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제 6 장. 분열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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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이른 아침.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시간에 공녀는 눈을 떴다.
맞은편 숙소에 자리 잡은 벨로나와 다른 한 사람이 일어났을까 생각하며 공녀는 짐을 챙겼다.
분열이 언급한 동굴에는 혼자 가야하겠지만 그 전까지는 그들의 눈에 들어있는 편이 나았다. 자신이 몰래 사라졌다가는 소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벨로나라면 몰라도 다른 한 사람에게 도플갱어 등의 정보가 들어가는 것은 좋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희귀 마석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온 것처럼 행동하면 된다.
여관 1층에서 빵과 음료를 산 공녀는 어제 산 간식 중 남은 것들을 함께 먹으며 거리로 나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그런지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고요했다.
농사를 짓는 시골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을 하러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도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넘쳐났기에 사람 없는 거리는 공녀에게 다소 생소했다.
산으로 향한 길은 어제 들어왔던 마을 입구의 반대편에 있을 거라 생각하며 공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벨로나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공녀는 마음 편히 산행을 준비했다.
추운 산에서 필수적인 손난로 마석을 꺼내든 공녀는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한 후 옷을 단단히 여몄다. 수통을 꺼내 물을 한 모금 마신 공녀는 마을을 나섰다.
눈 덮인 산에서는 자칫하면 미끄러질 수 있었기에 신발에는 마력을 담지 않았다.
빛을 내는 마석이 들어있는 램프를 꺼내든 공녀는 뒤쪽까지 밝아지도록 일부러 빛의 크기를 키워 옆으로 들었다. 벨로나와 키레아는 공녀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한 채 행운에 감사하며 빛을 따라 걸어갔다.
- 그러고 보니 너는 그마을에 가본 적 있어?
- 물론이지. 내가…….
말을 하던 분열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에게서 짙은 향수(鄕愁)를 느낀 공녀는 의아함을 느꼈다. 마치 테르한이 어렸을 때 살던 집을 떠올리는 감각과도 같은 느낌.
- 설마?
- 내가 마왕이 되기 전의 육체는, 그 마을에 살던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으로 의태한 도플갱어였지. 마왕의 낙인이 찍히고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그래도 내 예전 육체가 어디 출신이며, 그곳의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았는지는 기억한다.
분열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 그들은 내게 가족이었다.
- 아…….
이제야 분열이 고집을 부려서 마을로 가보려는 게 이해가 갔다. 자신의 백성이자 가족인 그들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그러면 혈족이 마을에 아직 있을 수도 있겠네?
공녀의 말에 분열은 조용히 웃었다.
- 그대는 도플갱어의 생태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지. 우리는 혈족이랄 것이 따로 없다. 도플갱어들은 태어난다하기 보단, 그래. 생겨난다고 할 수 있지.
- 생겨난다?
- 내가 말했던 동굴은 고대에 이름 모를 신에 의해 생겨난 곳이다. 그곳에서 수년에 한번 꼴로 도플갱어들이 태어나지. 갓 태어난 그들은 영혼이 아주 여리다. 그래서 동굴 근처 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도플갱어가 온 세상의 영혼을 모아 그들을 키워낸다.
- 영혼을 모은다고?
공녀의 머릿속에 낫을 든 사신이 떠올랐다. 분열은 재빨리 부정하였다.
- 영혼을 거두는 것이 아니다. 뭐라 표현해야 이해가 쉬울까. 그래. ‘영혼을 갖출 수 있는 상념’을 모은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 다 자란 도플갱어들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 사랑을 찾아 헤매는 자 등 몰입의 대상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준다. 사라진 이, 죽은 이를 대신하여 상념을 받아내는 것이지.
-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는 거군.
- 그렇다. 연인을 잃은 청년이 똑같은 모습을 한 여인과 다시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는 부모님을 잃은 아이가 정처 없이 떠돌다가 땅속에 묻혔을 부모님과 꼭 닮은 부부에게 입양되는 일 등은 거의 도플갱어가 관여했다고 보면 된다. 수집의 임무를 맡은 도플갱어는 그들의 상념을 수집하여 후대의 도플갱어들의 영혼을 풍부하게 키워내는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책에서 읽어본 적이 있는 공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그건 사회에 혼란을 줄 수도 있겠는데. 죽었던 사람이 살아돌아오는 거랑 비슷하잖아.
- 글쎄. 어차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을 찾는 이들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왕국 사람들은 도플갱어를 받아들였고 그들도 문제없이 적응했다.
분열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조금 웃음기를 띤 말투로 말했다.
- 사실 내가 말한 방법은과거에 주로 그러했다는 것이고, 요즘은 도시에 나와 이야기를 수집하는 방법이 좀 더 인기가 있지. 서사적인 이야기를 대중들이 읽는 것이 하나와 상념을 형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왜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분열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그래도 도플갱어가 미약한 영혼을 가지고 태어나 선배 도플갱어가 가져다준 마음의 양식을 먹고 자란다는 것까지는 이해했다.
분열이 다시 조용해졌다. 공녀가 말을 걸어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이곳에 와서 기운이 난다고는 했지만 사실 많이 힘든 모양이었다. 공녀는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산 위쪽으로 해가 떠올랐다.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기에 그림자가 지는 곳이 없어서 공녀는 램프를 끄고 배낭에 집어넣었다.
도중에 갈림길이 몇 번 나왔지만표지판이 세워져있어 길을 헤매지는 않았다.
“후우.”
쉼 없이 걷다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벌레도 산짐승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적당한 바위를 찾아 바람의 마력으로 눈을 날려버리고 불의 마력을 방석처럼 얇게 깔아서 데운 공녀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녀가 생각하기에 현재 신체 능력은 전성기 테르한의 2할에 육박했다.
애초에 테르한의 육체가 인간이라기 보단 골렘에 가깝다는 것을 감안하면 현재 공녀는 어지간히 단련된 사람들보다 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에 미끄러지지 않게, 그리고 빠르게 산길을 주파하는 것은 공녀에게도 제법 고된 일이었다.
특히 저 아래서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숨을 돌리는 벨로나 일행은 죽을 맛일 것이었다.
원래는 마력을 펑펑 쓰면서 올라갈 계획이었지만 벨로나나 숲의 마족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신중한 산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길이 제대로 나있어서 도중에 빙 돌아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눈을 살짝 치워보니 짐수레가 지나갈 정도의 흙길이 나있었다.
물을 마시고 초콜릿 간식을 먹은 공녀는 기운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뒤 출발했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산은 높았지만 가파르지는 않았기에 응달이 지는 곳이 별로 없어 산바람이 아주 차갑지는 않았다. 공녀는 몸에 열이 올라 손난로 마석을 꺼트렸다.
넓은 바위를 발견한 공녀는 점심을 먹기 위해 배낭에서 음식들을 꺼냈다.
휴대용 용기에 담겨있는 스프를 불의 마력으로 데우고 얼음의 마석을 붙여놓아 냉동시킨 훈제 고기를 해동한 뒤 빵과 함께 먹으려던 순간, 공녀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숲의 마족?’
창백한 연보랏빛 피부에 긴 귀, 새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누군가가 멀찍이서 공녀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력을 각성한 뒤 오감이 예민해진 공녀의 눈에도 간신히 들어올 정도로 멀리 있었고, 그마저도 고개를 낮추어 숨어있어서 얼굴만 간신히 보이는 정도였다.
공녀는 조용히 허리춤의 단검에 손을 가져갔다.
멀리서 활을 쏘기라도 할까봐 품에 있던 배리어의 마석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갑자기 숲의 마족이 벌떡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공녀는 경계하며 몸을 일으켰다. 저쪽도 공녀가 자신을 본 것을 알아차렸는지 두 손을 번쩍 들어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음을 어필했다.
“아가씨!”
뒤쪽에서 따라오던 벨로나가 바람의 마력을 온몸에 두르고 달려왔다. 정보부 요원은 몸을 숨긴 모양이었다.
“어서와, 벨로나.”
공녀는 침착하게 인사하며 단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상대방이 싸울 의사가 없어보였고, 벨로나가 온 이상 자신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알고 계셨나요?”
“그럼. 지난 3주간 계속 호위해줬잖아.”
벨로나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허리춤에 달려있는 세검의 폼멜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이 상태로 적이 10미터 이내에서 화살을 날린다 해도 검을 뽑아 쳐낼 수 있었기에 굳이 지금 검을 뽑아들지는 않았다.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숲의 마족이 다가왔다. 외관상으로는 공녀보다도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엘프에서 갈라져 나온 종족이라 그런지 소녀는 오밀조밀하고 아름다운 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피곤하고 지쳐 보여 그 아름다움이 반감되고 있었다.
“부탁. 음식. 도움.”
어설픈 제국어와 함께 허리를 깊숙이 숙이는 소녀의 등에서 조그마한 활을 발견한 벨로나는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공녀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이곳은 당신들의 영역이 아니지?]
공녀는 능숙하게 다크엘프의 언어를 구사했다. 공녀는 파멸의 군세에 합류하지 않은 마족들을 포섭할 요량으로 지식욕이 왕성한 분열의 도움을 받아 대륙 각지의 언어를 익혔다.
숲의 마족-다크엘프의 경우 이곳 산맥의 근간이 되는 에팔레니아 산맥의 큰 줄기에 있는 세계수 근처에 산다.
엘프의 아종이기도 해서 그런지 마족으로 변한 후에도 엘프와 종종 교류를 한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언어는 엘프어와 이쪽 방언이 다소 섞인 언어였기에 엘프어가 능숙한 공녀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었다.
공녀가 자신들의 언어를 구사하자 놀란 눈이 된 다크엘프 소녀는 이내 매달리듯 말했다.
[우리종족의 말을 하실 줄 아시는군요. 부탁드립니다. 저희 마을 사람들 중 일부가 이상해져서 멀쩡한 이들을 데리고 마을을 나왔는데 식량이 다 떨어져서……. 조금만이라도 좋으니까 식량을 나누어받을 수 있을까요?]
공녀는 소녀의 말에 대한 진위여부를 판별해보았다.
하빈이 말했던 숲의 마족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 소녀의 초췌한 모습. 그들이 사는 곳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까지 다른 이유로 왔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도 아니고, 전략적으로 중요하거나 한 곳은 레인저 지부 정도밖에 없었다.
[당신은 마족이 아닌가요?]
공녀의 직접적인 질문에 소녀는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고귀하신 분이시여. 말씀하신‘마족’은 마왕의 휘하에 들어간 이들 아닙니까. 지금 저희의 마을에 남아있는 자들은 조금 그런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저와 함께 마을을 나온 이들은 평범한 다크엘프입니다.]
공녀는 소녀의 설명에 약간의 간극을 느꼈다. 공녀는 마왕에게 당한 종족이 타락하여 마족이 된다고 배웠다. 하플링이나 사막왕국의 후예들처럼 그곳에서 탈출한 일부만이 마족이 되지 않고 살아남아 종족의 뒤를 잇는 것이었다.
다크엘프는 종족 전체가 숲의 마족이 되었다고 알고 있는 공녀는 소녀의 설명에 혼란을 느꼈다. 소녀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마족은 마왕군에 들어간 이들만을 마족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다크엘프는 지금까지는 마족이 아닌 평범한 종족이었다는 말이었다.
어쩌면 다섯 번째 마왕에 의해 몰락한 숲의 마족들은 이제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인간들이 다크엘프들을 전부 숲의 마족이라 부르며 접촉을 피해왔기에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딱히 이상할 것도없었다.
어디서부터 이런 오해가 생겼을지 생각하며 공녀는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저를 보고 고귀하다고 한 이유가 뭔가요?]
소녀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공녀를 보았다.
옆에서 벨로나가 검을 검집에서 반쯤 빼고 있었기에 소녀는 다급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왕의 기운’을 띠고 계셔서 그만…….]
소녀가 사과하는 이유는 잘 몰랐지만 공녀는 처음 듣는 단어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단어에 반응한 것은 분열이었다.
- 오랜만에 듣는군. 왕의 기운이라. 그래. 나는 이 단어가 더 마음에 든다.
- 더 마음에 든다는 말은 다른 표현도 있다는 거야?
- 그렇다. 저 아이는 자신이 마족이 아니라고 했지만 인간보다는 마족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지. 그리고 그들이 왕으로 모시는 이가 띠는 기운이다. 여기까지 설명했으면 그대는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겠지?
공녀는 분열의 말을 곱씹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 설마, 마왕의 낙인?
- 어허. 왕의 기운이라 불러라. 그래. 인간들의 기감으로는 나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지만 저 소녀는 보다 뛰어난 감각을 지녔군. 그대 안에 숨어있는 나를 본 모양이다.
이제야 공녀는 소녀가 사과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마족을 적대하는 인간에게 ‘너 마왕이지’라고 간접적으로 말한 꼴이었다.
공녀는 이제 와서 자신에게 마왕의 낙인이 새겨졌는지 고민했지만 분열은 아니라고 대답해주었다.
- 인간들이 말하는 마왕의 낙인은 마왕이 그 몸으로 강림할거라는 표시이지. 나는 이미 그대들과 영혼이 동화되었으니 낙인은 없다. 그렇군. 다시 생각해보니 마왕의 낙인과 왕의 기운이 동일하지는 않다. 굳이 말하자면 마왕의 낙인이 찍힌 자는 왕의 기운을 띨 수밖에 없지만 왕의 기운, 즉 마왕을 몸에 품고 있다고 해서 낙인이 있으리란 법은 없다. 이 몸이 그러하지.
- 마왕의 낙인은 앞으로 마왕이 강림할 육체에, 왕의 기운은 마왕이 있는 영혼에 새겨지는 거라고 보면 되겠네.
- 정확하다.
분열이 말을 마치자 공녀는 다크엘프 소녀를 보았다. 원래 추위에는 익숙했겠지만 오래 굶주려서 몸이 약해졌는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저들에게 빚을 지워놓으면 파멸의 군세와 싸울 때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 각 종족들의 언어를 배워놓았던 것이었으니 마침 좋은기회라고 생각했다.
[내 이름은 아리에.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소녀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시트리아라고 합니다.]
다크엘프 부족을 이끄는 소녀, 시트리아와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