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제 6 장. 분열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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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는 배낭에서 음식들을꺼냈다.
혹시 몰라 보존식을 잔뜩 가져왔던 공녀는 배낭에 들어가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보존식의 양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시트리아에게 일부를 건넸다.
[이건 한 줌만 물에 타서 끓이면 몇 명이 먹을 수 있는 국물요리가 되고, 이건 조금만 먹어도 기운이 나는 음식이에요. 배고픔을 해결하기는 힘들겠지만 두 조각만 먹어도 하루에 몸에 필요한 에너지는 충분히 챙길 수 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인간들의 예절을 어떻게 배웠는지 허리를 굽실대는 시트리아를 보며 공녀는 남은 음식들을 배낭에 도로 집어넣었다.
[저도 이 이상을 드리기는힘들어요. 지금부터 산에서 며칠을 보내야 할지 몰라서.]
[아닙니다. 이 정도만 해도 저희가 며칠은 버틸 수 있을 있을 거 같아요.]
공녀는 시트리아의 말에 다소 의문이 생겼다.
공녀가 지금 준 음식은 딱 필요한 최소의 양만 먹으면 혼자서 거의 반년은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음식을 가지고 나올 여유도 없이 마을을 급하게 나왔다는 건 이해하지만 겨울이 끝난 지금은 사냥할 것이 아예 없지도 않을 것이다. 숲에서 사는 다크엘프들이 사냥을 못할 리는 없었다.
시트리아가 식량의 양을 가늠하지 못하거나 충당을 고려하지 않을 정도의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크게 두 가지 추론이 가능했다. 사냥이 가능한 인원이 적거나, 소규모의 사냥으로 감당이 안될 만큼 인원이 많거나.
[혹시 지금 머무는 곳은 이곳에서 먼가요?]
두 가지 전부의 경우를 상정하고 다크엘프들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공녀에게 도움을 받은지라 경계심이 풀어진 시트리아는 산길에 대해 설명하기 힘든지 그다지 멀지 않다는 말만 했다.
[음. 그렇다면 이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으려나?]
공녀는 근방의 지도를 새겨 넣은 마석을 꺼냈다. 빛의 마력이 흐르자 마석이 작게 빛나며 허공에 지도를 그려내었다.
“와.”
조금 떨어져서사주경계를 하던 벨로나가 공녀의 지도마석을 보고 감탄했다. 시트리아도 꽤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한참이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목적지인 지버트 마을에서 멀지 않은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 근처……. 여기 큰 마을이 있어서 식량을 얻으러 갔지만 조금밖에 얻지 못했어요.]
시트리아는 손가락을 옮겨 지버트 마을을 가리켰다. 다행히 마을과 마찰을 빚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마을도 동절기를 보내느라 식량 사정이 좋지 못했을 텐데 조금이나마 식량을 지원해준 것을 보니 다크엘프를 배척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도플갱어들이랑 어울려 사는 마을이니 인간이 아닌 다크엘프들에게도 친절한 것일까.
[다크엘프 인원은 어느 정도나 되나요? 인원이 많다면 식량을 따로 구해야 할 것 같은데.]
시트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방금 만난 인간에게 자신들의 규모를 말해도 될지에 대한 일말의 경계심과 공녀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 같은 마음의 빚보다는 동포들의 생존이 더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린 시트리아가 말했다.
[150명이 조금 넘어요.]
“맙소사.”
예상을 훨씬 웃도는 인원에 공녀는 살짝 이마를 짚었다. 공녀가 방금 준 식량으로는 며칠이 아니라 하루 이틀 정도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마을을 나온 지는 얼마나 되었죠? 그리고 다크엘프가 사는 곳은 여기서 꽤 멀지 않나요?]
[열흘정도 되었어요. 사실 아까는 마을 사람들 중 일부가 이상해졌다고 했지만, 저희가 원래 살던 곳에 마의 기운이 짙어져서 그런 것이었어요. 그나마 멀쩡한 인원들을 추려서 마의 기운이 적은 곳으로 도망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마의 기운이라면 공녀도 겪어본 적이 있었다.
늪의 마족과의 전장에 연구차원으로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하는 기분 나쁜 기운을 마의 기운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마왕의 지배력을 구체화시킨 기운이며 파멸이 가진 마의 기운이 퍼지면 마법의 사용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아직 현세에 강림하지도 않은 주제에 마의 기운을 여기저기 퍼트리고 다니다니. 파멸이 단단히 작심한 모양이었다.
‘마의 기운은 마족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공녀는 일단 의문을 접고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쪽의 요원님. 잠깐 여기로 와주세요.”
나무 뒤에서 숨어있던 키레아가 허리를 펴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이쪽으로 달려왔다. 시트리아도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표정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정보부의 키레아입니다. 이미 알고 계셨네요, 공녀님.”
“그럼요. 일단 이야기는 대충 아시죠? 지금 당장 식량을 구해야 할 것같은데, 연락용 마석 갖고 있으시죠? 아무한테 연락해도 좋으니까 저기 산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은 잘 모르겠네. 그쪽으로 식량을 모아서 지버트 마을이라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해주세요. 최대한 빠르고 많이. 돈은 제 이름으로 마도공학소나 황실이나 마탑에 달아두시고.”
키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을 뒤져 연락용 마석을 꺼내들었다. 그녀를 향해 공녀는 말을 덧붙였다.
“아참. 식량 남는 것 있으면 좀 주세요.”
키레아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공주’님?]
엘프나 다크엘프 언어로 공녀라는 말이 따로 없었기에 공녀는 갑작스러운 신분 상승을 맞았다.
벨로나와 키레아가 공녀를 호칭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에 흥미를 느낀 시트리아에게 공녀라는 직함에 대해 설명하자 그녀는 그것을 조금 오해해버린 것이었다.
공녀와 공주의 차이를 설명하기도 귀찮고 당장 시간이 급한지라 공녀는 딴죽을 걸지 않았다.
[일단 제가 준 식량을 갖고 돌아가서 여러분들의 허기를 달래고, 지버트 마을 인근으로 오세요. 어떻게든 사흘 내로 식량을 구해놓을 테니.]
[정말 몇 번을 감사드려야 할지…….]
시트리아가 허리를 못 펴고 있자 공녀는 친히 그녀를 일으켜주었다. 공녀는 점심에 먹으려던 음식과 기운이나는 초콜릿까지 시트리아에게 주었다.
그것까지 들고 돌아가려는 그녀를 말리며 음식을 운반하는 게 만만치 않을 거라는 것을 상기시키자 시트리아는 마지못해 식사를 했다.
식사를 급하게 마친 시트리아는 다시 한 번 공녀에게 허리를 숙인 다음 식량을 한아름 들고 빠른 속도로 숲속으로 사라졌다.
“아가씨는 너무 사람이 좋아서 문제에요.”
벨로나의 말에 공녀는 웃었다.
“이게 다 투자야. 무시무시한 마왕에 맞서 싸우려면 일손이 하나라도 많은 게 좋지.”
공녀의 말을 쑥스러움을 감추려는 것으로 생각한 벨로나는 수긍은 했지만 이해는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 마족 취급받던 다크엘프 150명으로는 마왕의 군세를 막아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나중에 보면 알겠지. 아참. 키레아 요원님. 식량 수급 이야기는 잘 되었나요?”
호명된 키레아는 상관에게 부름 받은 것처럼 공녀 앞에서 차렷 자세로 서서 대답했다.
“네. 문제없이 이야기가 전달되었고 사흘 이내로 대규모 식량 수송이 있을 예정입니다.”
“좋아요. 그러면 우리도 식사나 할까요?”
“아. 예!”
키레아는 가방에서 돗자리를 꺼냈다. 저런 걸 넣고 다닐 여유가 있나 생각하던 공녀는 낙엽을모아 그 위에 깐 돗자리에 앉아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바위에 앉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다음번에 마을에 들르면 꼭 돗자리를 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친 그들은 함께 출발했다.
시트리아와 만났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산에서는 해가 금방 떨어지고, 산속 마을에 밤중에 진입하는 것은 서로에게 불편할 수도 있었기에 해가 떠있는 중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시간이 애매하네. 밖에서 야영할까?”
공녀의 말에 벨로나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아가씨께서 야영이라니.”
벨로나가 호위로 붙기 전에는 잘만 했었는데 하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열 두, 세 살짜리 여자아이가 혼자 야영을 하는 것은 조금 위험하긴 했다. 물론 그때도 호위는 붙어있었으니 문제는 없었지만.
“그럼 속도를 높여도 되겠네?”
사실 공녀가 의도한 것은 이것이었다.
벨로나와 키레아와 함께 가면 도플갱어의 동굴에 대해 묻기가 어려워진다. 마력과 신발의 힘을 빌려 가장 먼저 마을에 도착한 다음 잠깐 수소문을 한 뒤 숙소를 구한다는 계획을 세운 공녀는 주변의 마력을 끌어 모았다.
“먼저 가서 숙소 잡아놓을게!”
공녀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한걸음에 십여 미터를 박차며 신발의 전진 기능을 한껏 끌어올렸다. 산길이라 조금만 가도 커브가 나왔지만 모든 것을 무시하고 아예 나무 사이로 뛰어들었다.
목적지인 마을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아, 아가씨!”
“공녀님!”
뒤에서들려오는 벨로나와 키레아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한참을 내달리던공녀는 도중에 절벽 같은 게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잠시 큰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저 멀리 시트리아가 열심히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을 보니큰 동굴근처에 다크엘프들이 보였다. 하얀 옷과 하얀 머리를 해서 눈이 덜 녹은 지형에서는거의 완벽에 가까운 위장을 하고 있었다.
만일 저들 중 마족으로 변한 자들을 상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녀는 잠깐 생각을 하다 몸을 날려 지버트 마을로 향했다.
지버트마을은 산속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을 치고는 규모가 제법 컸다.
인근에 농작이 가능한 평탄한 고랭지가 넓게 분포하고 있고 사냥하기 쉬운 야생동물들이 많아 자체적으로도 식량 수급이 가능한 곳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레인저지부가 있어서 레인저들이 술을 마시기 위해 가끔 오곤 하는 곳이다. 또한 이곳에서만 나는 희귀한마석이 가끔 발견되기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생각보다 큰 규모의마을 입구에서 공녀는 경비병에게 신분증을 내밀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공녀를 보고 겁에 질렸던 경비병은 그녀의 신분을 안 뒤 아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할 기세로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제, 제국의 공녀님, 이십니까? 제도 마도공학소 수석연구원, 용사마왕연구소 선임연구원, 마탑 2종 자격증, 제국 기사단 양성소 명예 교관…….”
공녀의 신분증에 적혀있는 직함을 읽어 내려가던 경비병은 괴물을 보는 눈으로 공녀를 보았다가 급히 눈을 깔았다.
제국은 평민들의 생활수준이 높고 직업에도 계급의 제한이 거의 없어 생각보다 계급에 까다롭지 않았지만 이곳 왕국에서는 귀족의 지위가 쓸데없이 높았다.
제후국의 왕과 맞먹는다는 제국 공작의 딸이니 그에게는 갑자기 외국의 공주님이 별 볼일 없는 마을에 방문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네. 그곳에 적혀있는 거 전부 저예요. 이제 마을에 들어가도 되죠?”
경비병은 일단 공녀를 마을로 모셨다. 소식을 들은 경비대장은 순찰을 돌다 말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콧수염을 깔끔하게 기른 그는 공녀에게 경례를 했다.
“영광스러운 체노스트라 제국의 고귀하신 제즈릭 공녀님. 이런 변방에는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안녕하세요. 이곳에 희귀한마석이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어요.”
“아, 마석 말씀이시군요. 제가 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입구 근처의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던 공녀에게 분열이 말을 걸었다.
- 저자, 도플갱어다.
- 응? 누구? 경비대장?
- 그래. 콧수염을 기른 인간형 도플갱어 말이다.
벌써 도플갱어와 마주치다니. 역시 도플갱어들과 어울려 사는 마을다웠다.
- 바로 도플갱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경계하겠지?
- 그렇겠지. 일단 도플갱어 중 이야기나 책을 모으는 자가 있을 것이다. 넌지시 물어봐라.
- 알았어.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은 느낌에 공녀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경비대 건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