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제 6 장. 분열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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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들어온 벨로나와 키레아는 한참이나 경비대장에게 붙들려있었다. 혹여나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봐 안절부절 못하던 벨로나는 참다못해 경비대장에게 숨겨두었던 자신의 기사단원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제국 기사단의 벨로나 크로이체 입니다. 현재 요인 경호중이니 빨리 아가씨, 아니, 공녀님에게 저희를 안내해주시죠.”
벨로나의 기사단원증을 보고도 경비대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공녀님께서 현재 촌장님과 긴밀히 이야기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기사님.”
아직 공녀와 촌장이 성역에서 나왔다는 전갈이 없었기에 경비대장은 시간을 더 끌어야 했다. 다행히 그는 다소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마을에서 지켜야하는 규칙과 무기를 갖고 들어오면 안 되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의 전문분야였다.
벨로나가 폭발하기 직전, 경비병 한 명이 들어와 경비대장에게 귓속말을 했다. 내심 긴장하고 있던 경비대장은 얼굴을 풀고 벨로나와 키레아의 마을 체제를 허락했다.
“정말 무슨 일일까요. 이렇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은 상당히 수상하네요.”
“당장 아가씨를 찾아야 합니……다?”
벨로나는 문을 나서자마자 그 앞에 있는 공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둘에게 인사했다.
“어서와. 어서 오세요. 숙소를 미리 잡아놨어. 얼른 가자.”
그녀답지 않게 벨로나에게 팔짱을 끼며 재촉하는 공녀를 잠시 미심쩍은 눈으로 보던 벨로나는 자신이 그런 눈길을 아가씨에게 주었다는 사실에 자책하며 공녀에게 끌려갔다.
키레아는 어깨를 으쓱하곤 그녀들을 따라갔다.
마을에서 가장 좋은 숙소의 가장 좋은 방을 잡은 공녀는 2인실이면 족하다는 벨로나와 키레아에게 굳이 1인실 두 개를 잡아주었다. 공녀가 이 마을에서 할 일은 사실상 끝났으므로, 관광 온 기분으로 며칠 체류하다가 돌아갈 예정이었다.
시트리아와 다크엘프가 마을에 정착할 수 있도록 촌장이나 마을사람들과 협상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분열의거취에 대해 논의하여야 했다.
현재 분열은 촌장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도플갱어들과 어울려 사는 곳이라서 그런지 갑자기 아이가 생긴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현재 새로운 도플갱어들이 탄생하지 못하는 와중에 갑자기 생겨난 이야기꾼인데다, 그녀의 정체가 마왕 분열이라는 것은 밝히기에는 곤란한 일이었다.
그래서 분열은 마을을 돌아다니거나 공녀와 함께하는 대신 촌장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아무리 마왕이라 해도 현재 분열은 인간 어린아이 같은 육체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보호해주어야 했다.
다만 분열은 공녀를 모델로 하여 의태를 하였고, 수년간 영혼을 공유한 덕분에 그녀의 능력들을 대부분 쓸 수 있었다. 심지어는 마력각성자라는 특성마저 똑같이 따라할 수 있었다.
분열은 기쁜 오산이라며 능숙하게 대기 중의 마력을 흡수하며 성장했다.
한창 식사를 하는 분열을 두고 벨로나와 키레아를 숙소에 집어넣고 자신도 방에 들어간 공녀는 서둘러 분열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 밖으로 나갔다간 벨로나나 키레아를 달고 갈 수밖에 없을 테니 일단 통신을 시도해보았다. 머릿속으로 머리카락이 붉은 어린 시절의 공녀를 떠올리며 분열과 대화하던 요령으로 단어를 그려내었다.
- 분열? 들려?
잠시 대답이 없어 다시 한 번 말을 걸까 생각하고 있자니 분열이 대꾸했다.
- 지금 식사중이니까 나중에.
- 아직도 먹는구나. 마을 식량사정이 좋지 못한 거 같으니까 너무 폐 끼치지 말고.
- 나도 알아. 네가 엄마 노릇 할 필요는 없어.
- 엄……. 아 진짜!
공녀는 신경질적으로 분열과의 통신을 끊었다. 잠시 후 분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 농담이야.
- 어휴. 내가 무슨 말을 못해. 그런데 그러고 보니 너 말투가 좀 바뀐 거 같은데?
지금의 분열은 자신을 부를 때 항상 ‘그대’라고 하거나 어른스런 말투를 하던 예전의 분열과는 조금 거리감이 있었다.
- 너의 모습으로 의태를 해서 그런지 네 말투를 따라하게 되네. 그래도 너랑 이야기할 때 아니면 제대로 말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 지금 그 말, 내가 말투가 이상하다고 하고 싶은 거야?
- 아니. 너는 너답게 잘하고 있어. 당당하고 예의바르게, 때론 장난스럽게 사람들을 휘어잡는 매력이 있지. 하지만 나는 이곳의 왕이니 진중하고 무겁게 가야 하는 거야.
공녀는 분열의 말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누구나 대하는 사람에 따라 말투나 행동이 바뀌기 마련이다.
- 무엇보다, 내가 너의 안에 있을 때는 말투라도 과거의 것을 쓰지 않으면 나를 유지하기 힘들 것 같았어. 그것을 하나의 지표로 삼아 내 자아를 유지하고 결국 분리해낼 수 있었지.
분열의 말에 공녀는 문득 5년 전부터 지금까지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일이 떠올랐다. 분열의 말대로라면, 어쩌면 자신도 가능하지 않을까.
- 나, 테르한과 아리에의 영혼은 분리가 가능할까?
잠시간 분열은 대답하지 않았다. 실현 가능성을 가늠하는 것일까. 말을 고르는 것일까.
영혼이 섞여있을 때는 분열이 말을 하기도 전에 대략적인 뉘앙스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분열은 머릿속으로 대화만 할 수 있었지, 사실상 남남인데다 얼굴을 마주보고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보니 어떤 대답이 나올지 더욱 알 수 없었다.
공녀가 조바심을 낼 무렵 분열이 말하기 시작했다.
- 음.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은 무리야. 아리에의 영혼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그만큼 테르한의 영혼에 많이 의지하고 있어. 지금 분리하면 둘 다 위태로울 수 있어. 게다가 내가 분열의 마왕이라 영혼의 분리가 가능했던 것이지. 나조차도 타인의 영혼 둘을 분리해내는 방법은 아직 알지 못해.
불가능하다는 분열의 말에도 공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당장영혼의 분리가 가능하고 했다면 오히려 놀랐을 것이다. 게다가 분열의 마지막 말이 의미하는 바가 의미심장했다.
- 아직. 이라고 했지.
분열이 잠깐 미소를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감정이 직접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5년 간 그들이 공유한 것들은 작지 않았다.
- 네가 마석과 마력에 대해 연구할 동안 나는 영혼에 대해 연구를 해왔어. 지금은 내 영혼에만 적용되는 비술들이 언젠가 테르한의 영혼을 위해 쓰일 날이 오겠지.
공녀는 말없이 가슴을 꾹 눌렀다.
금껏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개발하는 것은 항상 자신의 역할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잠시 휩싸였던 공녀는 웃음을 띤 말투로 대답했다.
- 그래. 기대할게.
- 으음. 너무 기대하지는 마.
언제나 자기확신에 차있는 분열의 자신감 없는모습은 생소해서 공녀는 웃어야할지 내용에 울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화가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자 공녀는 갑자기 분열이 도플갱어에 들어가기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의문은 해소되었으나 마지막으로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남아있어 넌지시 분열을 떠보았다.
- 그런데 네가 아까했던 '일방적인 이야기' 중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는데 말이야.
- 아. 그래. 언제 질문하나 했어.
분열은 대답을 준비했고 공녀는 질문했다.
- 네가 몸을 포기하면 내 원래 몸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말.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이 몸에 대한 이야기는 아닌거 같거든.
- 물론이지. '원래' 몸이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 테르한의 육체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거야? 네 영혼이 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데 왜 그쪽이 영향을 받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리에의 육체에 있던 분열의 영혼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데 뜬금없이 저 멀리 마도공학소 한구석에 처박혀있는 테르한의 육체가 영향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 음. 말로 하자니까 복잡하네. 그냥 직접 제도로 돌아가서 한 번 자세히 봐봐. 그때 다시 말을 걸어줘. 너무 화내지는 말고.
분열의 말에 공녀는 조금 불안해졌다.
- 어. 내가 화내야 하는 일이야?
- 글쎄. 보기에 따라서는?
불안감이 커졌다. 공녀는 원래 며칠 간 이곳에 체류할 예정이었지만 다크엘프들의 일을 처리한 뒤 바로 돌아가서 테르한의 몸을 확인해보아겠다고 다짐했다.
- 이상한 일이 아니길 바라. 갑자기 죽어있는 건 아니겠지?
- 그 육체는 대놓고 창으로 찔러도 안 죽어. 목숨에 대해서는 걱정 마.
살아있기만 하면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이미 골렘과 호문클로스가 섞여있는 육체가 이상해져봤자 얼마나 이상해질까.
테르한의 몸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본 뒤 공녀는 다음이야기로 넘어갔다.
공녀가 빨리 제도로 돌아갈 생각이었기에 분열도 기꺼이 이야기에 어울려주었다.
- 마석은?
- 일단 성역에 있던 것들은 전부 받아왔어. 마을에 있는 1,2번 째 영혼 없는 세대가 남긴 유산은 거래를 해봐야지.
- 내 백성들의 유산이라 생각하니조금 찜찜하지만, 파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내가 말한 것이니 별 수 없군.
그들의 왕인 분열이 납득했으니 마석 거래에 대한 이야기는 문제 없이 진행될 것이다.
- 다크엘프에 관한 이야기는 어떤 분위기야? 촌장이나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거 들어봤어?
공녀는 성역에서 나온 뒤 바로 벨로나와 키레아를 데리러 온 뒤 곧장 숙소에 들어와 있는 상태라 다크엘프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쪽에 있는 분열을 정보원으로 쓰기로 했다.
- 그렇지 않아도 마을 유지들과 대화중이야. 나도 일단 참석하긴 했는데 그들 중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모르는 자도 있더군. 보통 인간이라서 그렇겠지.
마을에 대한 중대한 사안을 토의하는 데 5살짜리 꼬맹이를 상석에 앉히는 일은 장난으로도 하지 않는다. 물론 분열은 그들의 왕이었으며 겉보기와는 다르게 짐작조차 어려운 세월을 보내왔지만 결국 인간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현혹되는 법이다.
- 내가 가서 도와줄 거 없어?
- 괜찮아. 일단 너는 왕을 데려오긴 했지만 외부인이니 오히려지금 끼어들면 마을사람들이 납득하기 힘들어 할 걸. 대략 다크엘프들을 받아들이는 대신 지원을 받는 쪽으로 윤곽이 잡혔으니 오늘 이야기가 끝나고 내일 그것에 대해 말해주면 돼.
- 알았어. 애초에 식량 문제는 이미 이곳으로 식량이 오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면 되겠지. 다크엘프들이 살 곳은 있대?
- 응. 저번 전쟁 때문에 비어있는 집들이 좀 있대. 집을 합숙소 개념으로 쓰면 충분히 수용 가능할 정도?
공녀는 분열의 말에 놀라면서동시에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 분명히 마을사람 중 일부만 전쟁에 참여해서 피해가 다소 있었다고 했는데 수가 제법 많았나봐?
- 이 마을은 작지 않으니까. 그리고 도플갱어들끼리는 혈연이랄 게 딱히 없고, 사람들의 관계도 이웃 정도로 생각하니까. 음. 네 동기들이 전쟁에 나가서 전사했다고 생각하면 어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어?
- 음. 그정도 까지는 아니야. 슬프긴 하겠지만 그게 기사의 역할이니 어쩔 수 없지.
- 비슷하다고 보면 돼. 저번 전쟁은 도플갱어들의 '원죄'를 다스리기 위해 내가 강림해서 벌어진 것이니까. 기사들이 전쟁터에 나가듯 이들도 전쟁터에 나갔지. 그나마 마을이 통째로 휩쓸리지는 않아서 촌장이 다소 피해만 있었다는 식으로 표현한 거야. 실제로는 마을 곳곳에 비어있는 곳이 제법 돼. 가뜩이나 새로운 아이들이 탄생하지 않으니 빈자리가 커져가고 있어.
- 다크엘프들의합류가 마을에 활기를 가져다줄 수도 있겠네.
- 그렇겠지. 게다가 마기에 침식당하지 않은 이들이니 대부분 젊고 활력이 있고 노동이 가능한 자들이겠지. 시트리아가 그들의 대표인 것 같던데, 그녀는 마찰을 일으킬 성격이 아니니 다행이지. 마을에 있어서는 당장의 식량 문제만 해결되면 상당히 괜찮은 이야기야.
- 그 당장의 식량 문제도 사흘 뒤면 해결이 되니, 그 뒤로는 적당한 원조를 해주기만 하면 되겠네.
- 그렇지. 그리고...
- 응?
- 졸려.
분열의 말투가 투정부리는 아이 같다고 생각하며 공녀는 살짝 웃었다.
- 그래. 어서 자. 빨리 자야 빨리 크지.
- 알았어, 엄마.
- 아 진짜!
공녀와 분열은 머릿속으로 투닥대며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