사람은 감시역일 것이다. 마왕과의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공녀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여러모로 난감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 호위가 있다면 더욱 안심할 수 있겠네. 그럼 난 이만 내가 일 하러 가볼게.”
“이 근처에 볼일이 있다고 하셨죠?”
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공녀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두 번째 마왕군이 산맥 쪽에서 발생했다는 소문이 있다.”
공녀는 하빈의 말에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공녀가 찾아가는 도플갱어도 산맥에서 발생한 마왕군이었으니 그들이 다시 마왕군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혹시 저번 마왕 때…….”
“아니. 저번 마왕 때 이곳에서 일어났던 온갖 종족이 섞여있는 군단은 아니야. 아마 다크엘프, 숲의 마족인 것 같다. 지금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러 지부에 가는 길이야.”
공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분열의 백성인 도플갱어가 또 마왕군이 되었다면 그들과 적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 나도 같은 생각이다.
- 분열!
오랜만에 분열이 기운을 차린 목소리로 머릿속에 말을 걸었다.
- 이 마을 곳곳에 내 백성들이 있다. 그들의 기운이 내 영혼의 중심을 잡아주어 정신이 조금 드는군.
분열의 말에 공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뒤쪽에 벨로나와 다른 한 명이 급히 몸을 숨기는 것이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훑어본 공녀는 특이하거나 수상한 사람을 볼 수 없었다.
- 사람들밖에 안 보이는데.
- 그들은 한 번 다른 종족의 모습을 띠면 그 종족과 동일해진다. 인간의 모습을 띤 자들은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의 왕인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기운이 있다는 걸 제외하면 말이지.
공녀는 속으로 납득하고 하빈을 돌아보았다.
“저는 이만 숙소로 돌아가 볼게요. 나중에 봐요.”
하빈은 장난스럽게 웃더니 공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래, 나중에 보자. 아참. 아펠한테 연락도 주고 그래라. 걱정한다.”
“아,하지 마요.”
단정했던 머리가 엉망이 되어 살짝 울상을 짓는 공녀를 보며 하빈이 잽싸게 마을 밖으로 향했다. 뒤에서 벨로나의 소리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공녀가 머무는 숙소는 마을이라고 하기엔 크고 도시라고 하기엔 작은 이곳에서 제일 좋은 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그곳 중에서도 제일 좋은 VIP룸을 한 달간 전세 낸 공녀는 방에 온갖 물건들을 사다놓았다.
시간이 많이 남다보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쇼핑하는 것이 취미가 되어버린 공녀는 나중에 제도로 돌아갈 때 이물건들을 한꺼번에 소포로부칠 생각이었다.
개중에는 아펠이나 시밀레를 비롯한 친구나 사용인들에게 줄 선물도 잔뜩 있었다.
도플갱어를 찾고동굴을 확인하는 데에 며칠이 걸릴지 몰랐기에 공녀는 숙소를 무기한 연장했다. 지금 방을 빼기에는 방 안에 물건이 너무 많았다.
아직 점심시간이었기에 지금 출발하면 해가 지기 전에 산 아래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공녀는 마석에 새겨진 지도로 현재 위치와 산 아래 마을의 거리를 재본 뒤 지버트 마을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 눈이 덜 녹아서 길이 험한 걸 상정하면 그냥 걸어가면 이틀정도 걸리겠네.
- 야영 준비를 잊지 말게나.
- 걱정 마. 마력까지 동원하면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면 저녁때 즈음 도착할거 같아. 그리고 야영도 문제 없어.
테르한이 용병이었던 시절 바닥에 망토 하나 깔고 아무데서나 쭈그려서 자던 시절에 비하면공녀의 야영은 사정이 훨씬 나았다. 마력으로 간단한 잠자리를 만드는 일은 지난 몇 년 간 마도공학소에서 자주 해왔던 일이었다.
공학소 뒷마당에서 밤새 실험을 하다가 비몽사몽인 상태로 바람의 마력에 둘러싸여 잠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금은 인원들이 크게 늘어 공녀가 직접 밤새 실험을 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자기 대신 갈려나가는 마도공학소 산하 마석연구소 일원들에게 잠시 묵념한 공녀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공녀는 우선 필수적인 물건을 선별하여 배낭에 집어넣었다.
공녀가등에 메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적당한 크기의 배낭은 공간의 마력이 담겨있는 마석을 도배하다시피 하여 용량을 획기적으로 늘린 매우 값진 물건이었다.
무게는 항상 몸에 마력을 두르고 다니는 공녀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배낭에 식량, 물, 옷가지 몇 개, 예비 신발 등을 챙긴 공녀는 옷장에서 검은색 가죽옷을 꺼내들었다.
황자가 리자드맨 난민들에게 우호의 표시로 받았다며 늪지에 사는 거대한 이족보행 고양잇과 생물의 가죽을 옷으로 가공하여 준 것이었다.
가죽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질기고 부드러워서 어지간한 화살이나 칼은 들지도 않는다고 한다. 과연 가죽옷을 당겨보니 쭈욱 늘어나다가 엄청난탄력으로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범상치 않아보였다.
숲의 마족이 활동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니 일단 제일 튼튼하게 갖춰 입고 산맥에 돌입할 작정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옷이라고 하기엔 가공이 덜 되어서 그야말로 동물 가죽을 뒤집어쓰는 꼴이었다는 것이었다.
크기가 인간보다 조금 큰 이족보행 동물의 가죽이라 그런지 속이 텅 빈 가죽 속에 들어가 앞쪽에 달린 지퍼를 채우고 나니 얼굴만 사람인 동물처럼 보였다.
내친김에 모자처럼 달려있는 동물의 머리 가죽을머리에 뒤집어쓰고 전신거울을 보니 공녀는 완벽한 한 마리의 이족보행 고양이 인간이 되어있었다.
“크앙!”
내친김에 양 손을 얼굴까지 들어 올리며 동물 흉내를 내보았다. 곧 감당하기 힘든 쪽팔림에 얼굴에 피가 몰렸다.
“아, 이건 좀 아닌 거 같다.”
쪽팔림은 둘째 치고 잘못하면 사람들에게 사냥당할 꼴이라 공녀는 모자를 벗었다.
전신거울을 다시 보니 몸에 착 달라붙은 가죽이 공녀의 몸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어 얼굴에 또다시 열이올랐다.
어차피 날도 다소 쌀쌀하고 가죽옷은 부드러워서 불편하지 않았기에 공녀는 그 위에 튼튼하고 사이즈가 넉넉한 바지와 셔츠를 걸쳤다.
다소 무거운 느낌이 있긴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공녀에게 무게는 아무런 페널티가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배낭을 점검한 공녀는 옷장에서 기다란 장화와 모자를 꺼내들었다.
장화는 튼튼한 군화에 마석을 박아 넣어 개조한 물건으로, 발쪽에 바람의 마력을 머금고 유지하기만 해도 걷거나 뛰는 속도가 크게 증가하게 된다.
이 장화에 사용된 마석의 근간이 되는 헤이스트는 발을 이용한 빠르기와 방향 전환 등의 전반적인 움직임을 3할 정도 늘려주는 역할을 하여 널리 쓰이는 마법이었다.
헤이스트에서 방향 전환 등의 움직임에 대한 마력의 소모를 아예 배제해버리고 전진하는 속도에만 모든 것을 집중한 이 장화를 신은 채 공녀처럼 마력을 펑펑 쓰게되면 속도가 3할이 아니라 2배까지도 늘어날 수 있었다.
다만방향을 틀거나 하는 일은 익숙해지지 않으면 상당히 불편했다.
그리고마력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기에 다리에 무리가 오기 쉬워서 반작용을 줄이는 마석도 함께 박아 넣어 안정적인 성능을 내기 위해선 마력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덕분에 이 장화는 마력각성자인 공녀처럼 마력을 잔뜩 쓸 것이 아니면 제 성능이 나오지 않는, 마력을 잡아먹는 물건이 되었다. 공녀는 가끔 이렇게 실패작이 나올 때마다 개조해서 자신 전용의 물건으로 만들곤 하였다.
그래도 마력을 불어넣지 않으면 평범한장화로도 쓸 수 있기에 눈 덮인 험난한 산길에 이만한 신발은 없었다. 짐을 전부 챙긴 공녀는 방문을 잠그고 나와 열쇠를 카운터에 맡겼다.
“일주일이 지나도 제가 오지 않으면, 체노스트라 황궁의 제3귀빈관으로 방 안에 있는 제 물건을 보내주세요.”
공녀는 주인에게 금화를 쥐어주었다. 공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주인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공녀님. 그런데 혹시 위험한 일을 하시려는 건…….”
공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히 생각해보면 마을 주민들의 안위를 살펴보는 일이었고, 하빈의 말에서 마을에 큰 변고가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아뇨. 갔다가 와서 짐을 챙기면 너무 늦어질까 봐 그런 거예요.”
공녀의 말에 주인은 안심의 미소를 지었다.
가장 비싼 VIP 룸을 한 달 넘게 이용해주는데다가 그 유명한 제즈릭 공작가의 공녀였지만 붙임성이 좋고 털털한 소녀가 제법 마음에 든 그는 그녀가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해주었다.
숙소에서 할 일을 마친 공녀는 시장에 들러서 보존식을 잔뜩 사서 배낭에 넣어두었다. 간식도 한아름 사든 공녀는 남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력은 1할 정도만.’
공녀는 발에 바람의 마력을 머금었다. 신발의 성능을 조금만 끌어올렸는데도 공녀의 걸음은 성인남성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걸음과 비슷해졌다.
그녀의 뒤를 따라 급하게 짐을 챙겨 나온 벨로나와 다른 한 사람도 각각 마력과 마법을 이용하여 걷는 속도를 끌어올렸다.
이제 막 해가 남쪽 하늘에 걸렸다. 마을을 빠져나온 공녀는 목적지를 확인했다.
거대한 산맥아래에조그맣게 보이는 마을까지는 나름 닦아놓은 길이 곧게 뻗어있었다. 공녀는 뒤에 따라오는 벨로나를 배려해서 속도를 조금만 높였다.
드넓은 초원과 곳곳에 흐르는 실개천의 풍경이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경치를 감상하며 여유롭게 걸어가는 공녀의 뒤쪽에선벨로나와 정보부 소속 요원이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도무지 몸을 숨길 곳도 없어서 길이 아닌 낮은 개울가를 따라가기로 한 그들은 공녀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숨이 슬슬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희 그냥 공녀님하고 합류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정보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이라고 했던가. 벨로나는 이 초짜만 아니었으면 훨씬 능숙하게 행동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황실에서 직접 내려온 임무인데다가 아무리 호위를 위해서라지만 몰래 따라온다는 걸 알게 되면 아가씨가 화내실 수도 있어요.”
정보부 요원, 키레아는 황실의 명령이라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그저 고귀한 신분에여기저기서 이름을 날리는 아가씨가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몰래 지켜보는 일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았다.
갑자기 변방의 왕국으로 향하는 공녀의최종 목적지를 두고 정보부에서 의견이 오갔지만 결국은 밝혀낼 수 없었다. 아까 공녀와 접촉한 용사 일행 하빈에게 정체를 밝히고 물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공녀가 편하게 길을 걷는 동안 개울을 건너고 강을 건너고 언덕을 넘나들며 고군분투한 벨로나와 키레아는 마침내 산 아래에 있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녀의 목적지는 산이라고 확신한 그들은 슬슬 해가 질 무렵이라 공녀가 산에 오를 리는 없을 거라 생각하며 마을에 들어갔다.
마을은 생각보다 커서 숙소가 여러 개 있었다. 아무래도 산맥에 있는 마을들이나 다른 종족들과 거래를 하는지라 크기가 커진 모양이었다.
공녀가 잡은 숙소의 위치를 파악한 그들은 맞은편에 있는 숙소에 체크인을 한 뒤 저녁을 먹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것을 고려해 그들은 이른 취침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