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제 7 장. 태동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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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란드 북쪽 외곽에 있는 기차역.
원래 이곳에 오는 열차는 대부분 물자수송용이었기에 사람이 타는 열차는 며칠에 한 번씩만 오갔다.
하지만 지금은 제국군의 후퇴 소식이 전해지면서 곳곳에서 차출된 병사들이 모여들고 있었고, 갈란드에서 다른 곳에 사는 친척 집 등으로 피난을 가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사람을 실어 나르는 일반 열차들이쉴 새 없이 운행 중이었다.
그리고 그 중 제즈릭 공작령의 중심도시 제페르 발 열차에서 화사한 하늘색 머리에 검은색 털모자를 눌러쓴 소녀가 내렸다.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어 내린 여기사가 그녀를 그림자처럼 호위하고 있었다.
“리에! 이쪽이야.”
공녀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한쪽 팔에 깁스를 한 황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건 또 왜 다쳤나 싶어 그쪽으로 향하던 중, 황자의 옆에 선 루테스가 보였다.
“아리에. 오랜만이야.”
군복에 의사용 가운을 걸친 루테스가 신선해서 시선이 절로 그쪽을 향했다. 공녀는 아무래도 오랫동안 못 본 가족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옆에서 황자가 무어라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루테스에게 가던 중, 또 그 옆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공녀님! 주문하신 물건입니다. 전달해드렸으니 이제 가 봐도 되죠? 내려야할 게 산더미여서요.”
마도공학소 전속 배달원이 큰 상자를 내려놓자 공녀는 앞의 두 남자들에게 건성으로 인사를 건네고 상자에 달려들었다. 공녀에게 외면당한 황자와 루테스는 서로를 쳐다본 뒤 상자를 개봉하여 물건을 살펴보는 공녀를 보곤 잠시 말없이 서있었다.
“황자전하. 작은 도련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뒤따라 나온 벨로나가 경례를 했고, 황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벨로나 경도 수고했소. 그래, 리에가 무슨 사고를 치지는 않았겠지?”
“그렇, 습니다.”
태연한척 대답하는 벨로나의 머릿속에서는 레이아의 얼굴이 떠다니고 있었다. 다크엘프야 나중에 다 알게 될 테지만 공녀의 도플갱어인 레이아에 관해서는 절대 함구하여야 한다.
나름 능숙하게 속였다고 자부하던 벨로나는 황자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기차역플랫폼에서 커다란 상자를 뒤지던 공녀는 똑같은 생김새의 총 두 자루를 꺼내들었다. 한 뼘 반 정도 길이의 은색과 검정색 쌍둥이 총은 드워프 장인의 손에서 탄생한 예술품에 가까웠지만 그 살상력은 여타 다른 총과 비교하기 힘들었다.
공녀는 미리 나와 있던 수송부대로 보이는 병사들에게 방금까지 자신이 뒤지고 있던, 장총이 가득 들어있는 상자를 주둔지까지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상자에 같이 들어있던 홀스터에 총을 집어넣었다. 양쪽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총의 무게감이 든든했다.
“아가씨. 총알은요?”
“나는 일반탄에 직접 마력을 부어서 사용할 수 있어서 괜찮아. 아, 그러고 보니 강선이 새겨진 총에 쓰는 총알은 모양이 특이해야했지. 클레어가 일반탄도 보냈을까 모르겠네.”
심각한 표정을 짓던 공녀는 금세 얼굴을 풀고 모자를 벗었다. 눌려있던 머리를 대충 다듬은 공녀는 새삼스레 황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동안 평안하셨나요, 황자전하.”
황자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는 공녀를 흘겨봤다.
아까는 자신의 인사를 무시해놓고 이제와 뻔뻔하게 인사하는 공녀에게 황자는 대놓고 불평을 표하지는 못했다.
최근 몇 년간 그들의 관계는 다소 복잡해졌다. 일단은 황자가 공녀의 상관이었지만, 공녀는 전 방위에서 활약하는 팔방미인인지라 그런 표면적인 관계에 구애받지 않았다.
공녀가 황실의후광 없이도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마석 기술자이자 마력 전문가로 성장하면서 황자는 조금 아쉬운 느낌을 받았다. 더 이상 아리에의 활약이 황실과 자신, 연구소의 위상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아리에와의 접점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 그러했다.
언제나 품안에 있을 것 같던 아이가 성장하여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을 보는 느낌이 이러할까. 어쩌면 처음부터 황자가 지는 것이 예정되어있는 사이였을지도 몰랐다.
“리에. 여기까지는 웬일이야?”
황자의 말에 공녀는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전장에서 패퇴해놓고, 다음날 바로 전보를 보낸다는 건 긴급 구조신호를 보낸 거 아니었어요?”
“아니야. 제도로 돌아가 있으라고 했잖아. 여기가 아니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황자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말을 돌리기는 했지만 결국자기가 걱정되어서 왔다는 소리가 아닌가.
“소식을 듣고 제가 어떻게 제도에 틀어박혀 있을 수 있겠어요.”
“하하. 그렇게 내가 걱정…….”
황자가 말하는 도중 공녀는 양손으로 빠르게 총을 뽑아들었다.
하빈에게 틈틈이 배운 드로우 솜씨와 허공섭물(虛空攝物)의 경지에 이른 바람의 마력을 다루는 기술에 의해 마치 총이 저절로 공녀의 손에 달라붙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상대할만한 강한 적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말이죠.”
총 든 팔을 교차하며 폼을 잡는 공녀를 보며 황자는 웃는 얼굴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루테스가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준 다음 자신이 앞으로 나섰다.
“아리에. 전장은 장난이 아니야. 지금 수많은 병사들이 죽고 다쳤어. 널 오랜만에 봐서 반갑긴 하지만 여기 오래 머물지는 마.”
“그렇기에 제가 온 거예요.”
“응?”
공녀는 진지한 눈으로 둘째 오라비를 바라보았다.
“더 많은 병사들, 제국의 백성들, 공작령의 시민들이 휘말리기 전에 제가 직접 전쟁을 끝내러 왔어요.”
루테스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공녀가 뽑아들었던 총을 다시 갈무리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사단만큼 강한 리자드맨을 상대하려면 창을 든 수천의 병사보다 제가 더 필요할거예요. 그리고 마도공학소에서 보내준 마도공학의 정수들도 필요하고. 이미 연락은 넣었고, 필요한 물품들이 도착하고 있죠. 아까 제가 주둔지로 보낸 상자처럼.”
루테스는 할 말이 없어져서 다시 뒤로 돌아갔다. 공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황자를 향해 섰다.
“황자전하. 제즈릭 공녀로서 부탁드립니다. 제즈릭 공작령을 어지럽히는 마족들을 토벌할 기회와 병력을 빌려주십시오.”
공녀의 말에 황자도 진지해졌다. 잠시 생각하던 황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력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는 것까지는 허락하지 못해. 일단 리에는 군 소속이 아니니까. 하지만 제즈릭 공녀가 갈란드에서 방위권을 펼치는 것은 오히려 도와주어야겠지.”
애초에 병사들을 달고 늪지로 특공할 생각은 없던 공녀는 만족하고 수긍했다. 일단 아까 모아놓은 총 잘 쏘는 병사들을 만나기 위해 그들은 예비군 주둔지로향했다.
“그런데 그 팔은 진짜 다친 거예요?”
“응? 당연한 걸 묻고 그래.”
약간 어이없다는 듯 대답하는 황자를 향해 공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치유의 마력으로 치료가 안 되는 정도에요?”
“아니. 그건 아닌데, 굳이 치유의 마력까지 동원할 정도는 아니어서. 나보다 심각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사방에 있는데 조금 긁힌 걸로 마력을 낭비할 수는 없지.”
황자의 말에 공녀는 불만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공녀가 황자의 다친 팔에 손을 가져갔다.
은은한 빛이 붕대로 스며들었다. 꽤 깊숙이 살을 베여 상처 사이로 뼈가 보일 정도였던 황자의 팔이 순식간에 원상복구 되었다. 당황한 황자는 붕대를풀고는 팔을 몇 번 움직여보았다.
“거짓말쟁이.”
뾰로통한 표정을 한 공녀의 가벼운 비난에 황자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황자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들어간 마력은 상당했다. 진짜로 약하게 다쳤다면 진즉에 군의관이나 사제들이 치유의 마력으로 고쳤을 것이었다.
당장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를 치료할 정도의 마력이면 위중한 병사들 몇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거라 판단해 황자는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치료를 포기한 것이었다.
군의 지휘관이나 마찬가지인 황자는 부상투혼을 어필하기에는 더 이상 올라갈 자리도 없었고 명성도 쌓을 필요가 없었다. 황자가 다친 채로 돌아다니는 것은 사기에 오히려 악영향이 간다는 것을 황자 자신이 모를 리도 없었다.
공녀가 추론한 대로 황자는 저번 급습에서 꽤 깊은 상처를 얻었던 것이었다.
“리에는 못 속이겠네.”
“애초에 숨길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죠.”
공녀의 잔소리에 황자는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루테스가 조용히 말했다.
“황자전하는 장래에 공처가가 되겠네요.”
루테스의 말을 들은 공녀와 황자는 물에 빠진 고양이마냥 깜짝 놀라 동시에 외쳤다.
“누가 황자전하랑-!” “누가 누굴 무서워한다는-!”
서로 외치는 내용이 달라서 각자의 말을 곱씹어보던 둘은 고개를 서로의 반대편으로 휙 돌렸다.
“어이쿠. 속마음들을 말씀하셨네. 미안하게 됐습니다.”
큰 폭탄을 떨군 루테스는 아무렇지 않게 사과했고, 공녀는 분한 표정으로 루테스를 노려봤다.
조용히 뒤를 따르던 벨로나는 한숨을 쉬고 앞으로 나섰다.
“자, 부부싸움은 나중에 하고, 일단 마족과 싸울 준비부터 하시죠.”
“누가 부부싸움을 한다는 거야?”
아가씨의 진심어린 질책을 들으며, 벨로나는 그들을 주둔지로 이끌었다.
“총을 다룰 줄 아는 이들을 모두 모았습니다.”
주둔지 연병장에 모여 있는 200여명의 병사들 중 마총사는 3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마총사는 귀중한 병력이라 예비군으로 돌려지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 근방의 요새에 있을 것이다. 그곳에도 순차적으로 들를 예정이던 공녀는 총을 추가로 발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녀는 병사들 중에서 경력이 많은 이들을 몇 명 불러냈다. 포수 집안에서 자라서 어렸을 때부터 총을 다뤄온 병사부터 군에서 처음 총을 잡았지만 기막힌 명중률을 자랑했다는 병사까지 10명정도가 앞으로 나왔다.
“지금 제가 지급할 총과 탄약은 마도공학소와 제국 병기창에서 특수 제조한 물품입니다. 사용법이 조금 특이하니 자세하게 알려드릴게요.”
공녀가 마도공학소에서 마석을 연구한다는 것은 일반인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있었다. 특히 군에서 필수로 취급되는 보호막의 마석이 공녀의 작품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드물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총을 다뤄보았던 만큼 그 유명한 공녀가 직접 공수해온 특수한 총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한동안 이어진 총의 구조와 강선, 특수탄과 그 효과에 대해 설명을 들은 병사들은 그 엄청난 스펙에 놀라워하며 반신반의했다.
공녀는 상자에서 장총을 몇 자루 꺼내서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병사들에게 특수탄을 쥐어주고 표적을 향해 쏘도록 지시했다. 가볍게 쏜 탄환이 표적에 명중하자 불꽃회오리가 일어나 주변의 표적들을 집어삼켰다.
일반적인 마탄이 파괴력만을 증가시키는 정도나 약간의 속성을 담는 것이 전부였던 것에 비해 굉장히 대단해보였기 때문에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와아-!”
병사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공녀는 자신의 총 두 자루를 꺼내들었다. 권총보다 살짝 긴 그 총에 마탄이 아닌, 강선이 새겨진 총 전용으로 디자인된 일반 탄환을 장전한 공녀는 총을 쏘는 순간 탄환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탄환이 명중한 표적이 얼어붙은 뒤 폭발하자 병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특수탄환의 종류는 4가지 기본 속성 중 반대 속성을 제외한 두 속성을 붙여서 만든 진흙탄, 불꽃회오리탄, 물보라탄, 용암탄의 네 종류였기에 공녀가 쏜 탄환의 정체는 불분명했다.
“아직 파생계열의 마탄은 대량생산하지 못했어요. 애초에 파생계열 마력을 다루는 이들이 적어서 그렇기도 하고, 조그마한 탄환에 담아내기에는 마력이 불안정하거든요.”
공녀의 설명에 마력을 잘 다루는 벨로나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얼음과 번개의 오러를 다루는 그녀는 4대속성이 아닌 파생계열 속성의 오러가 얼마나 유지하기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기본적으로 리자드맨의 마족형태인 늪지의 마족입니다. 늪지에서 살기 때문에 진흙탄은 아쉽지만 크게 효과가 없을 거예요. 물보라탄도 마찬가지죠. 날아다니는 마족들의 날개를 태워버릴 불꽃회오리와 용암이 필요합니다.”
배달부들이 열심히 나른 탄약상자에는 불과 바람, 불과 땅의 속성을 담은 탄환이 가득했다. 아까 시범으로 썼던 물과땅, 물과 바람의 탄환은 나중에 다른 적을 상대할 때 쓸 기회가 올 것이었다.
“그리고 저는 마력각성자인 저만이 쓸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을 상대할 것입니다. 자, 총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공녀는 총이 담겨있는 상자에 손을 올렸다.
“메인 딜러. 하실 분?”
병사들이 앞 다투어 손을 들었다.