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제 7 장. 태동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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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즈릭 공작령 남쪽의 중소도시 갈란드는 몇 년간 전쟁특수를 누리고 있었다.
갈란드에서 말을 타면 반나절 정도 걸리는 갈레이시아 대늪지에서 벌써 5년째 마족들과의 전투가 지속되고 있었고, 적의 세력이 제국군에 비해 볼품없어 다수의 병사들이 교대로 갈란드에서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전쟁에 직접 동원된 군단의 수는 적었지만 비상시를 대비한 예비 병력은 제법 되어서 그들이 도시에 뿌리는 돈은 상당했다. 특히 술집은 저녁이 되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비기 일쑤였다.
그렇게 술집에서 술을 퍼마시던 예비병들이 긴급소집령에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모여들었다. 그 모습을 본 장교는 한숨을 푹 내쉬며상대적으로 멀쩡한 이들을 앞으로 불러냈다.
“장교님. 무슨 일 있슴까.”
제법 나이가 많은 병사의 말에 병사들은 일제히 장교를 쳐다보았다. 장교는 잠시 고민하더니 어차피 밝혀질 일이라 미리 알려두기로 했다.
“레노아 장군이 사령관으로 있던 늪지전선의 병력들이 이곳까지 후퇴한다고 한다.”
“후퇴라고예? 개선식이 아니라?”
놀라서 저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나온 병사를 필두로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웅성이던 병사들은 장교가 목을 가다듬자 자세를 바로 했다.
“며칠 전 대승을 거두었는데, 그 이후 갑자기 엄청 센 녀석들이 튀어나온 모양이야. 늪지 근처에서는 상대하기 힘들어서 전선을 물린다고 하더군. 조금 있으면 상황을 설명하러 현장에 있던 사람이 온다. 다들 정신 차리고 설명을 듣도록 하자.”
장교의 말에 병사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예비병 사단에는 신병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뜻 보면 나사가 빠져 보이는 이들도 적게는 수년에서 많게는 십 수 년을 군대에 몸을 담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군말 없이 차렷 자세로 대기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젊은 청년을 필두로 몇몇 높은 분들이 소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청년은 한쪽 팔에 붕대를 하고 있었다.
일부 병사들은 그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분위기를 읽은 다른 병사들도 침묵을 유지했다.
청년은 그들을 보고 피식 웃었다.
“술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는군. 다들 딱딱하게 있을 필요는 없소.”
병사들은 표정을 푸는 대신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청년의 뒤이어 들어온 레노아 장군이 청년의 뒤에 시립했고, 자연스레 그의 정체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황자전하께-”
지나치게 당황한 초임장교 대신 대표병사가 경례의구호를 외치던 차에 황자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되었소. 상황이 급박하니 쓸데없는 절차 같은 것은 생략하도록 하지.”
황자는 단상 옆에 마련되어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병참장교. 현재 이 도시의 예비군과 상비군의 인원은 얼마나 되지?”
지목당한 장교는 항상 갖고 다니는 패널을 꺼내들었다. 마도공학소에서 개발한 패널은 우선 군을 중심으로 보급되었고, 마력정보망이 깔려있는 도시 내에서는 어디서든 쓸 수 있었다.
“네! 후방근무중인 5보병단의 병사가 183명, 제2예비군단의 병사가 498명,제3예비군단의 병사가 351명, 도시의 상비군이 75명으로 총 1,107명입니다! 장교들을 합치면 1,150여명 정도의 인원입니다!”
“흐음. 가용병력은 2천5백 정도인가.”
제국 5보병단과 기병대를 포함해 늪지전선에 있던 병력은 3천이 넘었지만, 날개 달린 마족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들이 나왔다.
날개 달린 늪의 마족은 하나하나가 제국 기사단원과 맞먹을 정도로 강한 놈들이었다. 설마 보스급일 것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정예병이었을 줄은 몰랐기에 대처가 턱없이 부족했다. 황자도 마테스가 아니었으면 크게 위험할 뻔했다.
“이중에 총포나 활을 잘 다루는 이들은 어느 정도지?”
현재 이 자리에 있는 인원들은 제3예비군이었다. 300명이 조금 넘는 이들 중 50여명이 손을 들었다.
“다른 군단에도 연락을 취해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이들을 최대한 모아주시오. 적은 하늘에 있으니.”
황자의 말에 장교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늘,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레노아 장군님. 장군께서는 5보병단과 기병대들을 소집해 별동대를 준비해주십시오. 현재는 날아다니는 놈들이 저들의 주력이지만 지상군도 대비를 해야 하니 그쪽을 부탁드립니다. 특히 요충지에 있는 요새에 대한 방비는 철저하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레노아 장군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황자에게 경례한 뒤 소집장을 나섰다.
“총, 활, 발리스타, 투석기, 그물, 기타 등등 날아다니는 놈들을 상대할 수 있는 것들을 전부 동원해야하오. 일단 제도에 물자와병력을 요청했으니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는 이곳에 있는 것으로 최대한 막아야겠지.”
황자의 주도 아래 갈란드 방어계획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부우-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멀어졌다.
불의 마력을 가득 품은 마석을 기폭제로 연료를 태우며 증기기관이 육중한 쇳덩어리를 움직였다.
방금까지 그 기차에 타고 있던 공녀는 서둘러 플랫폼을 벗어났다.
마침 켄스웰 왕국에서 제즈릭 공작령까지 직행하는 기차가 있었기에 공녀는 편지를 받은 지 나흘 만에 공작령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늪지와 제일 가까운 갈란드까지 가는 기차는 별도의 노선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다른 플랫폼에서 갈란드로 가기 위한 표를 별도로 끊어야했다.
“어이, 아리에. 말해두었던 표 구해놨어.”
미리 집에 연락은 해두었지만 루스카가 직접 나올 줄은 몰랐기에 공녀는 조금 당황했다. 그의 옆에는 새언니인 셀리아가 서있었다.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네. 오랜만이에요, 언니.”
재작년 결혼한 둘은 오랜만에 아리에의 얼굴도 볼 겸 이곳까지 나왔다고 한다. 공녀는 한시가 바빴지만 가족들에게 괜한 불안감을 주기 싫어서 한동안 서서 그들과 이야기를 했다.
어느새 기차시간이 다되자 공녀는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루스카와는 조금 어색한 악수를 하고 셀리아와 포옹한 뒤 공녀가 발길을 돌리려던 차 루스카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참. 가면 루테스한테 안부 전해주고.”
“네? 작은 오라버니가 갈란드에 있어요?”
“소식 못 들은 모양이네. 그 녀석, 군의관으로 전장에 가있어.”
“아…….”
예전부터 의학에 관심이 있더니 의사가 되어 종군한 모양이었다. 사실 예전부터 루테스는 은근히공녀에게 신경을 써주는 편이었고, 공녀도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지 제법 오래되었다. 자신도 전장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막상 가족이 전장에 있다니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몸조심해. 너 강한 건 알지만 절대 직접 나서서 싸우지 말고.”
“맞아요. 아가씨는 가끔 지나치게 대범하니까 조심성을 기르는 편이 좋아요.”
조심스러움에 일가견이 있는 셀리아의 충고에 공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플랫폼으로 들어온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녀의 뒤를 이어 벨로나가 루스카와셀리아에게 인사를 하고 기차에 탑승했다.
“아가씨. 제도에 우선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편지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는데.”
“원래 그럴 생각이었는데, 클레어한테 연락을 넣어서 저번에 개발한 물품을 이미 갈란드로 보내놔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그 물건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마력을 잘 다루는 총사가 필요한데, 하빈 정도의 정예 레인저가 아니면 바로 사용하기 힘들 거야. 레인저를 소집하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내가 직접 가야해.”
“그렇군요. 그런데 저번에 개발한 물품이요?”
“응. 총인데,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힘들 정도로 좋은 총이야.”
공녀는 뜻하지 않은 행운으로 좋은 총을 얻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약 두 달 전. 이제는 제법 많아진 마석연구소 일원들과함께 몇 개월간 연구한 끝에 두 가지 속성이 담긴 마탄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기쁨도 잠시, 속성의 방향을 반대로 돌리지 않으면 위력이 나오지 않아 단일속성을 띤 마탄보다 파괴력이 나을 게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총알 내 마력의 방향을 돌릴까 고심하던 그때.
“총알이 직접 회전하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한 연구원이 내놓은 아이디어에 불이 붙어 며칠 밤을 샌 공녀와 클레어는 드워프 장인까지 동원하여 총 한 자루를 만들어냈다.
기존의 장총보다는 짧고 권총보다는 긴, 손 두 뼘보다 약간 긴 길이의 총이었다. 겉보기에는 일반 총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총열 내부에 나선형으로 정교하게 홈이 파여 있었다.
특수한 형태로 제작된 두 속성을 담은 총탄을 쏘면 총알이 속성을거스르는 방향으로 회전하여 목표에 닿는 순간 공녀가 예전에 만들어냈던 진흙 탄이나 불꽃 회오리 등등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총을 만드는 과정에서 알아낸 것이 있었는데, 총열 내부에 새긴 나선형 홈으로 인하여 총알에 회전력이 생겨 명중력과 사거리가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드워프 장인들이 아니면 흉내 내기도 힘든 정교한 작업이라 총의 제작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었다.
그래도 공녀가 켄스웰 왕국으로 떠나기 전에 주문제작한 총은 완성되어 클레어가 대량의 이중속성 탄환과 함께 갈란드에 보내놓았다고 한다.
더불어 시제품으로만들었던 총도 몇 자루 보내놓았다고 했으니 마총병 중 뛰어난 자들을 교육시킨 뒤 총을 쥐어주면 날개가 달린 늪의 마족도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오랜만에 향하는 전장에 공녀는 긴장과 흥분을 느꼈다.
어떤 적이 온다 하더라도 물리칠 수 있어야 파멸의 상대가 가능할 것이다. 지금은 그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첫 걸음이었다.
루테스 제즈릭은 공작가의 둘째 공자라는 높은 신분이었지만, 이곳에서는 한 명의 신입 군의관으로 묵묵히 제 할일을 다하여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루테스는 어렸을 때부터 아픈 어머니와 동생을 보며 자라서 그런지 저도 모르는 사이 의료 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평소에는 멍한 눈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올려다보는 일이 잦았지만 환자들 앞에서는 더없이 진지한 모습으로 치료에 임하곤 하였다.
“으아아악!”
한쪽 팔이 어깨 아래까지 사라진 병사가 통증에 몸부림치자 사제와 간호사들이 환자의 몸을 붙들어 맸다. 루테스는차분한 눈으로 상처부위의 붕대를 풀어내고 소독을 한 뒤 치료의 마력을 흘려 넣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상완골이 깔끔하게 뜯겨져나가 이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었다. 간호사들에게 붕대를 다시 감으라고 말한 뒤 다음 환자에게 다가갔다.
한참을 진료하던 루테스는 한숨을 돌렸다.
갈란드의 병원은 이미 만실이었고, 도시 외곽에 마련된 군 주둔지 내의 야전병원까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병사들이 가득했다.
팔다리 한두 개 정도는 없어야 침상이라도 겨우 얻을 정도였다.
어지간한 일에는 무덤덤한 루테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사망자가 더욱 늘어날 것이었다.
후방의 야전병원에서 근무하던 그는 며칠 전 주둔지를 습격한 녀석들과 직접 마주치지는 않았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날아다니던 수백의 날개달린 마족들은 지휘관들이 모여 있는 전방의 본영을 먼저 급습했다.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보던 그는 전방으로 가려고 했으나 그를 호위하던 공작가의 기사가 그를 뜯어말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기사가 그를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죽었을 것이다.
마족들이 물러난 후 곧장 전방으로 향한 그는 수백 구의 시체와 더 많은 수의 부상자를 보았다. 일단 부상자들을 수송한 뒤 갈란드까지 물러나면서 루테스는 이를 갈았다.
제즈릭 공작령 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깊은 책임을 통감했다.
루테스는 얼굴에 묻은 피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한숨을 돌렸다. 슬슬 점심식사를 할 때였지만 도무지 식욕이 나지 않았다. 초보 군의관인 그는 온갖부위를다친 환자들을 돌본 뒤 식사를 할 정도의 비위를 아직 갖추지 못했다.
동료와 교대한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방에서 부상병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고 짙은 죽음의 냄새가 났다. 그마저 없던 식욕이 싹 가시는 것을 느끼며 루테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례합니다. 루테스 제즈릭 군의관님이십니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자 루테스는 힘없이 고개를 올려 상대를 쳐다보았다. 제복을 입은 부사관이 경례를 하며 그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루테스는 송신인에 형의 이름이 써져있는 것을 보고 별말 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편지를 읽던 루테스의 눈이 커졌다.
“……아리에가 온다고?”
루테스는 벌떡 일어났다.
요즘에야 생각이 많아졌지만, 그는 원래 별 고민 없이 사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아리에가 왜 이곳에 오는지, 누구를 만나러 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동생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기뻐서, 루테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무엇이든 잘 먹는 동생을 떠올리며,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